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교수(단국대 석좌교수)가 매주 조선일보 주말판 'Why'에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는 가운데, 19번째로 故 한경직 목사에 대한 기억을 소개했다.

김 교수는 "한경직은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으로 장로교에 입교해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해 9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와 설교를 하는 단순한 생활을 되풀이했다"며 "그가 관련한 사회사업 단체나 교육기관은 수십 군데였지만 어느 하나도 한경직의 기도하는 삶을 방해하지는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신의주에서 목회할 때부터 고아들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그는 서울에 와 영락보린원을 만들었다. 국군의 힘이 막강해지자 그는 군 복음화 운동을 시작했고 대광고를 신설해 오랜 전통을 지닌 배재 못지않은 기독교 사학으로 키워냈다"며 "그는 기독교 교육 이론가는 아니었지만, 기회만 있으면 학교를 세워 집안 형편 때문에 교육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기독교적 교육을 하려고 노력했다"고 전했다.

김동길 교수는 "한경직의 꿈은 영락교회 하나를 큰 교회가 되도록 키우는 일이 아니고 전국 교회, 나아가 전 세계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하나 되기를 바라는 큰 마음이었다"며 "그는 신앙생활이 감성에만 치우치면 잘못될 가능성이 많다며 신앙이 이성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교인들에게 당부했다. 그는 성경에만 몰두하지 않고 미국의 타임지와 내셔널지오그래픽을 정기 구독하면서, 시국의 변화나 자연과 과학의 세계에 대해 마지막까지 큰 관심을 가졌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미국의 목사 빌리 그레이엄이 받은 템플턴상을 한국의 한경직도 받았다. 빌리 그레이엄과 견줄만한 한국의 교역자가 한경직"이라며 "그는 남한산성 안 조그만 방에서 조그만 침대에 누워 노년을 보냈다. 주변 사람들은 몇 년 더 살 수 있었다고 믿었건만, 그는 자다가 그 좁은 침대에서 방바닥에 떨어져 입은 상처 때문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주변 사람들은 애석해한다"고 했다.

그는 "영락교회는 이 나라 대형교회의 효시였으나, 그 뒤에 생긴 대형교회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가 그 교회를 시무하는 동안은 교회에 분쟁이 없었다"며 "자기 이름으로 된 집 한 채를 가진 적이 없고 땅 한 평을 가진 적이 없고 은행 통장도 가진 적이 없었다고 들었다. 그는 추문에 휘말릴 필요가 없는 깨끗한 성직자였다"고 비교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를 탐험한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에게 '당신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묻자, 리빙스턴이 답하기를 '나는 오늘 아침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하고 한 마디 하더라는 것"이라며 "한경직은 매일 그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웃을 사랑하려고 몸과 마음과 뜻을 다했다. 나는 한경직을 오늘도 생각하며 예수가 인류 역사에 나타났던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할 따름"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