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
stats
에디션 선택 통합홈 English 로스앤젤레스 뉴욕 워싱턴DC 애틀랜타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한국기독일보
SEA.chdaily.com
2018.09.23 (일)
X
뉴스 기독교 경제 Tech 라이프 오피니언 크리스천 잡스 포토 비디오

시온주의와 유대인 박해

기독일보

입력 Jul 01, 2018 02:45 PM PDT

Print 글자 크기 + -

Share on Facebook Share on Twitter

‘Peopled Land’ 관점에서 본 이스라엘의 신앙과 역사(7)

* 본지는 권혁승 교수(서울신대 구약학)의 논문 <'Peopled Land' 관점에서 본 이스라엘의 신앙과 역사>를 매주 1회 연재합니다.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C. 시온주의와 이스라엘 독립

Like Us on Facebook

1. 시온주의란 무엇인가?

시온주의란 유대인들이 옛 고토 팔레스타인에 자신들만의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정치적 회복운동을 지칭한다. 시온주의가 추구하는 목표는 단 한 가지이다. 곧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고토 이스라엘 땅(에레츠 이스라엘)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주권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시온주의는 유대인 국가건설의 방편으로 정치적-외교적 노력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시온주의'로 지칭되기도 한다.

시온주의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나탄 비른바움(Nathan Birnbaum; 1864-1937)에 의해서였다. 비엔나 출신인 그는 1884년 그의 두 친구와 함께 서구세계에서는 처음으로 '카디마'라는 국가적 회복주의 성격의 유대인 학생단체를 결성하였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정착과 그곳에서의 번영을 촉구하는 내용의 잡지를 발행하였다. 1890년 그는 잡지에 실린 글을 통해 '시온주의'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시온주의를 '에레츠 이스라엘을 향한 과도기에 설치한 민족적-정치적 시온주의자 정당'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런 정치적 시온주의 개념은 그 후 헤르츨의 『유대인 국가(Der Judenstaat)』(1896)에서 재천명되면서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세계역사가 뒤바뀌는 일은 종종 예기치 않은 주변 사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 독립으로 이어진 현대 정치적 시온주의 역시 그런 범주에 속한다. 시온주의 태동은 19세기 말에 있었던 두 가지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하나는 1881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유대인 박해(포그럼)이고, 다른 하나는 1894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드래퓌스 재판이었다. 전자는 전체 유대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면, 후자는 한 개인 테오도르 헤르츨에게 결정적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이 둘은 유대인 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역사까지 그 흐름을 뒤바꾸어놓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2. 시온주의의 역사적 배경으로서 러시아 포그럼(유대인 박해)

유대인 박해가 일어났던 1881년 러시아에는 전 세계 유대인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약 500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시온으로의 귀환을 기대하면서 정치적 해방이 가까웠다고 믿었던 전통적 신앙의 소유자들이었다. 당시 러시아 황제였던 알렉산더 2세는 진보적 성향의 황제로서 반유대주의를 지지하던 이전의 황제들과는 달랐다. 알렉산더 2세가 추진한 개혁정책으로 러시아는 곧 프랑스나 영국과 같이 입헌군주제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것은 러시아 유대인들에게 온전한 시민권이 보장되는 새로운 시대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81년 알렉산더 2세가 암살당하면서 사태는 급반전되었다. 곧 유대인 박해가 러시아 전역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새 황제 알렉산더 3세에 의해 공인된 것이었기에 이전의 반유대주의와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이전의 반유대주의가 가난한 농부나 저소득층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번의 반유대주의는 상류층과 지도자층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다. 1882년에는 유대인들의 거주 지역이 제한되는 반유대주의 성격의 법률까지 제정되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반유대주의 박해는 러시아 유대인들에게 세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첫째는 미국과 같이 자유가 보장되는 국가로 이민을 가는 것이다. 둘째는 러시아에 남아 있으면서 황제반대운동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들 중 많은 유대인들은 후에 공산주의로 발전된 사회주의 정당에 가입하여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세 번째는 오랫동안 염원하던 시온으로의 귀환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세 번째 길을 선택한 사람들 가운데 젊은 유대인들은 '시온을 사랑하는 자들'(호베베이 치온)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러시아 안에서 일어난 극심한 반유대주의 분위기 때문에 러시아 국내에서 회의를 개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호베베이 치온'은 1882년 오스만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들이 내세운 목표는 1882년 회의에서 채택한 선언문 속에 잘 드러나 있다. 그 선언문은 1882년이 될 때까지 그들이 한 일이 무엇인가를 자문하면서 유럽사회에 동화하려는 그동안의 노력이 허황된 꿈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땅에 자신들의 거처를 마련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본래 주셨던 것이므로 외교적 노력을 통하여 되찾아야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1882년에 채택된 '호베베이 치온' 선언문은 15년 뒤에 등장하게 될 현대 정치적 시온주의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스스로 옛 고국 땅에 거처를 마련해야 함을 촉구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였다. 1800년 동안 유대인들은 시온으로의 귀환을 간절히 염원하며 기다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수동적 자세로 기다리는 것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회당과 가정에서 기도하는 것에만 제한되었던 시온으로의 귀환이 시온주의라는 정치적 활동을 통해 외부세계로 그 영역이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유대인 박해로 인한 변화는 제1차 알리야로 결실되었다. 1882년에서 시작하여 1903년까지 이어진 1차 알리야로 25,000명에서 35,000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다. 제1차 알리야 이전에도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종교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작은 규모의 이주였다. 1882년부터 시작된 알리야는 독립을 이루기까지 다섯 차례나 계속 이어졌다. 그 결과 19세기 말 4만 명에 불과하였던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독립 때까지 65만 명으로 증가되었다.  

