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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 칼럼] 복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기독일보 la@christianitydaily.com

입력 Jul 08, 2018 08:43 P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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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 목사.
(Photo : ) ▲이경섭 목사.

 

 

복음 설교를 좋아하고 안 하고는 설교 취향의 문제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문제 곧 구원과 직결됩니다.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들(행 13:4)"과 "구원에의 부름을 받은 자들"에게는 복음이 믿어지고 복음이 최고의 능력과 지혜로 칭송되지만(고전 1:18; 24), 멸망당할 자들에게는 미련하게만 보일 뿐입니다(고전1:18). 복음이신(막 1:1) 예수님에 대해 믿음(요 8:30) 혹은 극도의 증오로(요 8:37) 엇갈린 반응을 한 사람들로 같은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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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30, 37, 40). 안타깝게도 이런 복음의 호불호(好不好)는 한 핏줄을 타고 난 형제간에서도 뚜렷이 양분됩니다. 아벨과 가인, 에서와 야곱, 이스마엘이 그랬습니다.

가인은 곡물 제사를 통해 복음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반면, 아벨은 피(믿음)의 제사를 통해 그의 복음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삭은 성령을 따라남으로서 그가 약속(복음)의 자녀임을 보여주었고, 성령을 쫓아 난 이삭을 핍박한 이스마엘은 복음과 무관한 자임을 증거했습니다(갈 4:29).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는 자신이 복음의 가치를 모르는 자임을, 형의 장자권을 차지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야곱은 복음의 가치를 아는 자임을 판명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만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의 호불호성(好不好性)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를 "복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로 고쳐 쓸 만 하게 합니다.

◈복음이 호(好), 불호(不好)로 갈려지는 이유

복음의 호불호는 구원 문제와 직결되는데, 세분하면 다음 두 가지 요인으로 나눠집니다. 그 첫째가 그가 하나님께 속했느냐, 마귀에게 속했느냐에 따른 결과입니다. 빛이신 하나님께(요일 1:5) 속한 자들은 본능적으로 빛인 복음을(고후 4:4) 좋아합니다. 반면 어둠의 지배자 마귀에게(엡 6:12) 속한 자들은 본능적으로 빛인 복음을 싫어합니다(요 3:20). 예수님도 하나님께 속한 아브라함은 복음 진리를 사랑했지만, 마귀의 자식인 유대인들은 복음 진리를 말하는 자기를 죽이려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0, 41, 47)".

예수님은 계속하여 유대인들이 자신을 믿지 않는 이유를 '자기의 양이 아닌'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6-27)". 이처럼 복음의 호불호는 근본 하나님께 속했느냐 속하지 않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복음이기에 하나님께 속한 자 역시 본능적으로 복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둘째 복음에 대한 호불호는 중생했느냐 아니했느냐에 따른 결과입니다. 인간 영감(inspiration of man)의 산물인 세상의 문학, 예술, 철학, 종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공감할 수 있지만, 초자연적인 성령의 영감(Holy Spirit-breathed)으로 된 복음은 중생자냐 미중생자냐에 따라 호불호로 갈립니다.

오직 거듭난 자만이 좋아하며, 거듭나지 못한 죄인이 복음을 좋아하는 것은 사자가 풀을 좋아하고(사 11:7), 개와 돼지가 진주를(마 7:6) 좋아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누가 만일 복음을 좋아하게 된다면, 그가 복음으로 거듭나(약 1:18, 벧전 1:3: 23: 25) 복음의 DNA가 그의 영혼 속에 각인된 결과입니다. 이는 마치 연어가 알에서 부화될 때 뇌 속에 모천(母川)이 각인되어 모천을 기억해 내는 것과 유사합니다.

예수님도 사람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고 들은 결과라고 했는데(요 6:45), 여기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자들이란, 곧 '거듭난 자'를 말합니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요 8:38)".

