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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의 지도자들 

1) 마태(Matthew) 
레위, 마가복음 2:14에서 알패오의 아들이라고도 불리웠음. 전에는 세리였으나 후에는 사도가 됨. 주후 37-40년경에 마태복음을 기록함. 유대와 이디오피아와 파르티아스에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주후 60년경에 이디오피아에서 순교함. 

2) 야고보(James) 
주 예수님(마 13:55)과 유다(유 1)의 육신의 형제임.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였으며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교회의 기둥이라는 신망을 얻었음. 대략 주후 50년경에 야고보서를 기록함. 

3) 누가(Luke) 
아마도 아시아계 헬라인이었을 것임. 직업은 의사였음. 바울의 사역 여행 시에 그와 동반함. 주후 60년에 누가복음을 기록하였고 주후 67년이나 68년에는 사도행전을 기록하였음. 

4) 베드로(Peter) 
자신의 두 서신들(베드로 전·후서)의 서두에서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와 사도\'라고 지칭함. 두 서신들을 주후 64년경과 69년경에 각각 기록함. 전에는 갈릴리에서 어부였으며 열 두 사도들 중에서 최초로 부르심을 받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받음, 주님을 세 번 부인함, 오순절 날 말함,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함 등의 성경 기록들로 유명함. 후에 아시아와 로마에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약 주후 69-70년경에 순교함. 

5) 유다(Jude) 
주후 69년 경 유다서를 씀.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와 더불어 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임. 

6) 마가(Mark) 
예루살렘 교회에서 언급된 마리아의 아들 요한으로 불리기도 했으며(행 12:12), 바나바의 사촌임(골 4:10). 바나바와 바울과 더불어 사역하였으며 베드로와 매우 가까웠음. 주후 67-70년경에 기록된 그의 복음서는 교회의 초창기부터 베드로가 구술(口述)한 것으로 여겨짐. 

7) 바울(Paul) 
원래 사울이라 불리었음. 당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핍박하고 포박했음.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주님의 나타나심을 통하여 회심함. 주님은 그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고 칭하셨음. 네 번의 사역 여행을 통하여 동에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출발하여, 서로는 로마에까지 미침. 저서로는 갈라디아서(주후 54년경), 데살로니가 전·후서(주후 54년경), 고린도 전·후서(주후 59년과 60년경), 로마서(주후 60년경), 에베소서(주후 64년경), 빌립보서(주후 64년경), 골로새서(주후 64년경), 빌레몬서(주후 64년경), 디모데 전서(주후 65년경), 디도서(주후 65년경), 히브리서(주후 67년경 그의 사상을 따른 자), 디모데 후서(주후 67년경)가 있음. 주후 67년경에 황제 네로에 의해 투옥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순교를 당함. 

8) 요한(John) 
세베데의 아들인 사도 요한으로서, 그의 형제는 야고보이며 어머니는 살로메임. 주후 90년경에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간증으로 인하여 밧모 섬에 유배당함. 그 기간 동안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기록함. 주후 90년경에 에베소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하였고, 주후 90∼95년경에는 요한 서신서 들을 기록함 

2. 교부들과 로마의 핍박 하에서의 순교자들 

1)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 주후 약 30-96) 
로마의 감독. 삼일성과, 그리스도의 신성과, 은혜에 의한 의롭게 됨과, 교회의 합일에 관한 분명한 간증을 짊어짐. 

2) 이그나티우스(Ignatius ; 주후 35-107) 
안디옥의 감독. 그의 일곱 서신은 초기 교회에 많은 영향을 줌. 결국 로마의 군병들에 의해 호송되어 순교 당함. 그는 순교 시에 핍박 자들에게 "나를 짐승들에게 던져주시오. 그것들에 의해 나로 하나님의 동참자가 되게 해 주시오"라고 간청함. 

3) 폴리캅(Polycarp ; 주후 약 69-155)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 후에 서머나의 감독이 됨. 그의 저작들에는 성경적 구절들이 자주 인용됨. 이단적인 그노시스주의자 마르시온을 대항하여 싸웠으며 그를 \'사탄의 맏아들\'이라고 부름. 86세의 연로한 나이로 순교함. 

4) 이레니우스(Irenaeus ; 주후 약 130-202) 
폴리캅의 제자이며 리용의 감독임. 『모든 이단들을 반대하여(Against All Heresies)』를 기록하여 그노시스주의와 다른 이단들을 반대함.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분 안에서 첫 아담이 상실한 것을 회복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셨다고 앞서서 주장함. 명쾌하게도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고 말함. 

5) 히폴리투스(Hippolytus ; 주후 160-235) 
이레니우스의 제자이며 뛰어난 변증가임. 『모든 이단들을 논박함(Reputation of All Heresises)』이라는 그의 저작에서 사벨리우스의 이단적인 관점을 격렬하게 반박함. 그의 또 다른 저작 『사도적인 전통(Apostolic Tradition)』에서는 순수한 믿음과 사도적인 가르침을 보존하려고 애씀. 

6)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 ; 주후 약 160-225) 
아프리카인 교부. 이레니우스에 교리적 기원을 둔 저명한 변증가. 자신의 변증문 『파락세아스를 반대하여(Against Paraxeas)』에서 삼일 하나님의 한 본질과 세 위격들을 주장함.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였는데, 이는 후에 니케아 신조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음. 그노시스주의(마르시온의 교리)와 대항하여 싸움. 로마 정권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변호함. 

7) 판타에누스(Pantaenus ; 주후 120-190)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창시자이며 교리문답 학교의 교장임. 

