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서북지방 기독교 지도자들을 박멸할 목적으로 허위로 꾸며낸 105인 사건은 명백한 조작임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사법부는 정의와는 동떨어진 판결로 역사에 오점을 남긴다.

이 때 발표된 판결문에는 기독교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이 다음과 같이 표출되었다. “본 건의 음모는 신민회의 간부에 의해 행해졌지만, 그들은 동시에 조선에 있어서 야소교 신자의 유력자였으니만큼 동지로서 가담한 야소교계 학교의 교사 및 학생들이 다수 있었다. 유래(由來) 조선에는 다수의 미국 선교사가 있어서 전도에 종사하고 있는데 조선인의 정치적 불우(不遇)는 자연 동정의 대상이 되어 포교의 세력을 넓혔다. 조선인측에서도 선교사를 통해서 강대한 미국의 힘에 기대려는 풍이 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 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105인사건’이라고 한다. 105인 모두가 판결에 불복, 상소하여 고등법원에까지 가서 지루한 공방이 계속되다가 최후 판결이 나왔다. 일제의 엉터리 법정도 세계의 눈이 두려워 99명에게 무죄를 선언하고, 소위 주모자급 6인에게만 징역 6년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1915년 2월 이들이 일본 왕 대관식 특사 형식으로 출소할 때, 평양역에는 약 9천여 명의 시민이 출영하여 국가와 신앙을 위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은 이들을 극진히 환영하였다.

이 사건에서 간과할 수 없는 일은 이 사건에 임하는 선교사들과 미국 본국의 역할이었다. 평양에 거주하던 선교사들은 이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써서 본국 해외 선교부 총무 브라운(A. J. Brown)에게 보냈다. 브라운은 처음에 이 사건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다른 통로를 통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황성 기독청년회(YMCA) 총무로 일하고 있던 질렛(P. L. Gillett)이 이 사건의 전말을 중국에 있는 자기 친구에게 써 보냈다. 그 중국인 친구가 이것을 「홍콩데일리뉴스」(The Hong Kong Dalily News)에 공개함으로써 외부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사는 곧 미국의 「뉴욕헤럴드」(The New York Herald), 「더 썬」(The Sun), 영국의 「더 타임스」(The Times), 일본의 「재팬 크로니클」(The Japan Chronicle), 「재팬 가젯트」(The Japan Gazette), 「재팬 에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 등에 연일 게재되어 세계 여론의 초점이 되었다.

이제까지 소극적이던 미국 선교부도 공판이 진행되면서 사건의 허구성과 잔인무도한 고문의 실태가 폭로되자 이 문제를 일제의 기독교 박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였다. 교회는 미국 대통령, 국무장관, 의회 지도자들과 접촉하면서 사건의 해결을 위해 힘쓰기 시작하였다. 브라운은 이 사건의 전말을 ‘한국의 음모’(The Korean Conspiracy Case)라는 보고서로 작성하여 미국과 기타 여러 나라의 신문에 보도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선교부의 적극적 관여로 일제도 세계의 이목과 미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이 사건을 2심에서 적당히 축소하여 처리하는 방향으로 끝맺었다. 일제가 서북의 기독교 세력을 박멸하기 위해 저지른 이 서투른 조작극은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그렇게 마무리 되었고 일제의 비열하고 음흉한 흉계를 세계에 폭로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일제가 기독교를 박멸해야만 식민지 통치가 가능하다고 인식하였음을 보여 주었고, 교회가 항일의 근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다. 교회는 또다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결코 그런 외압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확인해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음으로 일제의 기독교 학교의 탄압과 개정 사립학교 규칙에 대해 알아보자.

일제는 기독교에 직접 박해를 가할 경우 선교사들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고, 이는 곧 미국 등 서구 국가들과의 불편한 관계가 초래될 것을 염려하였다. 따라서 가장 효율적으로 기독교 세력을 억압하고 고사시키는 방법으로, 기독교계 학교를 탄압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당시 한국 교회 가정의 4만여 학령기 아이들 중 2만여 명이 교회 소속 1천여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는 앞으로 기독교 교육을 받은 많은 지도자들이 배출된다는 의미로 일제에게는 조선 통치에 커다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총독부는 기독교 학교를 그들 손아귀에 넣고 통제하기 위하여 1911년 8월 전문 30조로 된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였다. 여기에 각 급 학교(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 실업학교, 사립학교)의 교육규칙과 학교관제에 관해 규정하였다. 그런데 이 법은 철저히 일본학생과 한국학생과의 차별 교육을 규정했는데, 초등학교의 경우 일본 학생의 수업 연한은 6년이나 한국 학생은 3∼4년이었고, 중학교도 일본 학생은 5년인데 한국학생은 4년이었다. 여자중학교의 경우도 일본 학생은 5년이나 한국 학생은 3년에 불과하였다. 또한 한국에는 전문학교도, 대학교도 설립할 수 없게 하여, 1907년 통감부 시절 대학 인가를 받았던 이화학당 내의 대학과(大學科)도 취소하였다.

양기탁, 조만식, 남궁억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벌여 모은 600만원으로 대학설립 인가를 청원했으나 이는 이 법에 따라 거절당했다. 따라서 이 법이 규정한 최종적 목표는 한국 아동들에게는 초등학교 3∼4년의 보통교육으로 그치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1910년에서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전국적으로 보통학교는 249개 교에 불과하였다. 이 법의 목적은 한국에서의 교육은 일본 왕이 발표한 교육칙어(敎育勅語)의 정신에 의하여 한국 백성을 일본의 충성스럽고 충직한 속국민(屬國民)으로 만들어 조선을 영구 식민지로 만들려 함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