여기서 '배움'을 '거듭남'과 동일시함은, 거듭남보다 강력하고도 완전한 교육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될 때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 안에 새겨졌듯, 복음으로 거듭난(재창조된) 사람(벧전 1:23-25)의 영혼 속에는 복음이 새겨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 영혼 속에 새겨진 복음은 가장 강력한 교육이 되어 그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복음을 인지하게 하고, 복음 지향적이 되게 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육의 심비에 새겨진 복음(고후 3:2-3)"은, 사람 마음에 새겨진 복음은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가장 효력 있는 교육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으로 거듭나 그 영혼에 복음이 각인된 사람은 복음을 들을 때 본능적으로 복음에 끌리게 됩니다.

◈거듭난 택자들에게 성령으로만 알려지는 복음

복음은 하나님의 소유된 거듭난 자들의 것일 뿐더러, 반드시 성령으로만 알려진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합니다. 거듭남만 있고 복음이 없거나 혹은 거듭남과 복음만 있고 성령이 없다면, 구원은 성취되지 못합니다. 이 점에서 거듭남, 복음, 성령은 서로 불가분리입니다.

복음을 깨닫는 데는 '거듭남'과 함께 '성령의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듭난 자들에게 복음을 성령으로 깨우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11)".

예수님께서 복음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라고 하신 것은, 복음을 아는데 인간의 지혜는 무용하며 하나님만이 그것을 가르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다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초월적인 천사들에게까지 확장시켜, 그들에게까지 복음이 감춰졌다고 말씀합니다(벧전 1:12). 이는 인간의 지성을 뛰어넘는 영물인 천사조차도 그의 생득적 지식으로는 복음을 알아먹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대(大) 신학자는 복음을 더 잘 알고 무학자는 복음을 잘 모를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이는 정당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관한 한, 오히려 무식이 복음의 계시를 왜곡 없이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더 유리합니다. 오히려 지혜 있다 하는 자들은 복음에 자기의 지혜를 개입시키므로 복음의 빛을 차단시킵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 가운데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다(고전 1:26)"고 하신 말씀은 우연이 아닙니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복음을 말할 때 언제나 모든 사람이 아닌 택자들을 염두에 둬야 하며, 그 방법에서도 인간의 지혜를 발동시키는 현학적인 방법이 아닌, 오직 성령 의존적으로 해야 합니다.

세상의 문학, 예술, 철학은 인간 영감(inspiration)에 호소하여 설득이 이루어지기에 지성의 활성화가 요구되지만 복음은 오직 성령으로만 깨달아지기에, 복음 설교자는 자신이나 청중들로 하여금 오롯이 성령만을 의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靈, spirit)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는 인문학과 복음은 그 통치받는 영의 영역이 다름을 말한 것입니다.

성경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요일 2:27)"라고 하신 말씀은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자는 성령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한다(고전 2:13)"는 말씀 역시, 복음 전도에 인간의 지혜를 개입시키지 않고 성령만을 의지하여 한다는 뜻입니다. 오롯한 성령 의존적 복음 선포가 이루어질 때, 그것을 듣는 청중들 역시 오롯한 성령의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성령의존적 복음 선포는 논리나 설득의 과정을 생략한 채 복음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담대함을 갖게 합니다. 다음의 아프리카 선교사 두 분의 복음 선포 방식은 우리에게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한 분은 전도를 할 때 피전도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창세기의 인간 창조부터 타락, 구원에 이르는 과정을 조직신학적으로 체계있게 전했습니다. 다른 한 분은 그런 논리적 전개과정을 생략한 체 바로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신의 죄값을 다 갚아주셨습니다"고 전했습니다. 그 결과 전자보다 후자가 더 효과적이었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그 결과를 분석하면, 전자는 다양한 내용들을 전하려고 하니 많은 시간이 소요됐을 뿐더러 복음의 초점이 흐려지고, 과도한 지성의 활성화를 요구받으므로 성령의 역사가 방해를 받았습니다. 반면 후자는 복음의 핵심에 바로 들어가므로 인간 지성이 발동되는 것을 차단하고, 오롯한 성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는 인문학적인 지성까지도 성령이 사용하셔서 종교개혁의 발판을 마련한 역사적인 사실과 성령의 조명아래 있는 인간의 지성을 존중한 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망각하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지나치게 인간 지성에 의존하므로 성령의존적인 복음의 가르침이 희귀해진 오늘날의 풍토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 위에 세워졌습니까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워졌습니까(고전 2:5)?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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