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설교는 국내 원로 역사신학자로 한신대학교 명예교수인 이장식 박사(97)가 지난 2000년 7월 21일 제10차 세계한인선교사대회(KWMC) 아침예배 때 했던 것이다. 나이 70세에 아프리카 케냐 선교사로 나가 14년을 그곳에서 사역했던 원로신학자의 외침이 18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성찰하자는 의미에서 게재한다. 

이장식 박사.
이장식 박사.

서론

오늘날 온 세계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돼 있는 것은 그의 제자들과 역대의 선교사들과 모든 믿는 사람들의 선교의 결과이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열두 제자들을 둘씩 짝지으셔서 전도여행에 보내실 때 그들이 전대나 두벌옷도 준비하지 말고 곧바로 속히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즉 선교사업 장비 갖추는 데 신경쓰지 말고 바로 떠나라는 말씀이었다. 또 바울이 이방 선교를 떠날 때도 예수님이 어서 예루살렘을 벗어나서 멀리 떠나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고백하였다.

오늘날 우리 선교사들은 선교사로 떠나기 위해 여러 가지 평온한 장비를 갖추는 데 신경쓴다. 그런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요긴한 선교사의 장비가 있다.

1. 믿음에서 오는 확신을 갖자

우리의 신앙은 우리 확신의 원천이다. 우리가 선교지에 나올 때 우리의 과거의 교회 사역이나 신학 지식이나 선교지에 대한 지식이나 또는 선교 후원교회의 조력이나 선교비의 보장 등이 우리의 선교 지원의 확신일 수는 없다. 우리의 확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얻는 데 있다.

사도 바울이 성전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멀리 이방으로 떠나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듣고 박해와 온갖 위험이 많은, 이리떼가 사는 듯한 아시아로 떠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는데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라는 확신을 가지고 선교했다. 때로는 살 소망마저 끊어질 지경에서도 견디어 내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이 갖고 있는 능력을 믿는 데서 오는 확신을 가지고 선교했다.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의 힘을 믿는 데서 오는 확신을 가지고 선교했다.

나는 나이 70세가 되어서 케냐로 떠나올 때 생각해야 할 문제 거리가 많았다. 그리고 케냐에 대한 사전지식도 별로 없었고 답사란 것은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이방으로 떠나라는 음성을 듣고 떠났다는 사도행전에 있는 말씀을 읽고 이 말씀이 나에게 주는 말씀으로 생각하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성서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이고 또 확신도 얻게 된다. 나보다 약 20세 아래인 한 목사가 케냐에 선교하러 올 뜻을 보이기에 적극적으로 권하였더니 얼마 후에 하는 말이 오늘까지 그대로 잘 살아왔고 목회도 잘해왔는데 케냐에 가서 좀 살펴보고서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아직 위로부터 오는 소명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 음성을 들으면 확신이 생겨서 올 것이라고 보고 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파송하였을 때 확신을 갖도록 말씀하셨다. 그들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실 것을 약속도 하셨지만 누가는 쓰기를 예수님이 "사도들을 앞서 보내셨다"고 했다. 그들을 앞서 보내신 예수님은 곧 그들을 뒤따라오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는 이리떼들이 설치는 선교지에 사도들만 보내시고 자기는 안일하게 계시다가 보고만 받는 분이 아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 때까지 저희와 항상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 우리의 사역지에는 우리를 파송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같이 하셔서 우리를 위험에서 건져주시고 격려하시고 힘을 주신다. 우리를 파송한 교회의 목사들과 신도들은 우리를 보내놓고 하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로 우리를 뒤따라온다. 그것이 그들의 정성에서 나오는 다달의 선교비이다. 그래서 우리 선교사들은 외롭지 않고 약하지 않다. 우리 주님은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했다. 에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는 우리는 매사에 확신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2. 소망을 버리지 말자

우리가 선교지로 나올 때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소망은 아직 보이지 않고 또 잡히지도 않는 장래의 것이 실상처럼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들이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있고 또 우리의 선교를 받는 사람들이 우리의 소망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소망은 장기적인 선교 활동으로만 이뤄질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선교 비전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선교사 경험 몇 해가 있으면 본국에 와서 큰 교회의 목회자로 피택되는 데 유리할 것이라든지, 혹은 신학교에서 선교학을 강의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타산을 하고 선교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필요로 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선교 비전이나 소망 사항은 있을 수 없다. 우리 선교사는 사도 요한이 반모섬에 갇혀서 이제는 죽을 떄만 기다리면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새 땅과 새 하늘을 소망하고 본 것과 같은 비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에수님이 가지신 비전의 상속이다.

