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이집트 탈출 심재엽 파스칼
(Photo : ) 출처:이집트 탈출 심재엽 파스칼

 

 

안녕하세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그리스도가 오시지 않았던 구약 시대에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분은 그리스도의 모형인 제사를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시고, 어떤 분은 오실 예수님을 소망할 때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두 가지 대답은 모두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답변]

구약 구원에 관한 두 가지 애매한 해석

맞습니다. 질문자님께서 느꼈던 대로 두 가지 답변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충분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선 구약 성도들 중 누가 구원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위인들만 구원 받았습니까? 그럼 숫자가 너무 적지 않습니까? 그들의 믿음은 물론 대단했지만 자칫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하나님의 일에 크게 쓰임 받았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렇다 치고  구약 시대의 평범했던 일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모형인 제사를 통해 구원 받았습니까? 그럼 구약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다 구원 받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순종과 자비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제사 드리는 백성 중에 그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바로 선 자를 구원했다면 모를까 단순하게 율법의 제사 제도가 구원의 통로였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 의미와는 다릅니다. 그리고 구약 백성들이 과연 제사 드릴 때에 제사 제도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확신 아래 드렸는지도 의심스러운 것 아닙니까? 

나아가 주전 622년경 남쪽 유다 왕국의 요시아 왕 때에 "대제사상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왕하22:8)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완전한 모세 오경 즉 율법을 갖고 있지 못해 제대로 된 제사를 아주 오랫동안 드리지 못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초막절의 경우 여호수아 시대를 제외하고는 바벨론 포로 귀한 후에야 처음으로 율법대로 지켰습니다.(느8:14) 그런데 그 포로기 이후의 제사마저도 말라기 선지자가 한탄한 대로 더러운 떡, 저는 것, 병든 제물을 바쳤습니다.(말1:7,8) 따라서 율법의 제사 제도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설명은 맞지만 그 제도를 통해 구원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포로 귀한 시절 훨씬 이전에 사역했던 엘리야 선지자가 탈진해 있을 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19:18) 아합과 이세벨 같은 하나님의 대적들이 폭정을 펼 때에 엘리야처럼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오직 여호와만을 믿어 바알에게 절하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이 칠천 명은 제사와 상관 없이 하나님이 구원해 준 자들이었습니다. 이 때  칠천 명은 당시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자가 자기 뿐이라고 생각했던 엘리야에겐 아주 큰 숫자이지만 전체 인구 수로 따지면 아주 적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위인들 정도로 극히 제한된 사람만 구원 받은 것은 아닙니다.  

또 예수님을 소망한 자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도 너무 불분명합니다. 구약 백성들이 메시야에 대한 소망은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믿어야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진리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또 메시야에 대한 소망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발전되어 가다가 바벨론 포로기 시절 이후에 완전히 견고하게 형성되었습니다. 따라서 구약 백성들은 예수님이라는 역사적 개인에 대한 소망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복음의 핵심은 잘 모르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감당하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의 문자적 의미에만 너무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구약 백성들이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알 수도 없었는데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었을까라는 의심이 당연히 생기게 마련입니다. 또 그것을 해명하는 과정에서도 여전히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 얻는다는 명제를 가능한 건드리지 않으려다 보니까 질문자님이 지적한대로 자꾸만 뭔가 석연치 않게 됩니다. 
    
