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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 칼럼] 퀴어 신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VI)

기독일보 la@christianitydaily.com

입력 Jul 08, 2018 04:10 P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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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Photo : )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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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성(sex)은 교차적으로 엮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서로 다름 속에서 상호 보완성 가운데 있다.

2017년 10월 한국 장신대에 와서 강연한 미국 드류대 여성신학자 캐서린 켈러(Catherine E. Keller)는 "트랜스 페미니즘"(transfeminism)이라는 신학적 구상 속에서 성(sex)이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교차적이고 상호적으로 엮어져 있다고 다음같이 주장한다: "트랜스페미니즘은 필연적으로 교차성의 작업이다. 이 교차성 속에서 모든 것이 상호적으로 엮어져 있다(interwoven). 그 엮임이 선하든 악한 든 간에 말이다. 억압은 우리 영혼 깊이 파 들어오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아상으로서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규범적 이미지들이나 식민지적 우월성 혹은 신식민지적 우월성의 규범들을 내면화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이 거짓된 규범들에서 벗어나야 한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켈러가 과정철학의 과정(process) 개념을 성(sex)에 적용시켜 성이란 교차적이며 상호 엮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창조 질서인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짝으로서 상호보완적인 생물학적 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은 여성이 아니고 여성은 남성이 아니다. 해부학적으로 남성이 여성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여성이 남성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남성과 여성은 창조주에 의하여 태어날 때 정해지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교류는 서로 생물학적 해부학적 다름 속에서 교류할 수 있으며, 양성이 서로 자기의 성적 정체성을 지킬 때 비로소 교차성이 가능한 것이다. 창조 질서는 남성과 여성의 다름 속에서의 교류이지 남성이 여성이 되고 여성이 남성이 되는 교차성과 엮음이 아니다. 이는 창조 질서의 혼동이요 젠더의 혼란이다.   

켈러의 트랜스 페미니즘은 인간의 성을 '그/그녀/그것'"('he/she/it')으로 규정한다. "그것"이란 트랜스 젠더(trans gender)를 가르킨다. 성경적 질서로서의 성(sex)이란 남성과 여성으로 생물학적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남성이 여성이 되거나 여성이 남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여성이 혼합(混合)성(性)되는 것이 아니다. 성격(character)적으로는 남성 안에 여성의 모습이 있고, 여성 안에 남성의 모습이 있으나, 생물학적 본성으로는 인간은 창조의 질서대로 남성과 여성으로 지어지고 그렇게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 생물학적 본성에서 남성과 여성은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남성과 여성이 서로 교차적으로 있도록 하신 것은 서로의 생물학적 다름 속에서 서로의 상호적 보완성을 허용하신 것이다.  

켈러는 남성적 지배자적 자아로 파악되지 않는 현상태를 돌파하는 의미에서 "신적 트랜스 페미니즘"(divine transfeminism)을 다음같이 주장한다: "신(神)은 고전적인 견해처럼 이 세계와 분리된, 초월적인 위에 계신 주님이 아니다. 이 신(神)은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선다는 역동적인 의미에서 초월적이다. 신적 트랜스 페미니즘(divine transfeminism)이다. 그러나 신(神)의 초월하는 신비 속에서 우리 역시 초월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 즉 현 상태 (status quo)를 돌파하여 넘어서도록 부름 받은 존재이다. 이것은 내재하는 초월(a transcending within)이다-초월하는 만큼 내재한다. 따라서 신(神)은 서구의 남성적 자아(ego)의 이미지-즉 분리되고 멀리 동떨어져 있고, 위에 있고, 지배적인 어떤 존재로서-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켈러의 트랜스 페미니즘은 과정철학의 사상을 인간에 적용하는 것으로서 과정 자체를 신적 과정으로 파악하여 범재신론적 개념에 얽매어 있다. 이는 성경과 정통적 역사적 기독교가 신앙하는 만물의 과정 안에 계시나 과정을 초월하여 이 만물의 과정을 주권적으로 이끄시는 인격적 초월적 하나님(personal transcendent God)과는 다르다. 이러한 켈러의 신(神)은 남성과 여성을 초월하여 신적인 인격 존재로서 우리들에게 부성적으로 모성적으로 구속자로 다가오시는 인격적 초월적 하나님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을까?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증여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지 남성적인 지배자인 가부장적 신(神)이나 남성 지배자를 대적하는 모성적인 신(神)도 결코 아니다.

