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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연대 문제, 교회는 어떻게 보았는가?

기독일보

입력 Jul 05, 2018 06:23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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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
(Photo : ) ▲조덕영 박사.

철학이 시간에 대해 정의가 어려운 문제인 반면 성경은 시간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제시되어 있다. 성경에서 시간은 시작점이 있으며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실현되는 피조 영역, 즉 창조에 속한 것이다. 그 속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를 증거하여 왔다. 물론 이 섭리는 교회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창조주께서 우리 인류에게 창조와 구속의 주(主)임을 계시의 책인 성경과 자연을 통해 인식한다. 교회는 그것을 역사 속에서 증거한 중요한 기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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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의 중심이 되는 성경은 '노르마 노만스'('norma normans' = 규범 시켜 주는 규범, norma absoluta, norma causativa)이고, 교회의 교리나 신조는 '노르마 노마타'(norma normata = 규범 되어지는 규범)이다. 즉 개혁신학에서 성경은 무오(無誤)하며 교리사는 어느 정도 오류사(誤謬史)로 본다. 따라서 아무리 훌륭한 신조도 무오한 말씀에 판단 받아야 한다. 다만 정통 개신교는 '노르마 노마타'를 하나님 말씀의 최종 권위에 의해 규정된 준칙으로 본다. 즉 정통 교리와 신조는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작성한, 성경에 일치함으로써 기독교의 보편 진리들을 훌륭히 요약하고, 하나님 말씀과 다른 이질적 교리들을 분별해내며, 교회 교육과 예배에 긴요하게 사용할 수 있다. 성숙하고 노련하며 성령 충만한 신앙 선배들의 이런 노고(교리와 신조의 전통)가 없었다면 교회는 바른 예배와 교육이 어려웠을 것이고, 기독교는 이단 사이비들로 인해 대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 연대 문제에 대해 교회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까? 초대 교부들은 이 문제에 대해 그리 크게 반응한 적이 없었다. 창조 신앙은 신앙의 기초요 출발점으로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창조 연대 문제는 구속사의 관점에서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다. 초대교회사 어디에도 창조 연대 논쟁이 벌어지거나 이 주제를 교리화한 흔적은 없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의 창세기 해석

그럼 혹시 창세기 1:1-2:3절 해석을 둘러싼 초대 교부들과 종교개혁가들의 연대 논쟁은 있었는가? 먼저 주요 교부들의 창세기 해석을 보면 놀랍게도 창조 연대에 대한 문제 제기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창세기 주석과 설교를 통해 6일 창조를 다룬 오리겐, 어거스틴, 요한 크리소스톰, 대 바실리우스, 암브로시우스 누구도 창조 연대 문제를 이슈화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창조 신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는 근본주의자들의 근본교리들 안에도 이 문제는 이슈화되지 않았다. 당연하다. 교부들은 오늘날 자연주의적 환원주의를 따르는 자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교부들의 창세기 해석은 오늘날 연대 논쟁의 씨앗이 된 성서문자적인 근본주의적 해석 방법과 전혀 달랐다. 교부들은 '성경은 성경으로 가장 잘 설명 된다'(scripturam ex scriptura explicandum esse)는 해석원리를 충실하게 따랐다. 교부들은 이처럼 창세기 1-3장을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관점에서 예표론(typology)으로 접근한다.

많은 조직신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근본주의는 오히려 자유주의와 유사점을 보이는 데 왜냐하면 둘 다 계몽주의 산물인 합리주의와 역사주의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근본주의나 신비주의나 자유주의가 다른 듯하면서도 서로 유사성을 띠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종교개혁주의자들의 창세기 해석

