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과 행복: 대중문화, 현실보다 아름다운 현실

2016년 개봉한 <라라랜드(La La Land)>는 작년(2017년) 1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개 부문을 수상한 작품이다.

한국을 터전삼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여러 면에서 낯선 점이 많지만, 미국인들에게는 1940년대 헐리우드 전성기의 추억을 되살리는, 복고적이면서도 신선한 감각의 뮤지컬 영화다.

명작의 생명력이 대개 그 스테디한 인기에 있다면, <라라랜드>는 명작 반열에 들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개봉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VOD등 2차 시장에서 꾸준한 강세를 보이는 있는데, 개봉 당시 영화가 준 감동을 잊지 못하는 관객들이 도처에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라라랜드>가 발출하는 매력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기독교적, 신학적, 그리고 종교철학적 대중문화 비평을 수행하는 입장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현실과 공상의 적절한 융합 및 대비를 통해 삶을 미화하는 기법이다.

그 기법은 일면 유치하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처음 이 작품을 관람할 때 '발리우드(Bollywood)' 맛살라(masala) 영화를 떠올렸다. 발리우드란 인도 봄베이(Bombay)와 헐리우드(Hollywood)의 합성어로, 인도의 주류 영화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 발리우드 영화는 맛살라 영화와 맛살라 영화가 아닌 영화로 나뉜다는 말이 있다. 인도의 통속적 영화들 대부분은 맛살라 영화다. 맛살라 영화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신파조의 스토리, 둘째 극단적으로 과장된 연기와 액션, 셋째 영화의 스토리와 거의 무관하게 시도때도 없이 등장하는 음악과 군무(群舞), 그리고 넷째는 이 모든 요소들을 담아낼 수 있는 충분한 러닝타임(기본 3시간 이상)이다.

마살라 영화는 고된 삶의 현실에 지친 인도인들이 비교적 싼 값에 오랜 시간 유흥을 즐길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실제로 인도의 영화관에서는 음악과 군무 장면에서 관객들이 함께 일어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진기한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춤과 노래가 주는 삶의 위안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것이다.

라라랜드의 유명한 오프닝 장면은 LA 근교의 한 정체된 고속도로 상에서 펼쳐지는 공상(phantasm)이다. 수십 명의 운전자들이 차에서 내려 뮤지컬을 연출하는 이 장면에서, 사실 노래와 춤이 선사하는 흥을 느끼기 전에 먼저 실소가 나올 뻔했다.

해가 내려쬐는 더위 속 교통체증이라는 갑갑한 상황과 비교했을 때, 과하게 환상적이고 유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유치함을 어색함이 아닌 아름다움으로 포장해 내는 샤젤(Damien Chazelle) 감독의 기법이 대단히 치밀하고 전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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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라랜드>의 오프닝 장면, 교통체증 속 고속도로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운전자들. 인도 발리우드의 맛살라 영화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이 오프닝 장면은 영화의 전체적 성격을 예고한다. 작중 지루하고 암울하고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이 부각될 때마다, 그래서 그 현실에 삶이 묻혀갈 즈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스윙, 블루스, 재즈, 그리고 여기에 곁들어진 스윙댄스와 탭댄스는 이 영화의 두 주인공에게 용기와 위안을 선사하고, 이런 용기와 위안은 두 주인공에게 감정이입된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대중문화 속 자기: "할 수 있음"으로서 삶의 가능성

영화의 서사는 특별할 것이 없다. LA의 헐리우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공한 뮤지션과 성공한 배우의 이야기다. 실력은 출중하나 복고적 재즈만을 고수해 아무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뮤지션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부족한 연기력 때문에 오디션에 번번히 떨어져 6년째 커피숍 직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배우 지망생 미아(엠마 스톤)의 사랑 이야기가 중추를 이룬다.

영화의 오프닝 장면에 포함된 운전자로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은 서사가 진행되면서 다시 우연스럽게 재회하고, 친해지고,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성공한다.

별볼 일 없는 무명시절을 겪는 이들에게는 서로가 곧 희망이고,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할 때는 암울한 현실이 춤과 노래로 인해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변한다. 별빛이 내리는 배경, 뜬금없는 조명과 클로즈업, 감미로운 노래와 스윙/탭댄스가 어우러지는 영화의 공상 장면들은 하나하나가 제대로 만들어진 뮤직비디오나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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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랜드>의 공상 장면.

영화 속에서 이런 공상 장면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바로 각 개인의 삶의 가능성을 한껏 향유하라는 긍정적 사고, 즉 '아메리칸 드림'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반복해서 가르친다. "너는 할 수 있어"라고.

아무리 거절당해도, 비웃음을 받아도 굴하지 말고 꿈을 이루며 살 것을 역설한다.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는 노래와 춤으로 미화된 공상의 장면이 현실이 된다는 것을 영화는 세뇌하다시피 강조한다.

우리 눈에 보기 좋고, 귀에 듣기 좋고, 마음에 담기 좋은 메시지가 한껏 담긴 이 영화에 미국 영화인들이 찬사를 보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는 그들이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삶의 모습이고, 그들 가운데 일부 성공한 이들이 겪어 온 삶의 궤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헐리우드를 몸소 겪으며 살아가는 이들의 아름다운 성공시대, 자서전적 이야기가 바로 <라라랜드>다.

