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에서 현실로: 죽기 때문에 더 현실적인 신격화, 어벤져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한 장면. <아이언맨> 흥행 전까지 마블 세계관 최고 인기 히어로였던 스파이더맨은 작중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다.
(Photo :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한 장면. <아이언맨> 흥행 전까지 마블 세계관 최고 인기 히어로였던 스파이더맨은 작중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다.

 

 

◈신화와 죽음: 신이 되는 관문, 죽음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기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 작품과 다르게, 주인공들에게 죽음을 허락한다. 그것도 대량으로 죽도록 방치한다. 그간 제아무리 극한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생존하던 '센터'급 캐릭터들도 타노스라는 우주적 빌런 앞에서 무력하고 허무하게 죽어간다. 주인공은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는다는 히어로 영화의 통설을 비웃듯 분쇄해 버리는 까닭에, 원인 모를 통쾌함까지 들 정도다.

이처럼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영웅들을 단체로 신격화하는 동시에, 이 영웅들의 죽음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그리고 이렇게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죽음 장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신화적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신화와 종교가 탄생한 최고 근본 동기는 죽음이다. 애초 초월 개념은 바로 이 죽음이라는 인간의 필연적 운명을 극복해 보려는 데서 탄생했다. 만일 죽음이 인간의 존재와 의식의 완전한 종결이자 무화라면 삶은 얼마나 허무한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할 수 없었던 인류는 신화와 종교를 통해 죽음을 극복하는 초월에 대한 열망을 표현해 왔다.

성서에서도 '죽음의 초월'이라는 개념이 수긍된다. 기독교 교의는 다음을 가르친다. 초월은 하나님께서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창 2:7)" 인간에게 당연하게 존재해야 할 소망이다. 이 초월의 핵심적인 내용은 바로 죽음 너머 인간 존재의 존속이다.

초월에 대한 신앙에서 핵심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은 영혼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다. 인간의 몸이 죽고 썩어 분해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이집트 등 일부 문화권의 종교에서는 이 썩어 분해될 몸이라도 죽음 너머의 삶을 위해 보존해야 한다고 믿어, 미라(mirra)로 만들어 보존하기도 했다. 그러나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신화와 종교는 죽음 너머 인간의 존재가 영혼이라는 형태로 실현된다고 믿었다.

죽음 너머 영혼의 존재 상태에 대해서는 신화와 종교들 사이에 여러 방향의 해명이 따랐다. 그러나 육신이 살아있을 때의 생활보다는 월등히 나은, 육체의 한계(질병, 노쇠, 고통, 사멸)에 얽매이지 않는 지복(至福)의 상태에 대한 전망을 한 가지씩 제시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거두 플라톤은 그의 저서 <테아에테투스>(Θεαίτητος)에서 죽은 후에 도달할 지복의 상태에 대해 "가능한 한 최대로 신과 같이 되는 것(ὁμοίωσις θεῷ κατὰ τὸ δυνατόν, homoiosis theou kata to dunaton)"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사람의 영혼이 신격화되는 과정을 묘사한 알레고리다.
(Photo : )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사람의 영혼이 신격화되는 과정을 묘사한 알레고리다.

 

 

인간의 마음은 늘 현세의 육체적 한계, 삶의 질곡, 그리고 질병과 죽음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태를 동경하고 있었고, 이것이 고대로부터 신화와 종교, 더 나아가 철학으로 하여금 이상적 사후세계를 주장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자기신격화 욕망은, 어떤 측면에서 가련한 인생이 항거할 수 없는 불안한 인생이라는 난관 앞에서 스스로를 안위하고 자기 삶의 가치를 보존해 보려는 노력 속에서 탄생한 인지상정의 결과라 볼 수 있다.

 

성서 역시 하나님 나라와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르친다. 다만 성서가 가르치는 사후세계에 대한 전망은 자기신격화 욕망을 부정하도록 만든다는 데서 여타의 다양한 신화, 종교, 철학이 가르치는 사후세계에 대한 전망과 차별화된다.

어떻게 보면 명백한 역설이다. 인생의 한계를 초월하는 사후 존재방식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자기를 높이려는 욕망을 부인하라는 것이 온당한가?

그러나 성서의 위대한 점은 바로 이런 역설 가운데 확인된다. 자기신격화에 대한 소망과 자기부인의 극렬한 투쟁은 실상 종교성을 가진 인간에게 있어 삶의 어느 한 순간도 문제시되지 않는 순간이 없는 근본 문제다. 어떤 양태로든 신앙을 가진 이든, 아니면 종교에 전혀 무관심한 무종교인이든, 아니면 아예 기존 종교들에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반종교인이든 간에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보다 더 숭고하고 높은 가치를 따라 살 것인가 선택하며 살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자기신격화 욕망과 자기부인의 의무라는 상충되는 요구를 동시적으로 감내하며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성서는 바로 이런 인간의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다. 성서가 인간을 영원한 존재의 가능태로서 "신과 같이 될 수 있는(요 10:35)" 존재인 동시에, 온갖 연약함을 끌어안고 있는 비루한 존재의 현실태로 보는 것은 결코 근거 없는 역설이 아니다.