8)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 주후 약 155-215) 
아테네에서 출생함. 판타에누스의 제자이며 후에 알렉산드리아의 저명한 교사가 됨. 로고스 즉 육체가 되신 그리스도의 역사를 강조하여 강해함. 

9) 오리게네스(Origenes ; 주후 약 185-254) 
이집트에서 출생함. 클레멘트를 승계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교리문답 학교의 교장이 된 창의력이 풍부한 작가임.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 중 하나인 『헥사플라(Hexapla)』는 히브리어 구약과 더불어 아퀼라역, 심마쿠스역, 70인역, 테오도시온역 등 헬라어로 된 구약에 다양한 주해를 달아 놓은 것임. 영원한 복음의 능력을 생활 가운데 체험한 자들로 구성된, 교회의 하늘에 속한 본성을 봄. 『우리의 기도』에서 기도는 단지 \'간구\'가 아닌 \'하나님의 생명에의 참여\'라고 주장함. 

10)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 주후 296-373) 
주후 325년 니케아 신조의 체계화에 공헌함. 후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됨. 아리안주의를 대항했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수호함.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On the Incarnation of the Word of God)』에서 그는 "그분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되게 하려하심"이라고 분명하게 진술함. 

10) 카파도기아 교사들(The Cappadocian Teachers) 
삼일성을 '세 위격들(hypostases) 안에 있는 한 본질(ousia)\'이라고 강해함. 

12) 대 바실(Basil the Great ; 주후 약 329-379) 
가이사랴의 감독. 수도원주의에 영향을 받아 단순한 생활을 주장함. 오리겐의 사상에 관하여 탁월하여 아리안주의를 반박함. 니케아의 교리들을 지지함. 

13)닛사의 그레고리 (Gregory of Nyssa ; 주후 약 330-390) 
바실의 친동생. 닛사의 감독. 삼일성의 본질(ousia)과 위격(hypostasis)을 구분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한 명임. 

14)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sianzus ; 주후 약 330-394)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능변한 연설가. 그의 가장 훌륭한 저작은 아리안주의를 반박한 다섯 편의 『신학적인 강변(Theological Addresses)』임. 

15) 암부로우스(Ambrose ; 주후 337-397)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세례를 베푼 밀란의 감독. 교회는 국가로부터 독립적으로 존립해야 한다고 지지함. "황제는 교회 안에 있지, 교회 위에 있지 않다"고 선언함. 

16) 제롬(Jerome ; 주후 340-419) 
이탈리아에서 출생하여 후에 팔레스틴으로 이주함. 자신의 온 일생을 수도원 생활에 드렸으며 믿는 이들이 금욕적인 생활을 살도록 격려함. 성경을 라틴어 불가타역(Vulgate)으로 번역하는데 20여 년을 드림. 구약, 신약, 교회사에 대한 여러 권의 주석서를 기록함. 

17) 크리소스톰(Chrysostom ; 주후 346-407)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강조함. 그의 설교들은 성경의 해석을 장려하는 것이었으며 실행성을 강조하는 것이었음. 수도원 생활을 숭상했고, 그의 저작들은 신선함과 간결함을 간직함. 순교함. 

18)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 주후 354-430) 
북아프리카 히포의 감독. 교회의 합일에 관하여 열성적임. 펠라기우스의 이단을 논박함. 『고백론』, 『하나님의 도성』, 『삼일성(De Trinitate)』을 기록하였고, 마지막 저작에서 그는 삼일성에 대한 진리를 강해하여 서구 기독교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침. 

3. 암흑기의 개혁가들 

1)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 주후 480-550) 
청년기에 로마에서 공부를 했지만, 그 도시의 타락한 생활을 몹시 싫어하여 결국은 은둔자로서 살기 위해 동굴에 은거함. 12개의 작은 수도원 공동체를 세웠고 수도 생활의 규칙을 다시 제정함. "서방 수도원의 주교(Patriarch of Western Monastery)"로 존경을 받음. 

2) 바울파(Paulicians)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에 있는 믿는이들의 무리들로서 스스로를 사도적인 교회의 진정한 영적 후계자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을 로마 교회와 구별함. 사도들의 가르침과 성경적인 교리들을 지킴으로서 주님을 따름. 신약의 정수를 열정적으로 지켰으며 전수함. 주요 인물들 중에는 실루아노(Silvanus; 주후 630-684)와 세르기우스(Sergius; 주후 765-835)가 포함되어 있음. 

3) 보고밀파(Bogomils) 
8세기 중엽에, 많은 믿는이들이 콘스탄티노플로 이동함. 10세기에는 불가리아로 이주한 믿는 이들도 있었음. 이 이주자들이 회심하여 교회들을 설립함. 주도적인 인물들 중의 하나가 바실(Basil)이며(주후 1070-1119), 그는 전파와 가르침에 있어서 지치지 않는 사람으로서, 자비량하여 이방인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않을 것을 주창함. 그는 의사로 일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함. 

4) 알비파(Albigenses) 
프랑스 남부에서 살던 믿는 이들의 회중. 로마 교회와의 불일치 가운데서 자신들의 모임을 형성함. 순수하고 경건한 삶의 방식을 주창함. 가장 특출한 인물은 피에르 드 브루에이스(Pierre de Brueyes)로서, 20년 동안의 여행과 전파 기간 동안에 그는 많은 사람들을 미신으로부터 성경의 가르침으로 이끌어왔고 믿는 이들의 세례에 관한 진리를 회복함. 