그럼에도 성경에는 분명히 예수를 소망해서 구원 받는다는 명시적 기록이 있습니다. 또 실제로 예수를 믿은 자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일반 신자들이 실존했던 인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 더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고는 이 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성경이 구약 백성의 구원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는 대표적인 세 부분을 차례로 살펴 본 후에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본질적인 의미를 다시 따져 보고 결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율법 없이 망한 자-로마서에서 말하는 구약 백성의 구원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2:12,13) 

예수님 오시기 전 구약 백성들의 구원 문제란 그리스도를 몰랐다는 측면에서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당신의 섭리로만 운행하시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은 민족이 유대인들을 제외하고 과연 있었겠는가 하는 논란의 소지는 있습니다. 만약 우상 숭배, 범신론, 다신론, 자연주의 신관 등을 가졌을 때는 원론적으로 구원에서 제외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일신 창조주 신관을 가졌던 유대인들 가운데도 하나님 앞에 배도하여 구원을 받지 못한 자가 있는 반면에 이방민족 중에라도 아무리 그 확률은 아주 낮지만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간 자가 단 한명도 없다고는 함부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바울 사도가 로마서 초반부 특별히 1:18-3:18까지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1장은 이방인의 죄를, 2:1-3:18까지는 유대인의 죄에 관해 설명합니다. 그 논쟁 중에 위에 예를 든 구절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 관한 원칙을 밝혀 놓은 부분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 혈통에 관계 없이 즉 율법을 소유하여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렸든 아니면 율법을 전혀 몰랐던 누구나 자신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죄가 없는 자는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구원을 주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을 제대로 지키고 이방인들도 선행을 하면 죄가 없어져 구원을 얻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2:14,15에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이 본성과 양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한 것 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은 것만으로 구원이 자동적으로 보장된다고 오해하지 말라는 것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오히려 이 단락의 결론인 3:9-18에서 바울 사도는 시편14:2를 인용하여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는 율법을 받고 지키려 노력한 유대인이든 양심과 본성으로 선을 행한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의에 만족할만한 의인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아무에게도 구원을 베풀지 않고 몽땅 심판하셨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살펴 보았습니다. 도덕적 죄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단 한 명도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되는 죄의 본질이 일차적으로 도덕적 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기준도 당연히 선행이 아니게 됩니다. 

로마서의 이 구약 백성의 구원에 관해 토론한 부분(1:18-3:18)의 바로 앞과 뒤의 구절을 살펴보면 흥미롭습니다. 먼저 앞부분 1:16,17에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만 그것도 인간의 공로 하나 없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구원을 준다고 했습니다. 

바로 뒷부분 3:19-22은 무엇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도는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해서 구약 백성의 죄를 논의한 이유는 구원이 왜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고는 이뤄질 수 없는가에 관한 근거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구약백성에 대한 구원의 원리는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도덕적 죄와 상관 없이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 당신의 주권으로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그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으로 가보기로 합시다. 

믿음으로 인한 구원 -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구약 백성의 구원

본장은 구원의 기준보다는 구약의 대표적인 신앙 위인들이 가졌던 믿음의 본질을 나타내 보인 내용입니다. 이장에 등장한 인물들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던 이스라엘의 남겨진 자 7천명 같이 구원 받은 일반인들과는 다릅니다. 미국 프로 스포츠에선 대기록을 남긴 자들이 은퇴하면 본인의 사진과 기념품들을 보관 전시하는 '명예의 전당(Hall of Fame)' 제도가 있습니다. 이들도 일종의 천국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라 간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물 앞에 '믿음으로'가 일률적으로 따라 나오듯이 구원 받은 기준은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가졌던 믿음의 공통점을 분석해 낸다면 구약 백성이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는가에 관한 기준을 추출해 낼 수 있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의 부모(23절), 모세,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30절, 유일하게 개인적 구원의 기준과 별개의 구절임), 기생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이 가졌던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겠습니까?  

한 마디로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자신의 전생애를 걸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믿음과 자기 생명을 맞바꾼 자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한 그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11:1)로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알고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는 것"(11:3)을 확신하였고 평생을 두고 그 믿은 바대로 실천한 자들입니다. 

