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길들이다, 길들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조금 불편하다. 하지만 <어린 왕자>에서 왕자와 사막 여우의 대화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한 이 표현이, 원초적으로 상대를 자신에게 익숙하게 만드는 관계를 정의하는 데는 가장 직설적이고 정확하지 않나 싶다.

그러나 길들인다는 표현이 오해하게 만들기 쉬운 것은, 일방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엔진을 길들이기 위해 차를 사면 고속도로에서 악셀레이터를 충분히 밟아준다든지, 요리사가 손에 맞게 칼을 적당히 갈아둔다든지 할 때 길을 들인다고 한다. 물론 가장 흔히 쓰는 경우는 애완동물이 자기 말을 잘 듣도록 훈련시키는 경우일 것이다.

모두 자신보다 차원이 낮거나 의지가 없는 존재를 쓰기 편하게 만드는 것을 주로 길들인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의 <남자친구 길들이기> 같은 자극적인 제목도 자기 위주로 자신이 다루기 편하게 만들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아주 오래 전 코미디극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조선시대, 대가족에 새로 시집온 아내가 너무 깐깐하고 잔소리가 많아 신랑이 고민하자, 여자는 초장부터 길을 잘 들여야 한다며 누군가 조언을 해주는데, 아내가 잘 때 물을 한 바가지 이부자리에 부어 놓으라는 것이었다.

밤에 몰래 일어난 신랑이 미지근한 물을 가져다 이불에 흥건하게 붓는데, 다음날 아내는 일어나서 자기가 오줌을 싼 줄 알고 화들짝 놀란다. 남편은 덩달아 놀라면서 큰 소리로 이 사실을 온 집안에 외치려 한다. 아내는 싹싹 빌면서 제발 비밀로 해 달라고 애원하고, 남자는 너그럽게 부탁을 들어준다.

이후로도 신랑은 아내가 어른들 앞에서 자기에게 불리한 말을 하려고 하면 "당신 그때 그날 밤에..." 하면서 입을 열고, 아내는 신랑의 입을 틀어막으며 뭐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한다. 작전에 성공한 남편이 평생 목에 힘주고 살았다는....

물론 웃자고 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누구나 상대가 뜻대로 되지 않고 너무 다루기 어려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길을 들이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이런 방법까지는 아니어도 우리는 늘 이기고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상대의 단점을 면밀히(?) 연구하고, 내게 한 말 속에서 논리의 맹점을 발견하려 애쓰며, 공략할 만한 취약점이 무엇인지 골똘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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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남을 길들이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상대방은 이쪽에서 보면 야생마와 같아서, 내 말을 알아듣게 만들기가 어렵고 내 뜻대로 잘 되지도 않는다. 잘못 하면 오히려 휘둘려서 야생마의 뒷발질에 얻어맞기도 하고, 제압하려다 거꾸로 질질 끌려다닐 수도 있다. 누가 아무리 애쓴다 해도 결국은 기가 센 쪽으로 분위기가 흐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은, 상대방을 길들일 의도가 없을 때도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길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언가 요구하고, 명령하고, 부탁하는 것만이 길들이는 것은 아니다. 무심코 하는 내 모든 말과 행동, 평소 습관, 크고 작은 약속, 이따금씩 드러나는 사고방식 등이 모두 상대방을 길들이는 요소가 된다. 왜냐하면 그런 요소들에 맞게 상대방은 계속 대처하고 반응하며 사고하면서 변해가기 때문이다.

어떤 연인들이 자주 싸운다 치자. 여자는 자주 토라져서 헤어지자고 먼저 말하고 떠나간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제풀에 지쳐 돌아와 미안하다고 말하고 화해한 뒤 다시 만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다음에 다툴 때 남자는 점점 조심하지 않게 된다. 그 만남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도 또 돌아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잦아져서 여자가 돌아오지 않으면, 남자는 멘붕에 빠진다. 여자에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길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약속을 깬 것은 아니지만 책임이 있다. 연인의 모든 행동은 사랑하는 사람을 길들이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부부싸움도 마찬가지다. '칼로 물 베기'라고 가볍게 여겨 자꾸 싸우다 보면, 어차피 원상복귀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서로가 그토록 싫다고 하는 행동도 다시 되풀이하고, 조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런 부부는 속으로 곪는 줄 모르는 채 계속 하던대로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한다.