5) 왈도파(Waldenses) 
사도 바울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알파인 계곡으로 이동했던 널리 알려진 믿는 이들의 회중. 사도 시대 교회의 내용을 준수함. 성경을 믿는 이들의 교리와 교회의 질서 면에서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여김. 가장 잘 알려진 인물로는 피터 왈도(Peter Waldo; 주후 1140-1217)가 있는데, 그는 복음화를 위하여 믿는 이들을 둘 씩 보내는 실행을 회복했으며, 
성경을 로마의 방언으로 번역함. 그의 수년간의 수고로 보헤미아에서 큰 부흥이 일어남. 추종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그들 중의 대부분은 자신들을 드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와 보헤미아를 거쳐 여행하며 전파했음. 

6) 앗시시의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 ; 주후 1182-1226) 
원래 부자의 아들임. 그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음. 자원하여 가난한 생활을 실행했고 자원하는 가난의 길을 회복함. 복음화를 위해 프란체스크 수도회 체계를 설립함. 

7)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 주후 1225 - 1274) 
박식한 학자이며 다작(多作)의 저자임. 중세의 으뜸가는 스콜라 철학자임. 그의 『Summa Theologica』는 조직 신학의 가장 높은 업적 물로 존중되고 있음. 

8) 죤 휘클리프(John Wycliff ; 주후 1329-1384) 
영국의 종교개혁자들인 "롤라드파(Lollards)" 중에서 두드러진 인물임. 그의 논문 『하나님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 종교의 진정한 원천"이며 "성경만이 진리"라는 사실을 보여줌. 성경을 준수하는 자들만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함. 믿는이들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통을 가질 수 있다고 주창했으며, 따라서 니골라당의 독점적인 권위를 부인함.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으며, 영국 전역에 성경의 가르침을 확산하기 위해 전도 여행단을 조직함. 

9) 프라하의 제롬(Jerome of Prague ; 주후 약 1371-1416) 
영국에서 휘클리프의 강의를 듣고 그의 영향을 받은 유학생임. 프라하로 돌아가서, 구원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복음의 가르침으로 돌아와야 하며, 로마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벗어났다고 가르침. 순교함. 

10) 죤 후스(John Huss ; 주후 1373-1415) 
프라하의 제롬의 영향을 받아서, 구원은 율법의 행위를 떠나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에 의한 것이고, 사람은 경건한 생활이 없이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권고함. 순교 당함. 집행되기 전에 다음과 같이 선포함. "나는 \'사람들이 너희를 핍박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크게 위로를 얻는다...이는 좋은, 아니 가장 좋은 안부이다...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았다." 

11) 공동생활을 한 형제단(Brethren of Common Life) 
네덜란드에서 구루테(Gerard Groote; 주후 1340-1384)와 뤼스부로에크(Jan van Ruysbroeck; 주후 1293-1381)에 의해 설립됨. 구루테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수도생활과 신비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후에는 '공동 생활의 수도원'을 설립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음. 복음화에 종사함. 가난하지만 의연한 청년들이 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학교 조직망을 설립했으며, 그 당시의 사회를 위해 성경에 근거한 건전한 교육을 제공함.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인 토마스 아켐피스와 에라스무스가 이 학교의 학생이었음. 성경을 인쇄하고 찬송가를 출판함. 종교개혁에 지대한 공헌을 함. 

12)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 ; 주후 1380-1471)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의 저자로 여겨짐. 기도 생활만이 생명의 성장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여김. 하나님과의 교통과 생활에서의 실행을 조화시킴. 믿는 이들이 십자가의 길을 참되게 알고 있는가를 면밀히 살피도록 도움을 줌. 그의 책은 신비주의의 고전임. 

13) 에라스무스(Erasmus ; 주후 약 1466-1536) 
각주와 부연이 딸린 새 라틴어 번역이 있는 헬라어 성경을 출판함으로써 믿는 이들로 하여금 신성한 계시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줌. 로마 교회 안에서의 개혁의 조류를 촉진시킴. 

14) 연합 형제단(United Brethren)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교회로 돌아가기 위해 교회의 원칙을 재고함. 성경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바대로 거룩한 생활에 강조점을 둠.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를 역설함. 글과 찬송을 많이 남김. 진리 교육에 관한 진리, 특별히 믿음에 의한 구원에 관한 진리에 강조점을 둠. 가장 주된 인물은 프라하의 루카스(Lukas of Prague; 주후 ?-1528)임. 

4. 종교개혁기 

1)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 주후 1483-1546) 
믿음에 의한 칭의에 관한 진리를 회복했고 세상에게 열려진 성경을 제공함.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나아가는 것과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 성경의 가르침을 고수했고,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함. 

2) 쯔빙글리(Ulrich Zwingli ; 주후 1484-1531) 
스위스 종교개혁의 지도자임. 성경으로써 성경을 해석함. 성경을 유일한 통제하는 원칙으로 여김. 구원은 믿음으로 인한 것임을 보여주는 67권의 짧은 에세이를 기록함. 가톨릭의 미신들은 부인했으나 세례에 관한 진리에 관해서는 분명치 않은 채로 남아 있었음. 

3) 슈벵크필드(Kaspar von Schwenckfeld ; 주후 1489-1561) 
실레지아의 종교개혁의 중심인물임. 성경 전체의 영감을 믿음. 구원이 유기적인 과정이라는 것과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영화롭게 된 하나님-사람이 생명주는 영이라는 진리를 선포함. 모든 믿는 이들의 보편적인 제사장 직분을 확증함. 선택받는 문제는 인간의 의지가 아닌 그 영의 인침과 계시와 나타남에 의한 것이라고 간주함. 

