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상화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가 지난 5월 4일 서울 양재 온누리교회에서 '젠더리즘,네오마르크시즘, 트랜스 페미니즘과 기독교'라는 주제로 열렸던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 영성포럼에서 '트랜스페미니즘과 동성애'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매주 1회 연재했습니다.

 

▲한상화 교수
(Photo : ) ▲한상화 교수

켈러의 여성신학에 대한 개혁-복음주의 신학적 비판

 

저의 이 페이퍼는 이후로 조금 더 켈러의 관계적 성육신론(intercanation) 사상을 설명하고 그녀의 이러한 사상 기초 개념들이 지향하는 정치, 사회, 윤리적 의미들을 논한 후에 개혁-복음주의 신학적 입장에서 응답하려 합니다만 여기에서 간략히 몇 가지 비판점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먼저 개혁-복음주의 신학적 입장이라 할 때, 저의 『포스트모던 사상과 기독교 복음주의 신학』에서 밝힌 바와 같이, 복음적 신앙주의, 성경적 토대주의, 복음적 진리주장들에 대한 윤리적 정당화라는 신학의 세 가지 기초 원리를 전제한다는 점이 근본적으로 켈러 신학의 출발점들과 상이합니다. 개혁-복음주의 신학은 학문의 주요 기능인 이성을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복종시키는 복음 신앙 위에서, 모든 사고의 궁극적 판단 기준을 성경에 두고, 신학의 진리 주장들의 정당화는 지성적 영역을 넘어서 윤리적 영역에서 증명되어야 한다는 전제로 연구 하는 신학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켈러의 트랜스페미니즘 신학은 그 근본 전제에 있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을 거부하고 그러한 기준을 세우는 것 자체를 폭력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진리 주장의 옳고 그름과 윤리적 규범의 선과 악의 기준이 상황에 따라 상대화 되고 다원적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실제로 그녀가 지향하는 다양한 정통(polydoxy)의 개념은  그 어떤 진리주장도 상황에 따라 가능한 극단적 상대주의로서 궁극적으로 폭력에 대해 무력한 사상인 것입니다. 인간 삶의 목적과 역사의 방향에 대해 분명한 답을 주는 것 자체를 거부할 뿐 아니라 무엇 때문에 여성 해방이 중요하고 왜 폭력이 나쁜 것인지 왜 인간은 존중되어야 하고 왜 동성애는 안 되는 것인지 등에 대한 기준과 답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애초에 개개인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고 모든 것이 상호관계성 속에 존재의 되어감의 과정 속에 있다는 철학은 반본질주의적, 반토대주의적이기 때문에 목적성이나 지향점도 없고 불확실성과 애매성 가운데 만족하기를 배우라는 의미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균형적인 이해로부터 나오는 필연적 결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범재신론을,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고 부정신학적 신비주의를, 신비로운 물질화만을 강조하는 신유물론의 결과로 인간 영혼의 문제는 무시되고 몸의 상호연결성을 강조함으로써 다애성(polyamory)의 가치를 긍정하여 대중적 레벨로 확산될 때 성적 문란을 조장할 윤리적 위험성이 농후합니다.

공공의 선과 도덕성을 위해서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러한 신앙을 토대로 세워지는 하나님 형상으로서 남자와 여자로서의 사람의 존엄하고도 무한한 가치,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폭력과 악 그리고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답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명확하고도 분명하게 선포되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본질상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 즉 율법의 대 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이 그 국민의 특성이 되어야 하며, 부부의 올바른 관계는 창조주의 본래 뜻인 남녀의 한 몸 원리로 세워지되 상호복종의 원리 하에 세워져야 한다고 봅니다. 여자나 남자나 인간성의 회복과 참 자유 즉 모든 부조리와 악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이기 때문입니다.