켈러의 범재신론은 "모든 것은 신(神) 안에 있다"고 다음같이 말한다: "우리는 신(神) 안에서 서로를 발견한다. 이것은 과정신학이 말하는 범재신론(pan-en-theism)의 의미다. 이것은 모든 것이 신(神)이라는 뜻의 범신론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신(神) 안에 있다." 이 명제에서 켈러가 언급하는 범재신론의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과 만물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 켈러가 말하는 "모든 것은 신(神) 안에 있음"은 하나님과 만물의 차이를 명백히 하여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초월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적이고 정통적 유신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주권자로 초월적으로 계시고 동시에 모든 것 안에 내재적으로 계시면서 모든 것을 그의 주권 안에서 통일시키시고 사랑 안에서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소멸이 아닌 그의 치유의 행위다. 만물은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하나님 심판의 대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 하나님은 사랑의 존재이시면서 거룩하신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과정 속에 계시나 과정과 동일시되지 않고 과정 위에서 과정을 그의 목적과 뜻을 향하여 이끌고 가신다.

II. "젠더의 부정성"은 인간 존재의 생물학적 정체성 부정이다.

케서린 켈러는 "젠더의 부정성"(aphophasis)을 다음같이 제안한다: "신비주의의 가르침처럼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부정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타자성에 대해 열려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은 새로운 긍정을 가능하게 한다.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남겨놓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를 더 배우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계속되는 과정은 다양성(multiplicity)이라고 하는 원리에 의해서 운용될 수 있다. 어떤 이름에도 안착할 수 없는 것을 많은 이름으로 계속해서 부르는 것이 사실은 계속되는 부정(aphophasis)인 것이다." "젠더의 부정성"이란 우리는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젠더의 정해지지 아니함으로서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계속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다양성으로 자기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트랜스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운동의 진정한 아름다움 즉 상호의존성과 얽힘의 급진성을 강화시키고자 한다. 트랜스 페미니즘의 이러한 언어는 근사하게 들리나 그 내용은 인간 존재와 성(sex)의 혼돈 속에 갇혀있는 부동(浮動)적 사고의 표현으로 들린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라는 것이 퀴어 신학이 말하는 젠더의 부정성(aphophasis)이라면 이는 자신의 생물학적 존재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요, 자신이 지닌 젠더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젠더의 부정성 주장은 젠더 이데올로기적 자기 폐쇄를 말하는 것이지 진정한 존재의 개방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트랜스 페미니즘은 자본주의적 수탈과 억압 속에서의 진정한 해방이란 "다수의 형상으로서의 얽힘(entanglement)"을 근거로 소통하고 연대하고 각자의 접층에서 진정성(authenticity) 혹은 성스러움(divinity)를 이루어가는 과정(들)을 통해서만 진정한 해방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트랜스 페미니즘의 해방이란 성소수자들 무리의 연대와 해방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는 이데올로기적 집단의 독단적 해방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  이러한 소통, 연대와 해방에는 혐오의 연대가 지배하며 용서, 사랑과 화해가 없다. 성소수자들의 연대와 해방은 성소수자들에 대한 연민과 해방을 위하여 종사하는 자들은 "동성애 혐오자"(homophobic)로 낙인찌고 이들을 법적으로 제약하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 이성애자들의 동성애자들에 대한 사랑에 입각한 비정상 지적을 "동성애 혐오증"(homophobia)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정상인인 이성애자들의 동성애 언급은 동성애나 혼합성이란 정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자연적인 이성애자들로서 자연스럽게 "비정상"으로 느끼는  존재 질서의 반응이지 단지 감정적 혐오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만일 "혐오"(phobia)라고 느껴진다면 행위자의 반응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라는 자기 정체성의 자연스런 불편함의 표출인 것이다. 퀴어 신학은 "트랜스 페미니즘"을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이고 경쟁을 위주로 권력을 쟁취하는 일자의 셈하기 체제 속에서 셈하여지지 않는 다수들(multiplicities)을 종단하며(trans-) 다양한 해방의 연대를 실현하자는 운동이며, '여성'은 그 셈하여지지 않는 다수의 대표적인 이름임을 인식하는 운동"이라고 특징지운다." 트랜스 페미니즘은 셈하여 지지 않는 다수들인 여성을 위계적이고 경쟁적이며 권력 쟁취를 지향하는 일자인 남성에 대립하여 세우고 있다. 여기서 트랜스 페미니즘은 남성적 가부장적 제도에 대한 다양한 해방 연대를 실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해방에는 현존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가부장 제도를 투쟁의 대상으로 보는 페미니즘 독재 정치가 있지 아니한가? 트랜스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성을 부정하고 페미니즘의 적(敵)인 경쟁과 위계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타도하려고 한다. 그 근저에는 공정한 경쟁과 성공한 여성 CEO의 자기 실현까지 부정하는 마르크스적 사회인식이 깔려 있다.