4) 르 페브르(Jacques Le Fevre ; 주후 1455-1536) 
16세기 초기 프랑스와 스위스의 종교개혁 운동의 중심인물임. 신약 성경과 찬송을 프랑스어로 번역함. 사람들을 성경으로 이끌었음. "그분의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의롭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다"라고 분명히 가르침. 

5) 파렐(Gullavme Farel ; 주후 1489-1565) 
스위스의 종교개혁 운동의 주도적인 인물임.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한 구원과 그분의 속죄하는 역사의 충분함을 체험함. 구원이 행위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았음. 불어권 스위스에서(특히 제네바에서) 열렬히 수고했으며, 마침내 존 칼빈을 얻음. 

6) 존 칼빈(John Calvin ; 주후 1509-1564) 
그의 『기독교 강요(The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종교개혁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을 가장 건전하게 조직화하고 가장 분명하게 체계화한 책임. 믿음에 의한 칭의와 세례는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를 대표한다는 진리를 발전시키고 강해함. 하나님의 영광, 믿는 이들의 예정, 구원의 보증,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표로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기 위해 수고함과 같은 진리들을 강조함. 성경에 대한 각주를 썼고 종교개혁기 중에 가장 많은 권수를 저작한 저자로 평가됨. 장로들의 교회 치리를 주창했고, 스코틀랜드의 개혁자들이 그 점을 따랐으며 이것이 장로교회의 기원이 됨. 

7) 재세례파(Ana baptists) 
사실상 세례교도들이었던 독일 형제단의 회중임. 믿음에 의한 칭의의 진리를 전파함. 유아 세례의 오류를 봄. 종교적인 형식과 세상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영 안에서의 주님과의 교통을 회복함. 옥중에서 많은 찬송이 쓰여 졌으며, 주님을 위한 고난과 그분에 대한 사랑의 체험을 극도로 표현함. 

8) 메노 시몬(Menno Simon ; 주후 1492-1559) 
재세례파에 속한 주된 교사 중의 하나임.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함. 네덜란드에서 기소당한 믿는 이들을 방문하고 집회들을 세우기 위해 광범위하게 여행함. 그의 추종자들은 메노파(Mennonites)가 되었고, 그들은 계급 조직의 오류를 깨달은 최초의 믿는 이들의 무리였음. 그들은 서로를 형제들이라고 지칭하는 법을 회복했음.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러시아로 감. 

9)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 ; 주후 1494-1536)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으며, 그 번역판은 널리 유포되었음. 순교함. 

10) 청교도(Puritans) 
칼빈주의 영향의 결과로 일으켜짐. 성경을 근본적인 권위로서 높임. 니골라당의 교훈과 우상 숭배를 거절함. 성경적인 방식에 따라 교회를 세울 것을 결정함. 핍박을 받고 네덜란드로 피난함. 1616년에 회중 교회를 설립함.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항해했고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기초를 놓음. 

11) 조오지 폭스(George Fox ; 주후 1624-1691) 
퀘이커 교도(프렌드 회, Society of Friends)의 인도자임. 참된 영적 체험을 추구함. 믿는 이들이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빛 비춤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봄. 성령의 직접적인 영감을 믿음. 성령의 자유로운 운행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대부분의 집회를 인도함. 

12) 죤 번연(John Bunyan ; 주후 1628-1688) 
특별한 설교의 은사를 지닌 청교도. 그의 『천로역정』은 아마 성경 외에 지금까지 쓰여 진 어떤 책보다도 더 많이 읽혀진 책일 것임. 그 책의 대화의 거의 80%가 성경에서의 직접적인 인용과 각색으로부터 온 것임. 순교함. 

13) 스페너(J. Spener ; 주후 1635-1705) 
개혁 교회 안의 경건주의자들 중에 주된 인물임. 그의 시대에 이미 루터 교파가 인간의 의견으로 충만한 일종의 형식적인 종교로 타락했다는 것을 깨달음. 고린도전서 14장의 가르침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창함. 사람들에게 전통적인 형식을 거절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라고 가르침. 

14) 고트프리드 아놀드(Gottfried Arnold ; 주후1666-1714) 
스페너의 친구. 교회에 관한 의문들에 대해 책을 썼으며, 그 당시에 교회가 진리로부터 벗어났으며 신약에 계시된 것과 같이 합당한 입장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함. 세상과의 분별과 모든 성도들과의 친교의 소망을 일깨움. 

5. 신비주의자들 

1) 라바디(Jean de Labadie ; 주후 1610-1674) 
신약을 부지런히 연구함. 교회의 회복이 초기의 교회 생활의 유형으로 돌아오는데 달려 있다고 믿었고, 집회가 고린도전서 14장의 원칙에 따라 행해져야 된다고 믿음. 복음이 신앙과 경건의 유일한 규칙이라고 주장함. 외적인 개선과 경건한 생활의 능력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내적 생명에 달려 있다고 주장함. 기도와 묵상을 위한 지침서를 저술. 참된 교회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실제로 다시 태어난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줌. 교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성령을 통하여 한 몸 안에 연결되고 그 회중의 모든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 줌. 

2) 밀리노스(Miguel de Molinos ; 주후 1640-1697) 
그의 『영적인 인도(Spiritual Guide)』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법을 가르쳐 줌. 그 당시에 그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줌. 

3) 마담 귀용(Madame Guyon ; 주후 1648-1717) 
그녀의 일생 동안 하나님의 새기심(carving)과 제하심(prunning)을 통한 정결케 됨과 십자가를 체험함. 그녀의 책들인 『기도하는 짧고도 쉬운 방법(A Short, Easy Method of Prayer)』과 『달콤한 향기로운 몰약(Sweet Smelling Myrrh)』은 성도들의 영적인 생명의 발전에 커다란 도움이 됨.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것과 자아를 부인하는 문제에 대하여 깊은 인식이 있었음. 

