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봉랑 선교사와 김광석 총회장. 김 총회장이 4대째 믿음의 가문에서 총회장직까지 감당한 데에는 어머니의 든든한 기도가 있었다.
(Photo : 기독일보) 허봉랑 선교사와 김광석 총회장. 김 총회장이 4대째 믿음의 가문에서 총회장직까지 감당한 데에는 어머니의 든든한 기도가 있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듯싶다. 아들을 보니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짐작이 간다는 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어머니를 보니 아들이 어떤 사람일지 짐작이 간다는 말일 수도 있겠다. 세계예수교장로회(WKPC) 총회장인 김광석 목사(라운드락장로교회, 텍사스)의 어머니 허봉랑 선교사는 아직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1938년생인 허 선교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부흥사로 그 이름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결혼 전이던 22살, 중병으로 인해 생사를 오고 갔지만, 3일간의 금식 기도 후에 성령의 불을 받고 완전히 치유됐다. 그때 죄를 태우는 듯한 송장 타는 냄새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 후로 신학을 공부하고, 지난 60년 동안 1만여 교회와 교도소, 선교지, 고아원, 양로원, 기도원, 기치촌 등에서 사역했다. 1980년 이민 후에는 남가주 엘시노에서 헐몬산기도원을 15년간 섬겼다. 남편인 故 김일국 목사는 헐몬산 기도원장을 맡아 헌신했고 지난 2007년 77세로 천국을 갔다.

허 선교사는 8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미주와 중국, 일본, 러시아, 동남아시아, 남미 등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으며 한국 기독교 역사의 대표적 여성 부흥사로 족적을 써 내려가고 있다.

그는 60년간 사역할 수 있었던 비결을 ‘긍정적 생각’ 덕분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시니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이다. 고령에 집회를 인도하고 나서 몸이 안 좋을 때에는 ‘하나님이 낫게 해 주신다’고 믿고, 혹시 좀 오래 아프면 ‘죽으면 천국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겸손하다. 신학을 공부한 후에도 끝내 목사 안수는 받지 않았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 가운데 후회되는 일 한 가지가 바로 2년 전 위클리프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일이다. 자신은 학위수여일 당일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됐다. 미리 알면 반드시 거절할 것을 안 김광석 목사가 학위수여일 새벽예배를 마친 후에야 어머니께 말했다고 한다.

허 선교사는 아들 김광석 목사에 대해서는 “성격이 원만하고 밝으며 검소하고 매사에 긍정적이고 소탈하다”고 칭찬했다. 또 “밤을 새가며 열정적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는 신실한 목회자라서 기쁘다”고 말했다. 그러나 단 한 번 속을 썩인 일도 있었다. 김 목사가 교단 총회장이 될 때다.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짐이죠. 교회에 소홀할 수도 있고 명예 때문에 욕심이 생길 수도 있지…”라며 말끝을 흐린다. 그러나 김 목사의 임기가 이제 거의 끝나가지만 허 선교사가 우려했던 일은 기우로만 그치는 것 같아 다행이다.

허 선교사는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라고 강조했다. 또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하며 “미국에 오래 살면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잊기 쉽지만 순교의 피로 세워진 조국을 잊지 말고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