상대방을 좋은 쪽으로 만드는 것도 길들이는 것이지만, 나쁜 습관을 들이는 것도 길들이는 거다. 부정적 학습효과는 이후에 다가올 고난에 대비하지 못하게 만든다. 마치 양치기 소년의 외침처럼 잘못된 학습이 진짜 늑대를 막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치인은 믿지 못할 자들, 정부는 늘 헛발질에 제대로 된 외교를 하지 못하는 조직이라는 학습효과가 있으면 오래간만에 제대로 일을 해도 속이는 줄로 아는 국민들이 많아진다. 아무리 좋은 쪽이라 해도 익숙하지 않은 것에는 반발하기 마련이다.

늘 비슷한 수준의 남자나 여자를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버겁고 부담스럽다.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거나 비상식적인 부모 밑에서 전쟁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멋진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 남자는, 여자는 다 그렇고 그런 것이기 때문에 인격적이고 상식적인 신사와 숙녀는 세상에 없을 것이며, 있다 해도 내 차지는 아니라고 단정한다. 안타깝게도 관념이 잘못 길들여진 것이다.

사람은 고양이를 길들인다고 생각하지만, 고양이는 주인이 자신에게 길이 들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분명히 사람이 주인이지만, 누가 주인인지 모르게 사람이 끌려가는 경우도 많아서, 고양이 주인들을 '집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어디에도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3

길들인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잘못 길을 들이거나, 길이 들면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에 큰 방해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조심스러운 진짜 이유는, 어린 왕자에 나오는 것처럼, 자기가 길들인 것에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크게 다투거나 파경을 맞이할 때 자주 변명하고 항변한다.

-나는 그렇게 말한 적 없다.
-누가 그렇게 생각하라고 시켰냐.
-그런 뜻을 비춘 적이 없는데 그리 알았다면 오해한 사람 잘못이지.
-그건 혼잣말이었는데 누가 들으랬냐.
-왜 멋대로 내 생각을 넘겨짚느냐.
-안 맞으면 당신이 나가라.

등등. 그러나 은연중에, 무의식중에, 부지불식 간에 사람은 누군가를 길들이는 것이다. 모든 일, 모든 행동은 무언의 약속이나 마찬가지다.

성경 내용에 익숙한 서양 사람들은, 자기에게 책임이 없거나 관심 없는 일에 대해 누가 물으면 "Am I my brother's keeper?" 라는 관용구로 답한다고 한다. "내가 알게 뭐야?" 라고 하는 식으로 속담처럼 쓰는 말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다 아시면서 물었을 때 답한 말이다(창 4:9).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형에게 동생의 행방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가인은 뻔뻔하게 하나님 앞에 반문하고 있다. 가인이 겸손히 대답해야 할 이유는 무수히 많다. 동생을 죽인 것 외에도 자신이 형이라는 이유만으로, 또 조금 전까지 들에 함께 있었던 자로서도 대답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도 마치 가인처럼, 연인과 배우자에게 직간접적으로 지닌 책임을 잊은 채, 자주 "내가 알게 뭐냐" 라고 반문하지는 않는가. 함께 시간을 보냈으면서, 혹은 자신 때문에 고통을 겪게 해 놓고, 알게 모르게 실컷 길들여놓고서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모든 인간관계가 마찬가지다. 함께한 시간은 다 서로를 길들인 시간이다. 그렇게 함께한 시간만큼의 책임이 모두에게 있다. 매일 일정 시간 고양이에게 밥을 준 집사는 그 시간에 집에 돌아올 책임이 있고, 고양이는 그런 집사에게 가끔은 도도한 발톱을 감출 의무가 있다. 그래야 그 관계가 아름답게 오래간다.

사막 여우는 왕자에게 말했다.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장미를 위해 소비한 시간 때문이라고. 왕자와 장미는 그 시간 동안 서로에게 길이 든 것이다. 하지만 서로에게 책임이 있음을 각기 다른 별로 떠나간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길들인 시간, 길이 든 시간을 기억하자. 그것은 지금은 잘 실감하기 어려워도 자신에게 책임이면서 또 커다란 특권임을 알아야 한다. 있을 때 잘하자.

김재욱 작가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외 30여 종
www.woogy68.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