동성애 이슈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에 대한 제언

사실 제가 가장 드리고 싶은 말씀은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바대로 현재 기독교계가 드러내고 있는 특정한 정치색이 본래 기독교 세계관과 하나님 나라 비전이 가지고 있는 대 사회적 개혁과 정화를 향한 선도의 길을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보수신학은 정치적 보수진영의 논리로 진보신학은 진보진영의 논리로 연결되어 본래 기독교 사상이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의 통전적 방향성이 제시되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 문제입니다. 이는 정확히 기독교회가 그 소금의 맛(그리스도인의 거룩성 즉 그리스도 품성)을 잃고 세상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고 있는 상황이라는 의미입니다. 한국교회는 보수 진보 모두 함께 우리 사회의 모든 악에 대해 우리의 책임이라고 선포하고 성령님의 탄식하심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심히 애통하며 기도하는 수많은 성도들을 한데 모아 자복하고 우리의 죄라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진심으로 고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를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회개의 열매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현재 회개 밖에 한국 사회를 향해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차별금지법(差別禁止法)은 헌법의 평등 이념에 따라, 성별, 장애(신체조건), 병력, 외모, 나이, 출신 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출신지역,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형태 및 가족 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 전력, 보호 처분, 학력,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이다." 이 법안의 내용은 매우 성경적입니다. 차별하는 것은 성경적 윤리에 위배되는 행위임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어떤 종류의 차별을 지지하는 것은 성경적 정신에 위배되는 성경적용으로 그 무엇보다도 위험하고 폭력적인 정치 행위입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 남자와 여자로서의 사람의 기본 권리는 하나님께서 보장하고 계시는 것이기 때문에 (창 9:6) 어느 사회 어떠한 경우에라도 지켜져야 하는 인간 존중 사상의 대 원리입니다 하지만 저러한 차별법이 복잡한 인간 삶의 상황에서 빚어질 수 있는 모든 차별의 상황의 경우의 수를 다 열거하지 못하고 지극히 제한적인 경우의 수로 제한되어 법안으로 제정되어 문자화 될 때에는 오히려 저 법으로 말미암아 저 법의 정신에 저촉되는 가능한 수많은 또 다른 상황들을 일으킬 수 있고 더 큰 혼란의 소지가 된다고 보여 집니다. 현재 UN은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HIV 감염" 등의 차별 금지 사유의 항목을 더 추가하여 패스하라고 각 국가에게 압력을 넣고 있다고 하는데, 현재 지성계에 지배적인 좌파 논리의 영향력에 경도된 방침으로서, 국가 연합적 기관으로서 권력남용의 소지가 보이는 적절치 못한 행동이라고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윤리의 문제와 법제정 문제를 교묘하게 혼합하여 사안의 성격과 본질을 흐리는 혼란 속에서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성소수자들을 이용하여 여론몰이를 함으로써 사회적 양극화를 가중시키는 진보진영의 권력을 향한 논리의 기만성은 해체되어야 합니다. 애초에 인권의 이론적 토대가 보장될 수 없는, 기독교 체계의 모방본(헤겔 철학체계로부터 전도된 마르크스 철학 체계)으로부터 나오는 정치이데올로기에 대응할 때, 기독교 신학 관점에서는 참다운 인권의 기초가 확고히 제시되고,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사람, 남자와 여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분명히 보장되고 있음을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천의 영역에서 확실히 보여주어야(showing)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회의 신행일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 진리를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정치 사회 영역에서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정치인, 법조인, 경제계, 문화계에 속한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적 정신과 이념을 각 영역의 구체적 실천 가운데 적용하여 변화의 세력으로 역할을 할 때 참다운 기독인의 사회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성애에 관하여서는 로마서 1장 26절부터 28절에 이방인에 대한 정죄 가운데 명백하게 죄로 규정되어 있고 그 근원은 진리를 거짓 것과 바꾸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오는 성적 타락의 결과이고 그 죄의 결과의 무서움은 "그들의 그릇됨의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라는 선언에 있지 않습니까? 