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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예루살렘’은 왜 그토록 중요한가?

기독일보

입력 May 30, 2018 07:57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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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d Land’ 관점에서 본 이스라엘의 신앙과 역사(3)

* 본지는 권혁승 교수(서울신대 구약학)의 논문 <'Peopled Land' 관점에서 본 이스라엘의 신앙과 역사>를 매주 1회 연재합니다.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III. 예루살렘과 시온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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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예루살렘의 역사적 중요성

성경 지명 중 가장 많이 언급된 곳은 예루살렘이다.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예루살렘이 언급된 구약 경우만도 750여 회이다. 시가서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동의어로 언급된 시온 역시 180여 차례나 나온다. 성경에는 그 외에도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다양한 명칭들이 등장한다. 다윗성, 모리아산, 유다의 도성, 성전산, 성산, 거룩한 도시, 살렘, 여부스, 아리엘 등이다. 그런 내용을 모두 합치면, 구약에서 예루살렘은 무려 2,000여 회나 언급되고 있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은 단순한 지명의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그 이름 자체가 이스라엘의 신앙의 핵심이자 성경을 이끌어 가는 신학의 중요한 주제이다. 히브리대학교의 탈몬(Shemaryahu Talmon) 교수는 예루살렘의 신학적 의미를 시내산과 결부시켜 설명한 바 있다. 그는 시내산이 이스라엘 구속의 시작이라면 시온산은 그 구속의 정착으로 이해하면서 예루살렘의 역사적 의미와 신학적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예루살렘은 주변의 산과 골짜기로 인하여 자연방어가 용이한 도시였다. 그러한 지형적 여건은 안보 면에서는 유리하였지만, 외부와의 소통이 어렵다는 점에서는 단점이기도하였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중요도시들-벧엘, 기브온, 세겜, 헤브론, 브엘세바 등-처럼 종교적 혹은 정치적 중심지는 아니었다. 예루살렘의 역사무대로의 등장은 비교적 늦은 시기였다. 다윗에 의하여 점령당하기까지 이곳은 이스라엘의 신앙과 역사에 크게 주목받는 곳이 아니었다. 오경에서도 멜기세덱 관련 사건을 제외하면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도 이곳은 다윗성이라 불리면서 다윗의 개인 왕실도시로 얼마동안 유지되었다. 다윗은 이곳에 그의 가족을 포함하여 신하들과 용병들을 주둔시켰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뒤늦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가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에 끼친 영향은 너무도 크고 지속적이었다. 예루살렘은 정치적 중심지라는 세속적 차원을 넘어 서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불멸의 도시가 되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을 때는 물론이고 나라를 잃어버린 채 전 세계로 흩어져 지낼 때에도 여전하게 지속되었다.

한 도시가 그렇게 지속적인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세계 역사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은 또한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특별한 경우였다. 한때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지였었던 실로가 그에 대한 좋은 예이다. 실로에서 중요했던 것은 여호와의 임재를 의미하는 언약궤였지 그 지역 자체가 아니었다. 언약궤를 블레셋에 빼앗긴 에벤에셀 전투에서의 패배로 실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이후 실로는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에서 더 이상 주목받질 못했다. 그에 비하여 예루살렘은 바벨론과 로마에 의하여 두 차례나 파괴되는 민족적 비극을 겪었다. 도시와 성전이 불에 타 소실되었고, 대다수의 상류층은 포로로 끌려갔다. 그런 비극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을 지켜주는 중심지로 3000여년 이상을 이어왔다.

그런 예루살렘의 독특성은 다윗의 역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예루살렘을 역사의 무대로 등장시켰을 뿐 아니라 그곳을 신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를 빼놓고는 예루살렘의 역사와 의미를 논의할 수 없다. 특히 다윗의 예루살렘 점령(삼하 5장)과 기럇여아림에 보관되었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일(삼하 6장), 그리고 그의 성전건축 제안이 거절되면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다윗언약(삼하 7장) 등은 예루살렘신학을 형성하는 원동력이었다.      

B. 다윗 이전의 예루살렘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은 다윗에 의해서이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게 된 동기는 이스라엘 자파간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헤브론에서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 왕으로 추대 되었을 때, 그가 해결해야할 과제는 남북으로 크게 나누어진 지파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다윗은 어느 지파에게도 속하지 않은 중립적이면서도 남북 간의 지리적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예루살렘을 선택한 것이다.   