「로마제국의 멸망」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은 말하기를 장차 그리스도가 오셔서 다스리실 새 천년의 새 땅과 새 하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소망의 힘이 로마제국을 마침내 멸망하게 한 중요한 요인의 하나라고 했다. 그리고 교회사학자 G.Pelikan은 "이 힘찬 기독교인들의 소망이 드디어 로마제국에서 사회적 승리를 가져와서 기독교 제국(Christian Empire)이 들어섰다"고 했다. 이 소망은 죽음의 공포와 위협보다도 더 강하였고 그것이 기도교인들의 집단적 소망이어서 로마제국이 그것을 멸절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3세기의 교부 터툴리안은 말하기를 로마시의 콜로세움(Coliseum)이 서 있는 동안은 로마제국이 살아있을 것이지만 로마제국의 도시마다 마을마다에 교회가 가득히 들어서가고 있다고 말했다. 기독교회와 로마제국 사이의 충돌과 싸움은 서로 다른 소망의 싸움이었다. 그것은 부패와 불의와 사치와 폭력을 조장하는 세상적인 희망과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의 대결이며 결전이었다. 사도 요한이 본 묵시록 21장의 비전은 200년 후에 실현되어서 기독교 세계가 된 것이다. 그리고 터툴리안(Turtulian)이 본 비전은 주후 4410년에 로마시가 멸망함으로써 실현되었다. 이때 로마시는 고스족의 침략을 받아 전적으로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살생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다만 남은 곳은 바티칸이라는 지역인데 거기는 베드로의 무덤이 있고 거기에 속한 건물들이 있었다. 이곳이 오늘날의 로마 천주교회 본산지인 바티칸이다.

선교 동역자 여러분, 이러한 원대한 소망은 단 시일에 실현되는 것도 아니고 선교지에 오자마자 가시적인 어떤 큰 시설을 만든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어떤 큰 시설 준비를 서둘면서 기도의 제목이라고 교계에 호소하지만, 그것도 우리 각자의 역량과 받은 은사를 생각하고 할 문제이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신앙과 더불어 생기는 것인데 이것은 물질적 시설이나 사람의 노력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구상하고 설계하는 선교의 비전이나 계획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될 수 있다. 어떤 한 선교사는 와서 현지의 교민 교회를 목회하면서 선교 사업을 병행하노라고 큰 건물을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하여 건축하면서 교인들의 희생적인 헌금을 쏟아 붓고 은행에 돌을 빌리고 하더니 그 건물을 다 짓지 못하고 은행 빚을 교인들에게 떠맡기고 한국으로 떠나버렸다.

여러분! 우리의 선교는 우리 선교사의 사역으로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의 품꾼과도 같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 개인의 것이거나 우리가 속한 교단의 것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소망이어야 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오직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두었다고 했다. 즉 하나님의 소망이 우리의 소망이다.

3. 참된 사랑을 갖자

우리 선교사들이 품은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한다. 그것은 조건 없고 비타산적이고, 그리고 희생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육하였다. 이러한 사랑이 은혜가 되는 사랑이다. 사랑해도 은혜가 되지 않는 사랑이 이 세상에 많다. 은혜가 되지 않는 사랑은 사람을 구하거나 사람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구하고 그리고 자기 자녀가 되게 하셨다.

한국에서 오래 선교하다가 지금은 미국에 와 있는 모페트(Moffet) 선교사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 그가 쇼킹할만 한 말을 했다. 그의 말은 과거에 한국에서 선교한 많은 외래 선교사들이 사랑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랑 없이 설교하고 전도하고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워서 일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그들의 선교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라디오 기계처럼 단순히 복음을 전한 전파에 불과했던가? 아니면 문화적 우월감으로 계몽사업을 한 것일까? 혹은 인도주의적 인간애를 가지고 의료 사업을 한 것일까?