물론 큰 성취에는 큰 희생이 따른다. 세바스찬과 미아, 둘 모두 성공한 아티스트이자 배우가 되면서 함께할 시간은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점차 멀어진다. 결국 무명 시절의 사랑의 추억은 뒤로 한 채 각자의 성공을 뒤쫓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영화 마지막 장면의 공상은 하나의 반전 역할을 한다. 서로 성공이라는 꿈을 추구해 왔고, 그들의 공상 역시 그를 기반으로 아름답게 포장해 왔는데, 실상 그 공상을 이루고 보니 이전 두 사람이 함께했던 현실이 실은 최고의 행복이었을지 모른다는 자각이 세바스찬과 미아의 마지막 공상 장면에 담겨 있다.

이처럼 마지막 반전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조차 결국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결국 영화 전체에서 공상은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행복해질 수 있어"라는 희망과 위안을 선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래서 과하게 유치한 면이 있지만 또 거부할 수 없는 위로와 아름다움이 수반되고 있는 것이다.

◈현실 속 자기: "내어맡김"으로서 삶의 가능성

이렇게 놓고 본다면 참으로 흠잡을 데가 없는 영화 같고, 실제로 상당수 평론가들이 이런 식으로 이 영화를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이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와 그 기법이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도 무리없이 수용할만 한가? 이렇게 반문했을 때 쉽게 긍정하기 어려운 이유가 두 가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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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랜드>의 메시지는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기꺼이 수용할 만한 것인가?

첫째는 영화가 물리적 현실이 아닌 공상을 다룬다는 점이다.

물론 신앙에도 공상 속에 보이는 예견적 측면이 존재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는 말씀이 이를 증거한다.

그런데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임은, 우리가 흔히 현실의 난관을 회피하기 위해 일삼는 공상 속 이미지와 그 성격이 완전하게 다르다. 공상이 현실을 기반으로 한 감각적 이미지(φαντασία, phantasia)의 조작, 즉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존재적 근거 없는 허상(φάντασμα, phantasma)'이라면, 성경의 가르침에 입각한 구원과 천국에의 바람은 물질적 현실보다 월등히 현실적인 초월적 실재다.

공상이 지배하는 삶에게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도저히 근접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고대교회 교부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그랬다.

<라라랜드>는 공상을 조장한다. 긍정적이기만 하다면, 아름답기만 하다면, 마음에 위로가 되기만 한다면, 그런 공상은 얼마든지 향유하라는 것이 이 영화 전체를 통해 강변되고 있는 메시지다.

애초 영화의 제목 자체가 그렇다. 'la-la land'에 대한 첫 번째 사전적 정의는 'LA, 특히 헐리우드에 살고 있는 인간 군상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삶의 태도'다. 그리고 이 첫 번째 정의로부터 파생된 두 번째 사전적 정의는 '공상에 빠진 상태 혹은 공상 세계'다.

원래 이 말은 현실감각 없이 허황된 꿈을 꾸는 LA의 배우 지망생들의 삶의 행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상당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었으나, 영화 개봉 후 긍정적 의미로 변해 버렸다.

신앙의 입장에서 이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에 쉽게 수긍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세바스찬과 미아가 추종하는 꿈의 진정한 목적이다. 그들의 꿈은 지극히 개인적 행복에 집중되어 있다. 아티스트, 그리고 배우라는 진로와 직업은 그 개인적 행복을 이루려는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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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지막, 개인의 참된 행복을 꿈꾸는 장면 속 세바스찬과 미아.

기독교인에게도 개인의 행복은 중요하다. 기독교적 삶이 개인의 행복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 고행은 기독교의 기본 정신에 포함되지 않는다. 신앙의 삶을 추종하다 보면, 특정 순간 그 삶에 수반되는 개인적 행복과 삶의 충족감을 향유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인의 기본적 삶의 목적은 아니다. 그것은 신앙의 삶을 살아내는 데 일종의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할 뿐이다. 한 기독교인의 삶이 궁극적으로 그의 영혼이 향유해야 할 행복은, 물질적 세계에 얽매인 개인적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 유명한 두 신학적 개념, '프루이(frui)'와 '우티(uti)'에 의해 제시되는 가르침이다. '프루이'와 '우티'는 둘 다 '행복의 향유'를 뜻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행복의 상태는 서로 다른 내용을 갖고 있다.

'프루이'는 그 자체가 궁극적 목적이 돼야 할 것을 사랑하고 추종하는 데서 획득되는 행복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체다. 반면 '우티'는 그 자체로 궁극적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나, 궁극적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일, 즉 '프루이'에 봉사하기 위해 향유되는 행복과 기쁨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데서 얻는 모든 개인적 행복이나 기쁨, 즉 '우티'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함과 기뻐함, 즉 '프루이'의 도구로, 부분으로, 방편으로 활용될 때만 수용할 만한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이었다. 개신교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은 이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개신교회의 주된 신앙의 정신으로 삼았다.

<라라랜드>는 '우티' 그 자체를 추구하도록 권장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행복을 향유해야 하는 도구를 우상화하는 데 일조한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가 연출하는 공상은 아름답고 즐겁지만 어딘가 근본적인 공허함 역시 내비치고 있다.

이는 참되고 영원한 실재이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배제되어 있는 현실에서, 행복을 찾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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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꿈과 행복은 있지만, 정작 궁극적인 행복은 배제된, 그래서 공허해 보이는 영화 <라라랜드>.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