◈현실과 죽음: 죽어도 죽지 않는 정신, 헤겔 역사철학

그렇다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확인되는 히어로들의 신격화와 죽음의 혼재는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마치 성서처럼 인간은 신격화될 수도, 죽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인가?

사실 주연급, 센터급 등장인물들을 간단하고 허무하게 죽여버리는 행태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시시때때로 주연급 캐릭터들을 예상치 못하게, 말 그대로 '뜬금없이' 죽음으로 몰아넣는 서사의 대표작으로는 지난 8년여 간 전 세계적 인기를 누린 TV 시리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을 들 수 있다.

 

▲<왕좌의 게임> 시리즈의 주요 캐릭터들. 거의 주인공에 가까운 인물들도 속절없이 죽어버리는 것이 이 시리즈의 큰 매력 중 하나다.
(Photo : ) ▲<왕좌의 게임> 시리즈의 주요 캐릭터들. 거의 주인공에 가까운 인물들도 속절없이 죽어버리는 것이 이 시리즈의 큰 매력 중 하나다.

 

 

대다수 팬들이 처음 <왕좌의 게임> 시리즈를 봤을 때의 충격, 특히 중요 등장인물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했을 때의 충격은 잊어버리기 어려울 정도다. 물론 이 작품도 도저히 죽여서는 안 되는 주인공 둘이 존재한다. 원작 소설의 제목 <얼음과 불의 노래>(A Song of Ice and Fire)에서 얼음을 상징하는 존 스노우(킷 해링턴 분)와 불을 상징하는 대너리스 타가리엔(에밀리아 클라크 분)이 그 주인공들이다.

 

그 외 각 시즌 별 주인공 및 주요 인물 대부분은 틈만 나면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도 각 캐릭터 비중에 맞는 장엄한 죽음이 아니라, 상당히 허망하고 비루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자면 마치 알베르 까뮈의 실존주의 소설 <이방인>(L'Étranger)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사람을 살인한 이유가 "태양 때문에(c'était à cause du soleil)"라고 대답했던 주인공 뫼르소의 허무한 대답처럼, <왕좌의 게임> 속 죽음들 대다수는 허망한 이유들을 갖고 있다.

어쨌든 <왕좌의 게임>이 큰 인기를 얻음으로써, 미국 영화계 및 드라마계에 주인공 혹은 주연급 조연을 죽이는 것이 흥행에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후로 동심 파괴를 우려한 나머지 주인공은 안 죽이기로 유명한 디즈니도 주인공 죽이기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물론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에서야 죽였던 주인공도 다시 살려내는 일을 반복하고 있기는 하다. <겨울왕국>(Frozen, 2013)의 안나가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기존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제외한 나머지 프랜차이즈 작품들에서는 주인공 혹은 중요 주연급 캐릭터들을 가차없이 죽음에 몰아넣는 경우가 빈번해지고 있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Rogue One: A Star Wars Story, 2016)가 대표적이다. 디즈니 이외의 제작사에서 만든 영화들은 말할 것도 없다. <로건>(Logan, 2017)은 엑스맨 시리즈의 대표적 불멸불사 캐릭터 울버린(휴 잭맨 분)을 기어이 죽여 엑스맨 세계관에서 퇴장시켰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이런 서사 방식을 노골적으로 계승해 극대화시키는 영화다. 오죽하면 <왕좌의 게임>의 아이콘 같은 배우 피터 딘클리지(에이트리 역)를 특별히 캐스팅해 제작했을까.

이처럼 제법 영웅적이고 신화적인 모티프를 가진 작품들에서 점차 주연급 등장인물들을 가차없이 죽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하고도 관객들의 의식 깊은 곳에 숨은 신격화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인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코믹스 원작의 한 장면. 타노스에 의해 그간 전혀 죽지 않을 거 같았던 불멸의 히어로들 다수가 허망하게 죽는다.
(Photo :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코믹스 원작의 한 장면. 타노스에 의해 그간 전혀 죽지 않을 거 같았던 불멸의 히어로들 다수가 허망하게 죽는다.

 

 

대답하자면, 충분히 가능하다. 최근의 전설, 신화, 영웅 모티프를 다루는 대중문화 콘텐츠는 나름 '고전적'이었던 기존의 주인공 신격화 흐름에서 탈피,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관객의 자기신격화 욕망을 채워주고 있다.

 

영화 속 고전적 신격화의 극단적 사례가 <람보>(First Blood, 1982)나 <코만도>(Commando)다. 실베스터 스탤론과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를 1980년대 액션 히어로의 쌍두마차로 등극시킨 이 두 영화에서 주인공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혼자서 적 100여 명을 쓸어버리는 전투 가운데서 총탄에 단 한 발도 맞지 않는 주인공, 그야말로 불멸을 통한 신격화가 무엇인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신격화 공식은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 <다이 하드>(Die Hard) 시리즈로 이어졌고, 훗날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시리즈에도 적용된다.

 

어벤져스
▲<코만도>. 인간의 자기신격화 욕망을 '불멸성'이라는 고전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그려낸 영화 가운데 대표작.