4) 페네롱(Father Fenelon ; 주후 1651-1715) 
마담 귀용과 동역함. 주님을 위해 기꺼이 고난 받고자 함. 많은 영적인 계시들을 해방함. 

5)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 ; 주후 1605-1691) 
신비주의의 고전인 『하나님의 임재를 실행함(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을 썼으며, 생활과 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을 강조함. 

6) 윌리암 로우(William Law ; 주후 1686-1761) 
신비주의의 가르침을 개선하여 이를 적용할 수 있게 함. 그의 논문인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위한 진지한 부르심(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은 요한 웨슬리와 휫트필드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침. 

6. 모라비아 형제들 

1) 진젠돌프(Zinzendorf ; 주후 1700-1760) 
원래 귀족임. 그의 아버지는 스페너의 좋은 친구였음. 경건주의자들에게서 주님을 위하여 깊은 영향을 받았음. 온갖 종류의 핍박받는 믿는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의 소유지를 따로 떼어 둠. 또한 영적인 인도를 하는 일에 자신을 바침. 그를 통하여 모라비아의 형제들이 일으켜졌고, 이들이 복음을 위하여 전 세계로 나간 형제들의 첫 번째 무리였음. 결국 이들의 85 퍼센트가 해외선교사들이 됨. 

2) 요한 웨슬리(John Wesley ; 주후 1703-1791) 
모라비아 형제들의 도움을 통하여 성령세례를 경험하고 믿음에 의한 칭의의 진리를 봄. 또한 마담 귀용과 윌리암 로우와 같은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아 성화에 관한 진리를 더욱더 회복했고, 사람이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될 뿐만 아니라 믿음에 의해 거룩케 된다는 것을 깨달음. 1729년에 영혼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옥스퍼드에서 집회를 시작함. 후에 감리교회를 세움. 

3)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 주후 1707-1771) 
그의 형 요한 웨슬리의 수고와 완전히 함께 함. 찬송 작가의 대가로서, 그의 작품은 6천곡이 더 됨. 매우 높은 영적 가치를 지닌 대부분의 찬송들은 성경에서 가르친 주요한 교리의 해설을 담고 있으며, 성령 안에서의 경배함과 내적인 체험을 표현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감동 받은 사람들의 사모하고 찬미하는 마음들을 표현한 것임. 

5)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 주후 1703-1758) 
1722-1723년 겨울에 자기의 마음과 생활을 통제하는 지침서가 되는 일련의 규칙들을 만든 '결의문'의 대부분을 썼다. 이 결의문은 "그리스도인의 임무에 대한 최고의 요약 집으로 지금까지 사람이 만들 수 있었던 것 중 복음적 선행 실천에 대한 최고의 지침서"로 평가되고 있다. 에드워즈가 목회하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영적 대각성이 일어났다. 먼저는 1734-1735년 노드햄턴에 일어난 역사였고, 두 번째는 1740-1741년이었는데 이때에는 뉴잉글랜드 전역에 걸쳐서 일어났다. 두 번째 대각성의 특징은 조지 휫필드와 사역했다는 점이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들은 그가 살았던 생애를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임종을 지켜보는 딸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자신의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다. "오랫동안 우리 사이에 있었던 신비한 연합은 내가 믿은 대로 영적인 성질의 것이었으므로 영원히 계속될 것이오." 

4)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 주후 1714-1770) 
웨슬리 형제들과 함께 옥외 집회를 여는 것을 시작했으며 사람들을 이런 방식으로 주님께 이끌었음. 후에 그의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일하는데 보냄. 은혜의 복음을 회복함.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의 평강을 받고 구원의 결과로 즐거운 헌신의 생활을 사는 것을 주창함.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다른 모든 이름들은 단념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높여지게 하소서." 

7. 영국 형제회 

플리머스 형제들로도 알려진 이들은 하늘에 속한 교회의 부르심에 관한 두 가지 항목과 교회의 하나 됨을 회복함. 종파 조직이 잘못 되었음을 봄. 오직 유일한 그리스도의 몸만이 존재하며 교회는 사람의 의견이 아닌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에 의해 세워져야 함을 깨달음. 형제회는 구약에 있는 여러 예표들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뛰어났고 유대인들에 관한 성경적인 예언들과 교회에 관한 예언들을 분명히 구별함. 많은 출판물을 발행함. 오늘날까지 그들의 신학은 기독교 안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음. 

1) 그로브스(Anthony Norris Groves ; 주후 1795-1853) 
형제회의 모임을 시작함. 종파의 성직 임명의 오류를 봄. 중동과 인도에서 복음을 전파함. 

2)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 주후 1800-1882) 
형제회가 출판한 수천 권의 책들 중에서 첫 번째인 그리스도의 교회의 본성과 합일(The nature and unity of the church of Christ)을 출판함.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숙함. 성경을 독일어, 불어, 영어로 번역함. 그의 저서인 『성경 각 권의 개요(Synopsis of the books of the Bible)』는 그 분야에서 권위서로 인정됨. 주님을 위해 널리 복음을 전파함. 

3) 벨레(John Giffrod Bellett ; 주후 1795-?) 
더블린(Dublin)의 트리니티 대학(Trinity College) 시절 다비의 동급생이었음. 니골라당의 가르침의 오류를 봄. 믿는 이들 사이에 상호 교통이 있는 모임과 영적인 추구를 회복함. 