동성애 행위라는 죄악은 법규에 의해 보장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은 너무나 명명백백한 사실이고 사회의 건전성과 도덕성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 점에 대해 대응할 때 정치 문제, 법 문제 등에 있어서는 법조계와 정치계 그리스도인들과 기독교 지성인들이 합력하여 보다 치밀한 전략과 논리를 가지고 대응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일반 성도와 시민들 앞에서 보수교계 지도자들의 대응 방식이 현재 너무 히스테릭하고 두려움과 혐오 등의 감정이 적나라하게 표출되면서 자기 의에 사로 잡혀서 배제와 정죄하는 모습으로만 비춰지니 이러한 반동적인 반대 집회 식의 반응은 오히려 많은 원리적 공감자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는 어리석은 방식으로 느껴져 매우 안타깝습니다. 예배 중에 동성애 반대 서명서를 돌려서 의식 있는 교인들과 자녀들에게 부담감을 안겨주는 사례도 참으로 적절하지 못한데 현재 한국 보수 교회가 한국 정치가 빚어낸 국민 양극화 현상에 앞장서서 국민 분열을 더욱 부추기는 기득권 보수 정치 세력의 행동대장 역할을 하는 것이 너무나 수치스럽고 하나님 앞에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동성애 이슈 대처 방식을 좀 더 사려 깊고 좀 더 지각 있는 방식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퀴어 축제 하는 가운데 옆에 서서 외치는 방식이나 태극기 집회처럼 반대 집회로 일관하게 된다면 동성애에 대하여 원래 거부감을 가지던 사람도 오히려 자유와 인권을 향해 등지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동성애자들의 인간성 훼손의 상태를 아파하고 그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고 복음으로 변화를 유도하는 겸허한 자세와 선교적 접근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하게 이루기 위한 남녀의 연합인 결혼의 소중함, 천국을 이 땅에 이루어 나가야할 최소 공동체로서의 가정의 회복, 더 나아가 나날이 그 시급성이 더 급해지는 생태계 파괴로 인한 전 지구적 환경 문제 등 본래 기독교 세계관과 하나님 나라 도래를 위한 비전에서 오는 본질적 회복의 그림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 이념은 민주주의가 아니고 신본주의입니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고 그래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추어 볼 때 민주화의 발전이 눈부시게 이어진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아시아 교회 지도자들의 부러움을 사는 부분입니다. 민주적 시민 의식을 많이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신본주의적 기독교 이념을 제시할 때, 봉건적 가부장적 유교적 틀의 문화 속에서 남성 중심적으로 특정하게 조건화되고 정형화된 사고틀 속에서 이해한 버전을 가지고 제시하게 되면 모든 문화적인 것을 초월하는 기독교의 본질인 복음을 통한 구원 즉 하나님 중심주의를 오히려 막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것이 정확히 상황화 이슈입니다. 다른 아시아 국가 속에서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자주 실패를 보는 영역이 바로 그 곳의 상황에 맞게 변화하여 복음을 제시하기를 거부하고, 강한 칼빈주의 신학이 성경의 신학이라고 그대로 가져다 심으려 하고 장로교 교단을 그대로 옮겨 심으려 하며 그곳에서 소명 받고 사역하는 현지 사역자들은 전도사라고 부르며 목사로서 군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적 선교의 비 상황화의 폐해가 선교적 열의 또한 막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의 문화적 조건성에 대한 보다 깊은 해석학적 성찰과 그 너머 인류의 유일한 소망인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 비전을 가장 중시하는 목적에 대한 재확인과 "동성애 반대" 라는 구호를 외치기 전에 대한민국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성에 대한 깊은 고민 속에서 나오는 보다 큰 틀 속에서 동성애 반대 이슈도 일부로 제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성안수문제가 교회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었던 것처럼 동성애 이슈가 또 다시 그렇게 작용한다면 정말이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 될 것이며, 교회 밖 사람들이 아닌 오히려 교회 분열을 조장하는 교계 지도자들이 주님의 몸인 교회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교회는 연합하여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해 외치는 주님의 음성은 "애통하고 회개하라"입니다. 남북이 하나 되는 통일한국을 향해 기독교 교회는 각성하여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며 우리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적 비전과 열정을 다시금 회복하여 주님 오실 마지막 때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