III. 트랜스 페미니즘이 창안한 "제3의 성"(the third sex) 역시 "제2의 성"과 같이 젠더 이데올로기의 창안물이다.

퀴어 신학자들은 있지도 않은 사회적 성이라는 "제2의 성"(the second sex)을 창안해 내어 젠더 이데올로기의 성곽 속으로 생물학적 성(sex)인 제1의 성을 유폐시킨다. 이들에 의하면  제1의 성(생물학적 성)이 지배하는 사회구조로부터 억압과 차별당하는 제2의 성(사회적 성)은 소통과 연대 속에서 해방을 쟁취해야 한다: "제2의 성이 철저히 억압당하고 배제당하는 구조 속에서 제1의 성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생물학적) 남성은 이 억압과 차별의 구조 속에서 이미 거세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구조로부터의 해방은 단순한 남/녀의 이분법만을 가지고서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억압받고 차별받는 다양한 집단들이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면서 각자의 접층에서 진정성(authenticity) 혹은 성스러움(divinity)를 이루어가는 과정(들)을 통해서만 진정한 해방이 가능할 것이다."

트랜스 페미니스트들은 "제3의 성"을 창안한다. "제3의 성"이란 "포스트휴먼 시대에 근대의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을 포스트휴먼주의, 즉 탈-인간주의로 극복하고 미래시대 사이보그적 인간의 출현을 예감하면서, '제2의 성'으로 일어났던 페미니즘에 대한 내부적 비판으로서 우머니즘(womanism)과 억압받는 모든 이들을 품는 담론으로 재구성되는 젠더 담론"을 지향하는 것이다. "제 3의 성은 모든 세계의 박탈된 존재들 즉 난민, 동물, 자연, 환경, 기계, 사이보그 등으로 확대되었음을 증언하는 표현"으로 본다. " '제2의 성' 이라는 개념처럼, '제3의 성'은 21세기 네트워크화된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제국주의적 인간 주체에 의해 억압되는 사이보그적 주체, 즉 인공생명의 주체들까지도 억압된 자로 포용하려는 자세"라고 본다.

이러한 "제3의 성"이란 포스트휴먼 시대의 성으로서 "제2의 성"과 마찬가지로 제1의 성인 창조 질서로서의 생물학적 성을 부정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성을 인간적 사회적 활동의 산물로 보기 때문에 앞으로 제 4, 5, 6의 성 등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성의 모습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에 대한 개념이 규정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포스트 휴먼시대의 인간의 성은 교차성과 얽임 속에서 끊임없이 부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방황이요 인간 성(sex)의 자기 정체성 상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은 몸의 존재로서 성을 지닌 존재다. 중성은 없다. 남성이나 여성으로 주어진 생물학적 성은 인간에게 주어진 창조 질서요 존재질서다. 천사는 몸이 없으나 인간에게는 몸이 있으며, 인간은 성을 지닌 존재다. 이것이 인간다움이다. 이러한 성은 신체적으로 주어졌고, 남성이나 여성으로서 인간은 그 존재를 인격적으로 체험한다. "제2의 성," "제3의 성"이란 인간 몸의 자기 일탈이다. "제2의 성"이나 "제3의 성"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성을 지닌 인간의 형성되는 성격과 사회적 역할이 있을 뿐이다. "제2의 성"이나 "제3의 성"이란 제1의 성인 생물학적 성에 기반한 인간 성의 자기(自己)변태(變態)일 뿐이다.

