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1907년 미국에서 돌아온 도산 안창호가 신민회(新民會)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이 조직의 목적은, 1.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할 것, 2.동지를 발견하고 단합하여 국민운동과 역량을 축적할 것, 3.교육기관을 각지에 설치하여 청소년의 교육을 진흥할 것, 4.각종 상업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부력을 증진할 것 등이었다.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승훈(李昇薰), 안태국(安泰國), 양기탁(梁起鐸) 등 기독교계 인사들이 주축되어 이런 사업을 추진하였고, 그 후 신채호(申采浩) 등이 가세하였다. 신민회는 1910년 회원이 수백이 넘는 튼튼한 단체로 성장했다.

신민회의 취지에 따라 한국인들에 의한 학교들이 강력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고 설립되었다. 평양에는 안창호(安昌浩)가 대성(大成)학교를 건립하였고, 평북 정주에는 남강 이승훈(李昇薰)이 오산(五山)학교를 세워 철저한 항일정신을 바탕으로 민족교육의 본거지를 삼았다.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학교 중에서도 평양의 숭실학교 그리고 평북 선천 신성(信聖)학교는 민족정신이 강해 배일사상도 강했다. 그러므로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일제가 평안도 지방의 기독교 세력을 쳐부술 계책을 세울 가능성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일제는 105인 사건을 ‘사내(데라우치) 총독모살 미수사건’(寺內總督謀殺未遂事件)으로 규정했고, 총독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꾸몄다고 왜곡하였다. 또한 이 사건은 선교사 몇 사람이 조종했는데, 그들은 스왈른(W. L. Swallen), 맥큔(G. S. McCune), 그리고 베어드(W. M. Baird) 등이었다고 억지 주장하였다.

그들이 꾸민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사내 총독이 1910년 12월 27일 압록강 철교 낙성식에 참석하기 위해 선천 역에 잠시 하차하는 순간에 그를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안태국, 이승훈의 주도로 평안도 내의 유력자 60명과 선우혁이 인솔한 20여 명, 그리고 황해도에서 온 20여 명이 선천 신성학교 교실 지붕에 숨겨둔 권총 5정을 가지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일 오후 1시 총독을 태운 기차가 선천역에 잠시 정차하고 있는 동안 하차한 총독을 환영객 속에 섞여 있던 살해범들이 그를 저격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기차가 그만 선천 역에 서지 않고 지나쳐 버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다음 날 총독이 귀경하는 길에 선천 역에서 잠시 하차하여 선교사 맥큔(G. S. McCune)과 악수를 하는 순간 그를 격살하기로 작정하였으나, 경비가 너무 삼엄하여 저격 순간을 찾지 못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각본이었다.

이 각본에 따라 이듬해 정월부터 평안도 지방과 전국에서는 검거 선풍이 휘몰아쳤다. 이 때 구속된 사람의 숫자는 일제 측 검사 논고에 따르면 이승훈, 양전백, 윤치호, 안태국, 옥관빈, 강규찬, 정익로 등 목사 6명, 장로 50명, 집사 80명을 포함하여 서북 지방 교회 지도자 500여 명이었다.

일제가 만든 각본에 따라 조작된 연극이었으므로 이들이 범죄를 획책했다는 증거가 있을 리 만무하였다. 따라서 일경은 오직 고문을 통해 체포자들의 자백을 받아 내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심문과정에서 4인이 심한 고문으로 생명을 잃었고 3명이 정신질환자가 되었는데, 사망자 중에 감리교 목사요 애국투사였던 전덕기(全德基) 목사가 있었다. 당시 선천 신성학교 학생으로 가장 나이가 어렸던 선우훈(鮮于燻)은 자기가 직접 당했던 고문을 그의 「민족의 고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증언하였다.

“저들은 두 손가락 사이에 쇳대를 끼우고 손끝을 단단히 졸라맨 후 문턱 위에 높이 달아매고 때때로 줄을 잡아 당겼다. 온 몸이 저리고 쏘고 사지가 끊어져 오고 땀은 줄줄 흐르고 숨결은 가빠지고 견딜 수 없어서 몸을 잡아 이리 틀고 저리 틀었다. … 가슴에는 불이 붙고 코에서는 불길이 확확 올라왔다. 독사 같은 형리들이 또다시 줄을 잡아 당기니 손과 팔이 다 떨어지는 것 같고 달리운 몸은 무거우니 쇳대에 잘킨 손가락은 뼈가 드러났고 피는 흘러서 온몸을 적시었다. 눈보라치는 혹한 삭풍에 몸은 얼기 시작하여 동태같이 되었다.… 부젓갈을 달궈서 다리를 지졌다.… 담뱃불로 얼굴을 지졌다. 혀를 빼고 목구멍에 담배연기를 불어넣었다.… 발끝이 땅에 달락 말락하게 늦추어 놓고 수백 개의 매를 연이어 친다.… 발길로 이리 차 굴리고 저리 차 굴린다. 머리털을 잡아 이리 저리 질질 끌고 다니다가 머리가 부서지라고 돌바닥 위에 함부로 부딪쳤다.… 최후의 수단으로 코에다 물을 붓는 것이다.”

이런 고문으로 얻어진 자백만으로 기소되어 경성지방 법원에서 공판이 열렸는데, 피고들의 주장으로 이 사건이 일제의 자작극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선천에 있었다는 유동열은 12월 26일 치안유지법에 걸려 서대문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만기 석방되어 있었다. 또한 선천에 있었다는 다른 피고인들, 양기탁, 이승훈, 안태국 등 7인은 유동열의 석방을 위로하기 위해 명월관에서 회식을 하고 있었으며, 안태국 이름으로 받은 당일 영수증이 나왔다. 또한 이튿날 이승훈이 평양으로 내려간다는 사실을 알린 전보가 제출되었고, 거사 전날 음모자들이 정주에 모여 60여 명이 선천까지 왔다는 검사의 논고에 대해, 법원 서기가 정주 역에 확인해 본 결과, 그 날 정주 행 차표는 다섯 매밖에 팔리지 않았고, 그 날 온종일 팔린 기차표는 모두 11매에 지나지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런 확실한 알리바이나 증거를 무시하고 재판을 강행하였다. 엉터리 재판부는 결심(結審)을 하고 1912년 10월에 선고를 하였는데,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등 주모 급 6명은 10년, 그 외 18명에게는 7년, 39명에게는 6년, 나머지 42인에게는 5년 형을 각각 선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