사실 이런 교부들의 전통은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에게 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세기 1장 주석에 있어 루터와 칼빈은 바실리우스(Basilius)나 암브로스(Ambrose)의 이해를 받아들인다. 이들 견해의 특징은 먼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다. 칼빈에게 있어 물체가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고 하는 이방신 숭배자들의 주장은 하나의 우화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조화의 하나님이요 완벽한 하나님이었다. 따라서 칼빈은 창세기를 주석하면서 과학의 문제에 있어 매우 조심스러웠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성경에서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배우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함으로써 마치 성경을 과학 서적처럼 다루는 일에 대해 강력히 경계한다. 왜냐하면 모세는 단지 미개인까지 알아볼 수 있는 일반적 방식으로 성경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해와 달에 대해 칼빈은 창세기가 철학적으로 우리에게 말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들에게 어느 정도 밝게 우리들에게 비추는지를 말하고 있다고 하였다. 신비한 세계를 더욱 탐구하려면 성경이 아니라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칼빈이 보기에 창세기를 서술한 모세는 과학의 언어가 아닌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줄 뿐이다. "만일 모세가 일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면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문제를 도무지 알 수 없다고 그에게 호소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칼빈에게 있어 창조의 6일은 24시간의 여섯 단위가 아니었다. 칼빈은 순간 창조 개념을 반대하였다. 성경은 기원전 4천 년 전에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 아니었다. 확장된 시간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인간의 사고 방식에 적응한 것이었다. 칼빈은 그에 따라 창세기 1장의 주석에서 궁창 위의 물도 물이 아닌 구름으로 해석하였다. 칼빈의 해석방법은 이것이 물이든 구름이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가 전혀 훼손되는 것이 아니었다. 즉 칼빈에게 있어 이 모든 것들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칼빈은 당시 천문학적 지식에 적응하여 달이 불명료한 물체라는 것을 인정하나 캄캄한 물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칼빈은 달이 불타고 있는 물체일 것이라 보았다. 즉 달은 발광체라고 말한다. 성경이 달을 광명(창 1:15-16)이라고 부르니 성경에 적응하면 달이 광명이라는 것은 옳다. 그러나 천문학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생긴다. 물론 지구도 광명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달이나 지구가 그 중심에 뜨거운 마그마를 담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또한 그 실체에 대한 해답이 간단하지는 않다. 즉 발광체든 아니든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과학자들의 견해도 결국 시대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과학자들도 당연히 오류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과거의 과학자들을 모두 오류투성이의 위선자들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칼빈도 당연히 제한적 지식 아래 잘못 말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것이 과학의 문제에 대한 칼빈의 성경 주석이 미숙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칼빈은 성경 원문을 철저하게 연구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탁월한 성경 원문 연구가였다. 이런 자세는 당시 유럽의 인문주의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칼빈이 성경 해석에 있어서와 같이 과학의 문제에 대해서도 결코 대충 넘어가는 능력이나 성품을 지닌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 칼빈은 성령이 "저속하고 교육받지 못한 무리들로 하여금 배우는 길을 막아버리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와 함께 말을 더듬거리는 쪽을 선택했다"고 유명한 주석을 한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눈높이를 맞추어 우리가 몸을 떠는 방식으로 몸을 떠시는 분이다. 그런 면에서 칼빈이 보기에는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의 지동설에 대한 비판에 대항해서 수학적 물리적으로 난해한 점들까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 모세나 선지자들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임이 분명하였다. 모세는 보통 사람들이 쓰는 언어에 자신을 적응시킨 것이다. 칼빈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불충분성을 잘 알고 있었다. 자연 계시란 칼빈에게 있어 약간의 섬광과 같은 것으로 비쳐진다. 사도 바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성이 그러한 광명 속에서 명백히 계시되어지지만 우리의 눈이 신앙을 통해 하나님이 내적 계시에 의해 조명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설명한다(롬1:19). 칼빈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계시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칼빈은 "젊은 창조 연대주의자다", 혹은 "진화론자다"라는 일부 논쟁이 있으나 이것은 칼빈 신학 방법론의 진의를 알면 모두 부질없는 판단에 불과한 것이다.

개혁주의 생명신학과 창조 신앙

그런 점에서 최근 개혁주의 생명신학을 표방한 백석학원의 개혁주의생명신학선언문이 기독교와 과학의 상관관계에 있어, "과정철학에 근거한 유신진화론과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집중하는 창조과학(Creation science) 운동을 서로 극단에 있는 상반된 견해로 보고 양극단적 견해를 모두 비판"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개혁주의 생명신학은 과학이 하나님의 전능성과 섭리를 입증하고 드러낼 수 있는 좋은 도구임은 분명히 인정한다. 하지만 생명신학자들은 과정신학의 진화론에도 많은 문제점이 존재함을 지적하나, 보편성(universality)과 검증성(verifiability)이라는 잣대를 무시하여 과학적 증거와 자료들을 오용(誤用)한 "창조과학자"들도 동시에 비판받아야 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면서 생명신학자들은 (1) 과학에 대한 맹신을 버리고 (2) 과학적 탐구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며 (3) 특정한 과학이론(예 진화론)에 대하여 사실적 근거가 부족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맹신만을 드러내는 비판을 삼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백석 교단은 양적, 질적인 면에서 국내 기독신학 3대 교단에 들만큼 최근 급성장한 교단이다. 국내 기독교 대교단의 한 중심을 이루고 있는 백석학원이 "창조과학"과 "진화론"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코멘트를 했다는 것은 다른 교단이나 교단 신학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유일한 것으로 백석 학원의 통찰력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진화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사실적 근거가 부족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맹신만을 드러내는 비판은 삼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귀담아들을 만한 부분이라고 여겨 진다. 과학 기술 시대를 맞아 이제 타 교단들도 신앙과 과학에 대한 바른 해석과 신학적 입장 표명을 통해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성도들을 바른 길로 유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니 교단들이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필자는 너무 늦었다고 본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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