다윗 이전의 예루살렘에 관한 성경기록들은 단편적인 측면들만을 보여주는 자료에 불과하다. 그러나 20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예루살렘에 대한 고고학 발굴 결과들은 적어도 초기 청동기시대부터 예루살렘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11년 발간된 파거(Montague Brownslow Parker)의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초기 청동기 시대의 도자기들을 비롯하여 사이프러스로부터 수입된 중기 청동기시대의 주발들이 발굴되었다. 1961-1967년 사이에 예루살렘을 발굴했던 캐년(Kathleen Mary Kenyon)은 2.5m 두께의 성벽과 돌로 건축된 성채 요새를 찾아냈다. 그리고 외적의 침입 시에도 기혼샘으로부터의 물 공급을 가능케 했던 거대한 지하수로도 발굴하였다. 예루살렘의 성채 요새는 다윗이 빼앗은 시온산성이며(삼하 5:7), 지하수로 역시 다윗의 예루살렘 기습공격 시 활용하였던 '물 긷는 곳'임이 분명하다(삼하 5:8). 주전 2000년대 초기에 건축된 예루살렘의 성채 요새 시온은 그 이후 다윗시대까지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다윗 이전의 예루살렘 역사를 보여주는 또 다른 중요한 자료는 '아마르나 서신'이다. 이 서신들은 애급이 가나안 지역을 통치하였던 주전 14세기 가나안의 군주들이 애급 왕 아멘호텝 3세와 4세에게 보낸 외교문서들이다. '아마르나 서신'이라는 명칭이 사용되는 것은 그 당시 애급 왕이 '아마르나'에서 통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서신들은 대부분 당시대 국제 공용어로 사용되었던 아카디아어로 기록되었다.  

아마르나 서신 가운데 예루살렘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당시 예루살렘 왕이었던 아브두-헤바(Abdu-Heba)가 보낸 여섯 통의 서신이다. 그가 보낸 서신의 내용은 가나안 지역에서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 당시는 가사와 욥바를 중심으로 가나안 지역을 통치하던 애급이 약화되었던 때였고, 그러한 힘의 공백을 틈타 하비루들이 가나안의 군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하비루에게 항복하는 다른 군주들을 불평하면서 애급의 군사적 원조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아브두-헤바는 그가 통치하는 지역을 '예루살렘의 땅'(the land of city Jerusalem)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이 가나안 남부 산간지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예루살렘 왕은 주변의 기브온, 게셀 그리고 베들레헴 등지를 자신의 통치 아래 두고 있었다. 헤브론 지역 군주였던 슈바르다타(Shuwardata)가 보낸 다른 서신에서는 예루살렘 왕 아브두-헤바가 자신의 통치지역 내 도시들을 점령하고 있음을 불평하였데, 그러한 사실들은 예루살렘의 힘과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예루살렘의 주도권 아래 있었던 이러한 당시의 상황들은 가나안 정복 과정을 보여주는 여호수아 10장의 이해에도 중요하다. 당시 예루살렘 왕이었던 아도니세덱은 기브온이 여호수아의 군대와 평화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인근지역의 아모리 네 왕들과 군사동맹체를 구성하였다. 여호수아의 군대는 그들과 맞서 싸워 예루살렘 왕 주도의 연합군을 패배시켰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여전히 정복당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점령한 것은 후대에 유다지파에 의해서였다(삿 1:8). 그러나 유다지파 역시 예루살렘 원주민들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하였다(삿 1:21). 그런 상황은 다윗 시대에까지 이어졌었다.

예루살렘 주민에 대하여 성경은 아모리와 여부스를 구분 없이 혼용하고 있다. 여호수아 10장도 예루살렘과 그 주변 주민들을 아모리족이라고 통칭한다. 그러나 사사기와 그 이후 역사서에서는 그들을 여부스족이라고 불렀다. 그러한 용어상의 혼용은 아모리를 광의적으로 혹은 협의적으로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때로는 광의적으로 가나안에 살고 있는 주민들 모두를 아모리라고 통칭하였지만(창 15:16; 수 24:15; 삿 1:34-35), 협의적으로는 가나안의 산간지역에 살고 있었던 주민들을 그렇게 지칭하기도 했다(민 13:29; 신 1:7). 예루살렘 주민들을 아모리라고 부른 것은 광의적 의미이고, 여부스라고 지칭한 것은 협의적으로 사용한 것이다.(계속)

권혁승 교수(서울신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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