 

그러나 최근 영화들 속의 영웅화, 신격화 방식은 기존의 '순진한' 방식을 탈피하고 있다. 이런 조짐은 <해리 포터>(Harry Potter) 시리즈에서 보이기 시작했고(이 시리즈에서도 꽤 많은 주연급 조연들이 간단한 살인 주문 한 방으로 허무하게 죽어간다), <왕좌의 게임>에서 완연하게 꽃을 피웠으며,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집대성되고 있다.

 

이런 새로운 신격화 방식에는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철학이 주로 채택되고 있다. 헤겔은 근대철학의 완성형 집대성자인 동시에 현대 실존철학의 문을 열어 준 중요 철학자다.

다시 말해, 아직 인간 실존의 비천함, 유한성, 불안정성을 절박하게 인정하기 전, 인간의 정신이 가진 초월적 속성과 고양 가능성에 대해 최대치의 신뢰를 보인 근대 마지막 철학자가 바로 헤겔이라는 뜻이다.

그는 근대 서구 지성들이 가졌던 자연과학적, 현실적 인간 및 역사이해를 세련된 방식으로 인간의 자기신격화 욕망에 부합하게 발전시킨 인물로 유명하다.

헤겔은 내세를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인간의 정신을 개별적 존재로 보지 않고, 전 인류적 정신에 포섭되어 고양되는 그런 존재로 보았다. 헤겔은 한 사람의 의식이 그가 살아있는 동안 전 인류 역사의 변증법적 지양이라는 흐름 속에 합류해 갖은 모순을 유발하고 그 모순에 동참하는 가운데 전 인류적 정신의 지양을 이루는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한 사람이 죽은 후에 그의 의식은 사라지지만, 그 의식이 살아생전 인류적 정신의 지양에 준 원인적 작용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처럼 헤겔은 개인의 정신이 무의미하게 사멸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정신이 신적인 단계의 정신(절대정신)으로 고양되는 전인류적 역사 속에 하나의 원인으로 남아 영원히 유의미하게 존속한다고 설파하였다.

<왕좌의 게임>을 필두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까지 영웅들의 신격화를 주된 목적으로 삼는 작품들은 바로 헤겔의 이런 변증법적 역사철학의 구도를 채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중요한 주인공이라도 현실감 있는 서사를 위해 죽일 때는 죽인다.

그 죽음이 상당히 허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은 헛되지 않다. 새로 등장하는 히어로들이 그들의 죽음의 의미를 세계의 역사적 진보, 인간 정신의 고양을 위해 되살려 활용한다. MCU는 그렇게 수많은 히어로들의 죽음을 담보로, 보다 '완성된' 신화적 세계로 탈바꿈해 간다.

이처럼 헤겔철학적 신격화 욕망이 완연하게 드러나 있기에,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제법 현실에 가까워졌으면서도 여전히 영웅들의 신격화를 포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신격화 욕망을 더 강화해서 충족시키는 작품으로 확인된다.

죽어서는 안될 것 같은 등장인물들을 죽임으로써, 마치 인간의 실존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이는 보다 내밀한 자기보존본능(conatus essendi)을 감추기 위한 탈일 뿐이다.

실존철학적 인간 성찰, 즉 온갖 초월적인 것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유한하고, 그 존재의 무게감 역시 극히 가벼울 뿐이라는 성찰을 반영하는 듯 하지만, 실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은 여전히 신격을 향해 진보하고 있다는 사상이 <어벤져스>와 MCU 시리즈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다수의 히어로가 가차없이 죽음을 맞이하지만, 신격화 모티프는 그대로 유지된다.
(Photo :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다수의 히어로가 가차없이 죽음을 맞이하지만, 신격화 모티프는 그대로 유지된다.

 

 

기독교의 정신은 이런 '자기'신격화 욕망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고대 로마 제국 시절,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격화 본능은 황제 숭배 종교(죽은 황제는 곧 신이라는 신화적 종교사상)를 만들었고, 이는 기독교를 핍박하는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16세기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을 자처하며 기독교를 신격화의 종교로 타락시켜 버린 로마가톨릭 교황 및 고위 성직자들에 저항했다. 루터와 칼빈 등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자 겸비해야 할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되찾기 위해 인생을 바쳤다.

19세기 기독교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칸트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계몽주의적 낙관론을 바탕으로 삼은 세속적 신격화 욕망에 극렬하게 저항했다. 그는 각각 고유한 근본적 죄성 때문에 절망하는 죄인을 인간의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지목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 숨어 있는 교묘하고 철학적인 자기신격화 욕망, 그것은 쉽사리 동화되기에는 과도하게 가벼워 단지 잠시 시간을 죽이는 용도로 활용될 뿐이지만, 그렇다 해서 기독교적 관점에서 결코 권장할 만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어쨌든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최대한 신과 같이 되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 않은가.

차라리 <코만도>나 <다이 하드>에서 보였던 순진하고 낭만적인 신격화 본능이 그리울 지경이다. 그런 신격화는 적어도 비현실적이라는 자각은 들게 했으니 말이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