4) 죠오지 뮬러(George Muller ; 주후 1805-1898)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믿음에 대해 뛰어난 공과들을 배움. 고아원을 설립했고 재정적인 필요에 있어서 믿음에 의한 생활을 삶.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요청할 수 있다는 진리와 믿음에 의한 생활의 간증을 회복함. 일생동안 그는 수없이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음. 

5) 멕킨토시(C. H. Mackintosh ; 주후 1820-1896) 
모세오경에 대한 주석을 씀으로서 표징들에 관한 지식을 회복함. 그 분야에서는 권위서임. 

6) 윌리엄 켈리(William Kelly ; 주후 1821-1906) 
다비의 가르침들과 실행은 켈리를 통해 최고의 해석과 적용을 갖게 됨. 스펄젼(Spurgeon)은 그를 형제회 최고의 신학자와, 우주처럼 큰 사고(Mind)를 가진 자로 묘사함. 

7) 로버트 고벳(Robert Govett ; 주후 1813-1901) 
그리스도인의 보상의 문제를 봄.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행한 것에 따라 보상을 받음. 구원은 생명의 문제이며 보상은 생활의 문제임. 그는 진리의 두 가지 핵심적인 항목을 회복함. 첫째, 그리스도인들도 천년왕국으로부터 제외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믿는 이는 신실하고 근면해야 함. 둘째, 모든 믿는 이들이 환난 이전에 휴거되는 것은 아님. 오직 이기고 신실한 믿는 이들만이 휴거에 참여할 것임. 

8) 펨버(G. H. Pember ; 주후 1703-1791) 
그의 저서 『위대한 예언들(Great Prophecies)』,『지구의 초기 시대(Earth\'s Earliest Ages)』,『두 바벨론(Two Babylons)』은 성경에 대한 탁월한 해설로 인정됨. 

9) 팬톤(David Morrison Panton; 주후 1870-1955) 
상징과 예언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권위서인 『여명(Dawn)』지(紙)를 출판함. 

10) 밀러(Andrew Miller ; 주후 1810-1883) 
그가 쓴 『교회사』 는 많은 교회사들 가운데 가장 영적인 저서들 중 하나임. 

11) 죠오지 커팅(George Cutting) 
안전, 확신, 누림(Safety, Certainty and Enjoyment)을 저술하여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음을 말하였고, 또한 구원의 확신에 관한 진리를 회복함. 복음에 관한 진리들이 완전히 회복되었음. 

8. 복음주의 

1)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 주후 1761-1834) 
윌리엄 로우(William Law)의 신비적인 저서들에 의해 영향을 받음. 사람에겐 복음을 받을 책임과 역량이 있다는 것을 믿음. 이교도들의 회심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를 논하는 『탐구(Inquiry)』를 저술함. 40년 동안 인도에서 복음을 전파했고 그곳에서 복음의 기초를 놓음. 여러 인도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함. 인도와 영국에 복음의 분위기를 가져감. 

2)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 주후 1813-1873) 
그의 온 일생을 아프리카에서 복음 사역을 위하여 헌신함. 

3) 챨스 피니(Charles Finney ; 주후 1792-1875) 
19세기 미국 대 부흥을 가져온 그릇임. 그는 부흥의 의미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이고, 죄인들에게는 과거를 뉘우치는 것임을 봄. 퇴보한 교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주의하여 기울이도록 일깨우고 교정함. 믿는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회복되고 확대되는 것과 그들의 생활 안에서의 영광스러운 간증을 통해서 하나님이 죄인들을 굴복시킨다고 주장함. 

4)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 주후 1832-1905)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체험을 말하는 연결과 교제(Union and Communion)를 씀. 그리스도와의 연결과 교제에 관한 진리를 회복함. 중국 내지 선교회를 창설하여 중국에서의 복음 사역에 지대한 공헌을 함. 

5) 스펄젼(C. H. Spurgeon ; 주후 1834-1892) 
영국 침례교 목사. 청교도들의 실행에 의해 영향을 받음. 신약의 원칙에 따라 교회가 세워져야 함을 부르짖음. 설교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 그의 아내는 가난한 설교자들이 영적인 공급을 얻을 수 있도록 각처에서 그의 책들을 나누어줌. 

6) 무디(D. L. Moody ; 주후 1837-1899) 
위대한 전도자였음. 매일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실행함. 영국과 미국의 대도시들을 여행함. 기도의 필요를 강하게 주장함. 완전히 또한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함. 그는 일생동안 수백만 마일을 여행했고 1억이 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으며 75만 죄인들을 위해 개인적으로 기도했음. 

7) 심슨(A. B. Simpson ; 주후 1843-1919) 
사도 시대 사람들이 주 예수님과 완전한 헌신에 의한 성령의 충만과 주님을 완전히 신뢰하는 생활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 되기 위해 믿음에 의해 살았던 체험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귀히 여김. 그는 또한 신유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고 체험했지만 신유가 아닌 부활 생명이 육신의 약함을 이긴다고 강조함. 그리스도를 구원자와 능력으로서 인식함으로써 질병을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침. 