3. 테오도르 헤르츨(1860-1904)과 드래퓌스 재판

러시아에서 유대인 박해가 있은 지 13년이 지난 1894년 파리에서는 드래퓌스 재판이 있었다. 이 재판은 비엔나 신문의 파리특파원이었던 테오도르 헤르츨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그것은 그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이스라엘독립의 근거가 되는 현대 정치적 시온주의의 주도적 인물로 부상할 수 있었다.

헤르츨은 186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78년 가족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이주한 그는 비엔나대학에 진학하여 1884년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일 년 동안 법원에서 일했던 헤르츨은 자신이 선호하였던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직장을 떠나 글쓰기에 전념하였다. 이때 그가 쓴 희곡은 실제로 무대에서 공연되기도 하였다.

1891년 헤르츨은 비엔나의 유력한 신문인 '신자유신문'(Neue Freie Presse)의 파리 특파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특파원 활동을 하는 동안 프랑스 내에서 점차 고조되는 반유대주의를 피부로 느끼면서 유대인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한때 그는 젊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 유대인문제를 영구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는 유대인 문제를 서구사회로의 동화에서 찾으려고 애쓴 진보주의자였다.  

헤르츨은 파리 특파원으로 활동하던 중 1894년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사건을 취재하게 되었다. 당시 유대인으로 프랑스 육군 포병 대위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1894년 독일에 군사비밀문서를 넘겨준 반역죄로 몰려 아무런 증거도 없이 혐의만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드레퓌스는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사회에 퍼진 반유대주의와 그에 따른 유대인 편견에 때문에 간첩으로 몰렸던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에밀 졸라 등 프랑스의 지성인들이 재판의 부당함을 고발하면서 전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헤르츨은 무죄를 항변하는 드레퓌스를 향하여 "유대인 죽여라'고 외치는 파리 시민들의 함성에 큰 충격을 받았다. 더구나 파리는 프랑스혁명의 중심지로서 혁명의 3대 모토인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의 심장부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그곳은 유럽에서 계몽주의가 가장 잘 발달된 곳이었다. 이 사건으로 헤르츨은 두 가지 결론에 도달하였다. 하나는, 서구사회가 유대인을 그들 사회로 받아들이는 유대인 해방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유대인들은 결코 동등한 시민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며 즐길 수 있는 유대인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는 그런 유대인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협력할 수 있는 정치적 세력이나 지성인들이 많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방법은 무력으로 땅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외교적 노력을 통해 국제사회로부터 합법적 승인을 받는 것이다.  

1896년 그는 자신이 구상한 유대인 국가 건설 방안을 『유대인 국가』(Der Judenstaat)라는 소책자로 출간하였다. 헤르츨은 이 책에서 이상적인 유대국가 건설의 비전과 그에 대한 실질적인 구상을 제시하였다. 그의 책이 출간되자 유대인 사회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었다. 계몽주의적 성향을 지닌 엘리트층은 이론과 실제에서 현실성이 결여된다는 점을 들어 헤르츨의 제안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반면 평범한 유대인 대중들은 그의 계획을 열열이 지지했다. 심지어 그를 새로운 시대의 모세라고까지 극찬하였다. 그런 점에서 헤르츨의 『유대인 국가』는 1948년 이스라엘에게 독립을 가져온 정치적 시온주의의 출발점이었다.