IV. 젠더는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한다.

트랜스젠더 신학자 캐서린 켈러는 전통적인 이원적 젠더 담론을 부정한다. 그녀는 다음같이 피력한다: "'젠더' 담론에 대하여 보다 더 개방적이고,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면 즉, 기존의 이원론적 젠더 담론을 문제시하면서, 더 복잡하게 만들고, 교차적으로 관계적인 시도를 한다면, 생명의 범위를 인간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전 생명체를 포함하는 만큼 개방적이 될 수 있다면, 페미니스트 신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더 값진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트랜스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진 이원적 젠더 질서를 부정하고 이를 개방적으로 복잡하게 교차적 관계로 만들어 인간 존재를 더 풍성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이데올로기적 구상일뿐이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트랜스 페미니즘이 창조 질서인 이원적 젠더 질서를 부정하고 트랜스 젠더(그/그녀/그것)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전 생명체를 개방적이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생태 질서를 교란시키는 트랜스 젠더 이데올로기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젠더 이데올로기 운동을 문화인류학적 성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원적 성적 질서가 없다면 생태계는 존속될 수 없는 것이다. 동성애적 성질서는 이성애적 성질서와는 달리 거기에서는 후손의 증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성애적 심리적, 정서적 상호보완이 없기 때문이다.

켈러는 생물학적 성(biological sex)과 정신적 성(mental sex)를 혼동하고 있다. 전자는 선천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후천적으로 바꿀 수 없다. 생물학적 성은 동성과 교류할 수 없고 이성과는 교류할 수 있다. 신체적으로도 그렇게 되어 있다. 이성(異性)과의 결혼을 통하여 이성은 한 몸이 되고 하나의 정신이 된다. 인간의 정체성은 몸과 정신의 통일성으로 이루어진다. 동성 간의 성적 교류는 변태적인 교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 성이란 동성과 이성과 다양하게 교차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 정신적인 성으로는 이성과도 우정을 나눌 수 있다. 트랜스 페미니즘이 젠더의 부정성(aphophasis)을 말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창조 질서인 성인 젠더의 선천성, 생물학적 성의 선천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창조주의 창조 질서를 젠더 이데올로기로써 부정하는 것이다. 젠더의 다양성이란 젠더 이데올로기의 인위적 주장으로 동성애와 혼합성애, 퀴어성(queer sex)을 지지하기 위한 고안물에 지나지 않는다.  

V. 쿼어신학은 인간의 제2반란(젠더의 결정자는 인간)을 지지하고 있다.

1. 젠더 이데올로기는 제2의 반란

동성애가 정상적인 성애(性愛)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젠더 이데올로기이다. 젠더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스스로 젠더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는 원죄를 되풀이하는 제2의 반란(the second revolt)이다. 원죄란 인간이 선악을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반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창세기 3장의 하나님 계명을 엄밀히 읽어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동산의 각종 실과는 네가 열매를 임의로 먹을 수 있도록 자유를 허락하셨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창 2:16). 그러나 동산 중앙의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명하셨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창 2:17a).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b).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인간의 한계를 설정하신 것이다.

선악과란 단순히 과실나무를 먹지말라는 과수원 주인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원리를 제시하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존재로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부터 그의 생명력을 공급 받음으로써만 그 영혼과 신체가 존재함을 누릴 수 있다. 인간의 거룩성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누릴 수 있고, 인간의 지식이란 하나님 말씀이 기본이 됨으로써만 진정한 앎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너질 때 인간의 존재는 무너지는 것이다. 이것을 아시고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에게 동산 과일을 임의로 먹되, 선악과라는 지식의 실과는 먹지말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2. 젠더 이데올로기는 인간 신격화

악마는 하와를 다음같이 미혹하였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젠더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 인간이 스스로 젠더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피조적 제한성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 자신의 성(性) 정체성을 정립하고자하는 시도로서 제2의 반란(the seond revolt)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낙원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한 이 말은 오늘날 젠더 이데올로기가 인간 신격화를 시도하는 내용이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젠더를 정할 때 인간은 전통적 성의 굴레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이야기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었을 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서는 관계로부터 단절되었다. 창세기 이야기의 교훈은 선과 악을 아는 일은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영생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 3:22).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나무 실과로 향하는 길을 차단당하셨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반역함으로써 생명나무 길로부터 차단당했다. 이것이 죽음에의 존재가 된 인간 존재의 운명인 것이다. 오늘날 젠더주의자들은 인간 성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과 악에 대한 윤리를 스스로 정립하고자 함으로써 제2의 반란을 시도하고 있으며 퀴어 신학자들은 이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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