1949년에 미국의 감리교 감독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 박사가 한국에 와서 설교하면서 자기의 인도 선교 시절의 경험 한 가지를 말한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떤 서양 선교사가 자기의 안내를 받고 나병원을 방문했는데 인도인의 나환자실에 가서는 거저 보고 지내다가 백인 나환자 병실에 와서는 눈물을 짓더라는 것이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피부색이나 인종이나 민족이나 부족의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성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속에 있는 귀중한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친구의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그의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영혼의 멸망을 불쌍히 여겨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우리 한인 선교 동역자들은 선교지에서 18세기 이후에 왕성했던 서양 선교사들의 잘못된 것을 본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교파의 선교나 우리 민족의 선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교"를 하러 왔다. 엄격하게 말하지면 이것은 한국교회의 선교도 아니다. 즉 우리의 선교자적 사랑은 한국교회의 사랑이거나 내가 속한 교파의 사랑이거나 우리 민족의 사랑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선교이다. 우리의 사랑은 수없이 나와서 여러 가지 귀중한 일을 하는 NGO의 인도적 사랑보다도 더 우수한 것이다.

바울이 말한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에 빚진 자들이다. 이 빚을 갚도록 해야 하는데 그 길은 그 복음을 널리 전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수를 늘리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선교에 있다. 지난번의 IMF 파동이 생겼다고 해서 선교비를 끊어버린 교회들도 있었고 또 옛날 희랍의 신전과도 같은 큰 교회당을 짓노라고 선교비를 끊어버리는 교회도 있었다. 선교는 돈의 유무에 달린 것이 아니고 선교 정신과 선교 열정에 달린 문제이다. 과거 서양 선교 운동이 그들 나라의 부의 힘에 의존한 바가 컸었다. 지금도 그 부력이 있는데도 서양 선교 사업이 위축된 까닭은 선교 정신과 열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교회의 오늘까지의 왕성한 선교운동이 한국 나라의 경제력에 많이 의존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선교정신과 열의가 쇠약해지면 우리의 세계 선교는 후퇴할지 모른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비판의 도마 위에 놓였다. 양적 성장은 한국교회의 질적 성장의 척도가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목회자나 신자들이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듯하다. 아직도 교파주의 의식이 강하여 교계 연합 사업에서 교세가 큰 교단의 권익주장이 여전하다. 또 교파나 교단 사이의 교류나 협력은 신학이나 신조의 교만 때문에 저조한 상태이며 신학교들 안에서는 자파교회의 신학의 정통성 문제로 세력 싸움이 있고, 목회자들의 목회의 성폐는 목회하는 교회의 외적 조건으로 가늠하고 있다. 그리고 교단의 교권은 금력에 따라 장악되며 지방색의 힘도 거기에 가세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는 대체로 교회 안의 문제에 골똘하고 있고 한국사회에 널리, 그리고 깊이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신자 대중은 아직 감정적 신앙 형태여서 흔들리기 쉽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부흥운동의 향방이 종전처럼 금후의 한국교회의 향방을 결정짓는 것이 될지 모른다. 아무튼 오늘날까지 아시아에 있어서 기독교의 촛대 역할을 한 교회가 한국교회이고 이것은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운동으로 입증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잡고 있는 이 촛대가 영속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세계 선교운동이 위축되지 않아야 하고 우리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선교의 올바른 사신들이 되어야 한다. 한때 서양 해외 선교사업이 침체되어 가던 서양의 선교 모교회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었던 것처럼 우리 선교 동역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하늘나라 메시지를 진실하게, 바르게, 열심히 전하고, 그리고 우리 동역자들이 다 예수님이 짝지어주신 짝으로 생각해서 친선과 협력과 단합을 굳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같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새 천년, 새 세기에 들어서는 우리의 세계선교로 구원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게 해서 새 하늘과 새 땅 도래의 꿈이 이 세상에 실현되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자. 이 중차대한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여러분들의 그 사역 위에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000.7.21
제10차 세계한인선교사대회(KWMC) 아침예배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