헤르츨 주도로 시작된 정치적 시온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고토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첫 과제는 지구 한 모퉁이에 우리의 상당한 요구를 충족시킬 만한 영토를 차지하여 국제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는 도덕적이고 합법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운동일 뿐 아니라, 우리 국민이 오랫동안 열망해 오던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렇게 헤르츨은 유대인 국가 건설이라는 시온주의의 목표 달성은 외교적 노력을 통해 국제사회로부터 합법적인 승인을 얻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4. 제1회 바젤 시온주의자회의(1897년)

1897년 8월 29일 스위스 바젤에서는 3일간 일정으로 제1회 시온주의자회의가 개최되었다. 헤르츨이 본래 생각했던 시온주의는 대중적인 운동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세 가지 방안을 구상하였다. 첫째는 소설을 써서 유대인 국가건설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런 의도에서 저술된 책이 'Altneuland'(Old New Land)였다, 그러나 그 책은 1902년이 되어서야 출간이 되었다. 둘째 방안은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이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유대인 재력가들의 도움을 받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현실적이질 못했다. 시온주의 구상 자체가 그들에게는 기존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는 독일 황제나 오스만의 술탄과 같은 세계 정치지도자들에게 접근하여 유대인 국가건설이 그들에게도 유익하다는 점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것 역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헤르츨에게 돌아온 것은 그들의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자신이 구상했던 세 가지 모두 별 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헤르츨은 대중들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헤르츨보다 10여 년 앞서 '호베베이 치온'에 의해 유대인들의 이주와 정착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운동은 열정을 앞세운 이념운동이었지 정치적으로 조직화하는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헤르츨의 정치적 시온주의가 대중운동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 결실로서 제1회 바젤 시온주의자회의가 개최되었다.

1회 시온주의자회의에는 16개국에서 208명의 대표자들과 언론사 특파원 26명이 참가하였다. 회의 참가자 중 절반 이상은 동부유럽 유대인들이었고, 이들 중 절반 정도가 러시아에서 온 대표자들이었다. 헤르츨은 10명의 기독교인들도 옵서버 자격으로 초청하였다. 회의는 헤르츨에 의해 개최되었고 회무 역시 그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1회 시온주의자회의에서는 세계시온주의기구(World Zionist Organization)가 정식으로 결성되었고, 헤르츨이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바젤에서 개최된 제1회 시온주의회의를 마친 후 헤르츨은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그의 소감을 기록하였다. "바젤에서 나는 유대인 국가를 설립하였다. 오늘 내가 이것을 큰 소리로 외치면, 나는 세계적인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5년 이내 아니면 확실히 50년 안에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1회 시온주의자회의의 중요한 결실 중 하나는 향후 시온주의가 나아갈 방향으로 헤르츨이 제안한 '바젤프로그램'이 채택된 것이다. '바젤프로그램'은 시온주의의 목표가 팔레스타인에 공적으로 보장된 유대인국가 건립에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목적달성을 위해 중점적으로 추진할 네 가지 사항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1) 유대인 농업 및 산업 노동자들에 의한 적절한 수준의 팔레스타인 식민지건설 추진 
(2) 각 나라의 법과 일치하는 지역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적합한 기구들 조직을 통한 전체 유대인들의 결합
(3) 유대인들의 국가적 감정과 의식의 강화와 촉진
(4) 시온주의 목표 달성에 필요한 국가들의 동의를 얻기 위한 예비적 단계들

바젤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듯이, 헤르츨은 시온주의운동의 목표달성을 위하여 국제적으로 유대인국가건설을 승인받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오스만 터키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초기 노력은 터키의 술탄에 집중하였다. 1898년 그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터키의 술탄을 이스탄불과 팔레스타인에서 만났다. 그러나 그들과의 만남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에 실망한 헤르츨은 영국과의 협상에 주력하였다. 그는 유대인을 사이프러스 섬이나 시나이반도에 위치한 엘아리쉬 지역, 그리고 후에는 우간다에 정착시키는 문제를 놓고 영국과 협상을 벌리기도 하였다. 헤르츨은 1903년에 개최된 제6차 시온주의총회에서 영국이 제안한 '우간다 안'을 의제로 내놓았다. 이 안은 당시 영국령이었던 우간다에 유대인들을 정식 유대인국가가 건설되기까지 잠정적으로 이주시키자는 제안이었다. 이 안을 놓고 시온주의자들 사이에서 큰 의견충돌이 일어났다. 헤르츨을 크게 실망시킨 것은 자신의 제안을 찬성할 것으로 기대했던 러시아 유대인들이 오히려 반대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 일로 인해 헤르츨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건강악화로 이어졌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는 쉴 사이 없이 세계의 여러 지도자들을 만나 시온주의의 목표를 위한 외교적 노력에 전력하였다. 그는 자신의 의견에 찬동하는 이태리 왕을 만났는가하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교황까지도 만났다. 그러는 사이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결국 7차 시온주의총회를 앞둔 1904년 7월 3일 비엔나에서 44세의 젊은 나이로 짦은 생을 마쳤다. 그의 마지막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 1949년 8월 독립을 이룬 이스라엘로 옮겨져 예루살렘에 위치한 헤르츨 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계속)

© 2016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의견 나누기

Real Time Analytics
Web Analy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