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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통일에서 교회는 어떤 역할을 했나?

기독일보 김진영 기자

입력 Jun 11, 2018 06:43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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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학술원·온누리교회, 공동 세미나 개최

김영한 박사, 크레첼 박사(맨 앞줄 왼쪽에서 각각 세 번째, 네 번째)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기독교학술원
김영한 박사, 크레첼 박사(맨 앞줄 왼쪽에서 각각 세 번째, 네 번째)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기독교학술원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이 온누리교회(담임 이재훈 목사)와 함께 지난 7일 양재 온누리교회에서 '독일통일에서의 교회 역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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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세미나에서는 동독 출신으로 독일 통일의 산증인이라 불리는 베르너 크레첼 박사가 주제발표를 맡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과 그 이후 통일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를 전했다.

크레첼 박사는 "공산주의자들은 서독의 지원에서 이득을 보았기 때문에 서독의 재정 및 물질적 지원을 허락했다. 이로 인해 동독의 교회들은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며 "동독 교회들이 필요한 자금 중에 약 50%가 서독에서 들어 왔다"고 했다.

그는 "따라서 교회는 유지되고, 목회자들은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 교회는 정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된 3개의 대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서독으로 여행할 수는 없었지만 매년 수천 개의 서독 교회가 자매결연 한 동독 교회와 성도를 방문했다"며 "이 접촉이 통일 이후 서로 완전히 다른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이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동독이 오랫 동안 존재할 수 있었던 원인은 'Stasi'라고 불리는 비밀경찰의 엄청난 압박과 폭력적 힘에 있었다"며 "이 긴장 속에서 교회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지붕 밑으로 특히 1980년대에 야당 세력이 모였다. 이들은 동쪽과 서쪽 사이의 핵 위협 상황에서 평화를 주장했고, 이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요구하는 것과 일치하고 있었다"고 했다.

크레첼 박사는 "(베를린) 장벽붕괴와 독일통일 사이의 짧은 기간 동안 교회에게는 중요한 역할이 주어졌다. 나라의 안정과 비폭력을 유지하는 것"이라며 "독재 정권이 중단되면 세 가지 위험이 있다"고 했다. 그 세 가지 위험은 ①지도자들이 분노에 찬 국민들 손에 넘겨질 수 있다. 교회의 임무는 그러한 가능한 '복수 캠페인'을 막는 것 ②과거의 광적 간부들이 쿠데타를 통해 과거 권력을 회복시키고, 국가의 민주주의 발전을 파괴할 수 있는 것 ③약탈, 경쟁 집단 간의 충돌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혼란이 그것이다.

크레첼 박사에 따르면, 이러한 위험들은 그러나 교회가 중심이 된 '원탁회의'를 통해 피할 수 있었다. 그는 "국가의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모든 교회들이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원탁회의는 복음주의, 가톨릭과 감리교회 목회자들이 주관했다"고 했다.

특히 통일 직후 동독과 서독의 발전양상에 격차가 있는 상황에서 교회가 '나눔'을 실천했다고 그는 강조했다. 크레첼 박사는 "독일 재정 예산에서 동독으로 거대한 재원이 흘러 들어갔다. 따라서 동독의 완전히 낡은 사회간접 자본들이 최신 상태로 보수될 수 있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치들은 동독과 서독 간의 불균형을 해소시키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역할은 동독 사람들의 어려운 상태를 위로하고, 명예직을 수여하거나 영적 공급을 통해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찾도록 하는 것"이라며 "그리고 전 독일 교회에게는 나눔의 미덕이 강조되고, 통일 전에도 실천했듯이 동독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서독의 부를 일부 나누어 주는 삶을 실행하도록 했다"고 했다.

아울러 크레첼 박사는 한국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많은 서독 사람들은 통일 전과 후에 동독인들에게 그들이 실제로 통일된 독일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물어보지 않았다"며 "많은 영역에서 서독의 표준과 규칙이 동독에게 간단하게 전수되었다. (그러나) 모든 통일 노력에서,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약한 자가 더 말을 많이 하고, 그들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앞서 개회사 한 김영한 박사는 "1989년 동독의 민주화 물결 가운데서 동독 민중의 힘을 결집시킨 구심체는 루터파 개신교에 속한 라이프지히의 성 니콜라이 교회였다"며 "이 교회는 매주 월요일 모인 '평화기도회' 8년 만에 동독 개혁의 불을 당긴 것"이라고 했다.

김 박사는 "1989년 10월 9일 월요 기도회 후 10만 명의 개혁요구 촛불 침묵행진은 드레스덴, 동베를린 등 전국으로 번져나갔고 마침내 호네커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라며 "동독의 구속자 석방을 위한 월요 기도회는 동독 공산정권의 어두움을 밝히는 '자유의 빛'이 되었다. 이처럼 동독 교회는 동독 내의 반 정부집단인 '신 광장'과 더불어 민주화와 개방화를 요구하는 대정부 압력의 중심지이며 동독 내 민주화와 시위의 진원지가 되었다"고 했다.

이 밖에 이날 세미나에서는 정일웅 박사(전 총신대 총장)와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 주도홍 교수(백석대)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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