9. 한국의 개혁주의 목사 

1)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Grant, 1859. 7. 19~1916)  

한국명 원두우(元杜尤). 런던 출생. 1881년 뉴욕대학교를, 1884년 뉴브런즈윅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885년 H. G.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와서 광혜원(廣惠院)에서 물리· 화학을 가르쳤다. 1887년 벽지전도부터 시작하고, 서울 새문안교회를 설립했으며,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창설하였다.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 그 회장 등을 역임하며 성서의 번역 사업을 주관하는 한편, 1890년에 한영사전, 영한사전을 출판하고, 1897년에는 주간지 그리스도신문도 창간하였다. 1900년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였으며, 1915년에는 경신학교(儆新學校)에 대학부를 개설,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다. 1916년 신병으로 귀국, 애틀랜틱시티에서 소천 하였다. 한국 개화기에 종교· 정치· 교육· 문화 등 여러 분야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2) 길선주(吉善宙, 1869~1935. 11)  
자는 윤열(潤悅), 호는 영계(靈溪)이다.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선도(仙道)를 공부하면서 한의학(漢醫學)을 연구하였으나 1897년 기독교 교인이 되면서 세례를 받았다. 같은 해에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의 평양지부를 조직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 뒤 1907년 한국 최초의 기독교 신학교인 평양 장로회신학교(長老會神學校)를 졸업하였으며, 한국인 최초의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목회(牧會)를 하면서 신앙 활동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남녀 구별의 불평등을 교회 안에서 타파하기 위하여 남녀 좌석 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포장을 철거하였으며, 아악(雅樂)을 교회음악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교육 사업에도 참여하여 숭실학교(崇實學校)· 숭덕학교(崇德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1912년 105인사건 때에도 수난을 당하였고,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2년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북간도를 포함하여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부흥사(復興師)로 성경을 가르치면서 많은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평안남도 고창교회(高昌敎會)에서 설교 도중에 소천 하였다. 문집에 영계 길선주 목사 저서에 해타론(懈惰論),  만사성취(萬事成就),강대보감(講臺寶鑑), 말세학(末世學) 등이 있다. 

3) 주기철(朱基徹, 1897. 11. 25~1944. 4. 21)  
호 소양(蘇羊). 아명 기복(基福). 경남 창원(昌原) 출생으로. 1916년 평북 정주의 오산(五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연희전문(延禧專門)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곧 중퇴하였다. 그 후 웅천(熊川)에서 남학회(南學會)를 조직하여 애국사상을 고취하였으며, 3·1운동에 참가한 후 1926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부산 초량교회(草梁敎會) 목사, 마산 문창(文昌) 교회목사를 거쳐 1936년 평양 산정현(山亭峴) 교회목사가 된 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938년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에서 순교 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4) 한경직(韓景職, 1902~2000. 4. 19)  
평안남도 평원(平原)에서 출생하였으며, 1925년 평양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1926년 미국 엠포리아대학, 1929년 프린스턴 신학대학을 졸업했으며 1948년 엠포리아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5년 서울 영락교회(永樂敎會) 목사로 부임하고 1954년에는 숭실대학 학장을 겸직하였으며, 1955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숭실대학(崇實大學)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서울여자대학 재단이사장, 영락상업고등학교 재단이사장, 대광(大光)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5년 아시아 전도협의회(傳道協議會) 위원장을 거쳐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에 취임하고, 기독교선명회 이사장, 홀트양자회 이사장, 영락여자신학교 이사장, 1971년에는 숭전대학 재단이사와 장로회신학대학 이사장, 1972년 아시아연합신학대학원 이사장이 되었고, 같은 해 영락교회 당회장을 은퇴, 원로목사가 되었다. 기독교방송국 재단이사장, 한국복음화운동본부 대표, 1974년 반공연맹 이사, 1975년 아시아 교회진흥원장, 1983년 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총재 등을 지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고 1992년에는 '노벨 종교상'으로 일컬어지는 템플턴상을 받았다. 저서에 건국과 기독교, 설교집(10권), 내일을 사는 인생, 사도 바울에게 배운다. 등이 있다. 

5) 강신명(姜信明, 1909~1985)  
경북 영주(榮州)에서 태어나서. 1934년 숭실전문학교에서 영어를 전공한 뒤 1938년 평양신학을 졸업, 목사 안수를 받고, 1949년 서울 중구 저동에 있는 영락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53년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을 수료하고, 1955~1979년 새문안교회 목사로 있었다. 그 사이 미국 스털링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고(1964), 연세대학교 재단이사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삼애학원(三愛學院)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1∼1985년 숭전대학 재단이사장 ·총장직에 있으면서 한국기독교선교단체협의회 회장, 세계선교사 훈련원장 등을 역임하여 한국기독교의 원로로서 종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고, 저서에 설교집(영혼의 닻), 동요작곡집(새서방 새색시), 아동가요곡 300곡집 등이 있다. 

