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박사
 김형태 박사

대화(Communication)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매개 수단이다. 말이 안 통하면 관계가 맺어질 수 없다. 사람(人)의 말(言)을 합하면 신뢰(信)가 된다.

 

신뢰가 확보되지 않으면 말을 주고받는다 해도 입에서 귀로, 귀에서 입으로만 오가는 겉돌기 대화가 된다. "通則不痛 不通則痛(소통이 되면 고통스럽지 않고 소통이 안 되면 고통스럽다)". '상담'(相談)의 상(相)은 인간관계요, 담(談)은 의사소통을 가리킨다. 다음 사례를 들어보자.

J 신문사 O 기자네 집은 다섯 남매다. 모두 출가했지만, 우애가 좋아 식구들이 종종 모이곤 한다. 그날도 식구들이 모여 이것저것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그만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모처럼 형제들이 모이면 아이들 교육 이야기부터 시작해 온갖 것에 대한 이야기꽃이 만발한다. 그런데 그렇게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조금 전까지 함께 계시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조용히 혼자서 방으로 들어가 버리신 것이다.

"우리끼리만 너무 시끄러웠나?" 큰아들이 먼저 아버지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아버지 눈치를 살피며 맥주나 한 잔 하시자고 청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마다하셨다. 이런 적이 없으셨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뭔가 마음이 상하신 게 분명하다 싶으니 형제들 간에 떠들썩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고 말았다.

아버지 방에서 나온 큰아들이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 바둑 두자고 하셨는데 안 둬서 화가 나셨나?" 작은아들도 거들고 나섰다. "아까 집값 얘기를 나눌 때 자꾸 엉뚱한 말씀만 하셔서 모르시면 가만히 계시라고 했는데 그때부터 조용하셨거든. 그것 때문에 화나신 것 같아."

그러자 큰딸도 한마디 했다. "아니야. 아버지 방에 새로 산 점퍼가 걸려 있길래 애들이나 입는 걸 사셨다고 뭐라 그랬거든.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기분이 상하신 것 같아요."

며느리도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 때문인가 봐요. 애한테 사탕을 주시길래 제가 깜짝 놀라서 말렸거든요. 요즘 치과에 다니고 있어서 그랬는데, 너무 정색하고 말씀드렸나...." 작은딸도 거든다. "실은.... 조금 전에 아버지가 자꾸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셔서 그냥 부엌으로 가버렸거든요. 그래서 속상하셨나 봐."

형제들의 근심 어린 자책이 이어졌지만, 어떤 이유로 아버지가 토라지셨는지 정확한 답은 얻을 수 없었다. 그저 다섯 남매가 한꺼번에 아버지 방에 우르르 몰려가 사과와 애교를 섞어 기분을 풀어드리는 것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웃음만 보이셨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날 왜 방에 슬그머니 들어가셨는지 그 이유는 아직도 O 기자에게 미스터리로 남아있다고 한다.

이제 위의 사례를 참고한다면, 나이 드신 부모님과 대화를 나눌 때는 조금 더 섬세해져야 할 것이다. 무심코 던진 말이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행여라도 "그것도 모르세요? 모르시면 가만히 계세요" 라는 말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가뜩이나 외로운 마음에 서러움까지 느끼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맞장구치기, 지루해도 끝까지 들어주기, 종종 짜증도 내고 때로는 부딪쳐보기, 부모님의 옛이야기를 귀 기울여 가슴으로 들어보기 등이 노부모님과의 대화 요령이 될 것이다.

노인들은 대화 중, 흔히 쓰는 단어가 있다. '돈'이 많이 나오면 돈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신 것이고, '가슴이 아팠다' 하면 마음에 상처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부분에 집중하여 듣다 보면 마음 속에 무엇이 맺혀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상처를 드리는 대화가 아니라, 맺힌 한을 풀어드리는 대화법을 연구·개발해야 한다.

노인들은 젊은이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대화하고 도와드리는 배려와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는 이런 경우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김형태 박사(한남대학교 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