10. 한국의 부흥사 

1) 김익두(金益斗, 1874~1950)  
황해도 안악 출생. 청년 시절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가 18세에 결혼하여 상업에 종사했으나 실패하고, 1900년 미국인 선교사 W. L. 스왈렌의 설교에 감동하여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1년 후 세례를 받았는데 1910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이때 이미 성경을 100번 읽었다. 이윽고, 예수교장로회 제9대 총회장이 되고, 서울 남대문교회 명예목사로 초빙 받았다. 그 후 부터 전국 각지의 부흥회 청탁이 빗발치듯하였다. 그가 다닌 집회 수는 776회에 이르렀고, 설교 횟수는 2만 8000회, 교회 신축 150처, 병자 치유 1만 여 명, 그의 감화로 목사가 된 사람이 200명에 달하였다. 일제강점기 말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로 모진 고문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유명한 부흥사이자 병자를 치유하는 목사로서 널리 알려졌다. 8·15광복 이후 북한에 남아서 교회활동도 제대로 못하던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고 국군이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자 교회로 돌아가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10월 14일 50여 명의 신도와 함께 새벽기도를 하다가 일부 신도와 함께 공산군에게 총살되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2) 이용도(李龍道 1901. 4. 6 황해 금천~1933. 10. 2 함남 원산) 
호는 시무언(是無言). 금천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24년에 개성 한영서원(지금의 송도고등보통학교)을 졸업했다. 한영서원 재학시절 3·1운동 및 기원절 사건(1920), 불온문서 사건(1921), 태평양회의 사건(1922) 등으로 수차례에 걸쳐 복역했다. 그 후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인 A. W. 왓슨 선교사의 추천으로 서울 협성신학교 영문예과에 입학, 1928년 졸업하여 강원도 통천읍 교회에서 목회생활을 시작했다. 1930년 9월 목사 안수를 받고 이듬해 6월 서울로 파송되어 순회부흥사로 헌신했다. 이때부터 평양중앙교회를 비롯하여 전국에 걸쳐 교회부흥에 힘썼으나 무교회주의자로 몰려 장로교의 황해노회에서 금족령(禁足令)을 받기도 했으며, 1933년 9월 장로교 총회로부터 한준명· 이호빈· 백남주· 황국주 등과 함께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다. 1933년 2월 해주 남본정교회를 끝으로 부흥회를 마감했다. 그는 특히 교인과 교회의 회개 및 조선교회의 각성을 촉구했다. 1933년 6월 평양에서 '예수교회'가 창설되어 초대 선도감으로 선출되었으나 지병인 폐결핵으로 33세의 일기로 소천하였다. 그에 관한 저서로는 변종호 목사가 편집한 이용도목사서간집(1934)· 이용도목사전 등이 있다. 이용도 목사는 신학자(神學者)가 아니었으며 어떤 신학적 저술을 남긴 것도 없다. 오로지 그의 인생을 설교와 전도하는 삶으로 보냈던 인물이었고, 더욱이 그의 생애가 너무나 짧았기 때문에 그의 체계적인 신학 사상을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실질적으로 매우 불가능하지만 그가 한국교회에 남긴 족적은 크다 하지 아니할 수 없다. 

 
3) 이성봉(李聖鳳 1900-1965) 
영적각성과 부흥운동을 통해서 한국교회 성장에 크게 기여한 이성봉 목사는 성격이 쾌활하고 마음이 넓어 포용력이 큰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개 교회 목회 보다는 전국교회를 목회의 대상으로 전도 사역을 하는 것이 그의 꿈으로 교회마다 부흥시키고 큰 역사를 일으켰으나 그의 전도의 꿈은 개교회가 아니라 전국교회였다. 1937년 성결교단 총회에서 전국교회 순회 부흥목사로 임명받은 이후 생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부흥사로 헌신하였다. 그는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교육 아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고, 6세에 기독교에 입문한 뒤 유년기부터 기독교 신앙과 접맥되어 성장하였지만, 21세 되던 해에 그에게 찾아온 이름 모를 병마였다. 이 일로 그는 6달간을 평양 기흘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그 기간 동안 그는 인생과 죽음에 대해 비로소 깊이 있는 사색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관조는 이성봉 자신의 불우한 처지로부터 나온 자기 부정적 의미가 적지 않으나, 후에 그의 사역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만 가치를 두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1903년부터 일기 시작한 신앙부흥운동은 1904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사경회, 길선주 목사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처음 시작한 새벽기도회, 1907년 W. N. 블레어 목사의 평양부흥회 등으로 이어졌으며, 이당시 부흥회는 사경회의 형태로서 대표적 부흥사는 길선주· 한석진 목사였다. 서울· 의주· 만주에 걸쳐 전국적 운동으로 확산되었던 1907년의 대부흥운동 이후 '105인 사건' 등 일제의 탄압으로 교회는 일제에 대한 직접적 투쟁보다는 성령운동에 치중했으며, 김익두 목사 등이 활약했다. 
 
1920년대에는 교파가 독자성을 띠게 되었으며, 1930년대에 들어서는 극단적 신비주의가 형성되던 시기로 이용도 목사가 대표적 부흥사라고 하겠다. 이용도 목사는 1930년 장로교 황해노회에서 금족령을 받기도 했으며 1933년 9월에는 장로교 총회에서 이단시되기도 했다. 
 
1940년대는 교회의 쇠퇴와 더불어 부흥운동도 침체에 빠졌다. 또한 8·15해방 이후 남북으로 갈라진 교회는 커다란 위기를 맞이했다. 이때 교회의 화합을 목적으로 이성봉· 박재봉· 전재원 목사 등이 부흥운동을 벌였으며, 이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집회 등 각종 큰 집회로 한국 교회 부흥운동은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1964년 김활란의 초교파적 한국 복음화 운동과 이듬해 11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규모 부흥집회, 순복음교회의 부흥회 등은 부흥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부흥사는 한경직· 김준곤· 신현균· 이만신· 정석홍 목사 등을 들 수 있으며, 
 
1971년 부흥사들이 신현균목사를 중심으로 1977년 여의도에서 민족복음화대성회가 열렸으며, 1980년 세계복음화대성회를 개최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고, 민족해방 50주년이 되는 희년에는 95민족통일희년대성회를 홍재철목사를 중심으로 갖기도 했다.  
 
현재 대부분 개신교 교회에서는 연중행사로 부흥회가 열리고 '부흥회적 목회'를 시도함으로써 교회성장을 가져왔으나 사이비 종파 부흥사들의 집회와 일부 부흥사들의 윤리적 문제로 물의를 빚기도 했으며, 초기 개신교 교회가 가졌던 민족구원과 사회구원을 무시한 내세적·기복적 신앙 일변도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균형을 잃게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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