아벨은 죽음으로 말했고, 에녹은 죽지 않고 천국으로 들리워졌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5절)였습니다. 노아도 백년 후의 일에 평생을 걸고 순종했으며, 아브라함은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도 못했지만 순종했으며 자기 생명보다 더 귀중한 외아들 이삭도 아무 주저 없이 바쳤고, 사라도 자신에게 득남의 약속을 주신이가 미쁘신 줄 알았고(11절), 모세의 부모마저 바로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23절)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들도 도저히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행위를 오직 믿음으로 결행했으며(30절) 마찬가지로 기생 라합은 동족을 배신하여 들키면 바로 사형을 당할 일도 하나님만 믿고 순종했습니다.(31절) 라합을 설명하면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순종이 심판과 구원의 기준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순종한다는 것이 어떤 율법의 계명을 종교적, 도덕적, 의무적으로 따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11:32이하 38절까지 설명되어 있는 대로 희롱과 채찍질 뿐만 아니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을 겁내지 않고 자기 생명을 하나님의 일과 맞바꿨다는 의미에서 순종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었기"(11:6)때문이었습니다. 

또다시 이 말씀에 대한 오해가 없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존재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그 분께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정도로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님을 알기에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이 당신만의 뜻을 당신의 방법과 때에 따라 이룰 것을 믿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조류와 풍조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는 정반대로 나아가기 때문에 보이는 것에 의존하여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전에 이 땅에서 상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천국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하여 자기 목숨마저 아끼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바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죽음으로 믿음을 드러냈고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10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 신앙 위인들의 공통점을 어떻게 정의 하고 있습니까?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을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3-16절) 모두가 이 땅의 나온바 본향보다 천국에 있는 본향을 더 사모하였기에 죽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히브리서에 열거된 믿음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으로 일컬음을 받는데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증거하면서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롬1:16)라고 했지 않습니까?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절하지 않는 자 칠천 명을 하나님이 남겨 두셨다고 했습니다. 천국의 본향을 사모하여 이 땅에서 평안을 포기한 자들이었기에 그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구약 백성의 구원의 기준은 현실의 평안에 목표를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평생을 살았는가 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구약 시대의 믿음의 위인들을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며 환영하며"(11:13)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39절에서도 같은 내용을 되풀이해서 강조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가나안 입성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은 받았지만 직접 차지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입성 이후의 사람들도 많이 포함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약속은 궁극적으로는 구약 백성들이 메시야를 기다리는 소망은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과 그 실현을 눈으로 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장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40절)는 말씀으로 결론지어졌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선 신약 성도들에게는 더 좋은 것 즉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 성취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구약 성도들이 구원 받은 것도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베풀어주신 구원의 원리와 계획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신약 성도가 믿음으로 십자가 구원에 참여하듯이 구약 성도도 구체적 약속은 받지 못하였지만 믿음으로 동일한 성격의 구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결과적으로 구약 성도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몰랐지만 예수를 믿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를 믿은 아브라함 - 예수님이 말하는 구약 백성의 구원     

그런데 성경은 놀랍게도 구약 성도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 받았다고 명시적으로 그것도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통해 밝혀 놓았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2-56)

예수님이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말씀하시자 그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왜 우리가 자유케 될 필요가 있느냐고 반발하면서 시작된 논쟁의 결론 부분입니다. 이 논쟁의 초점은 결국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 즉 하나님에게 구원 받을 수 있는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므로 더 이상 구원의 절차가 따로 필요 없다는 것인데 반해 예수님은 "내 말에 거하면-예수를 믿으면- 참 내 제자가 된다"(8:31)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아예 너희의 선조 아브라함(주님 오시기 2천년 전 인물)도 당신을 믿었고 보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뜻이 아브라함이 메시야 되신 당신을 실존 인물로 직접 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도 구체적인 복음의 진리를 신약 서신서에 나오는 식으로 정리된 내용으로는 알지 못했으며 알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볼 것이라고 하지 않고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그 때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후손을 통해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고 실제로 그 약속이 외아들 이삭을 통해 이뤄질 것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6-18) 아브라함은 백 살에 자기 몸에서 난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에 전혀 주저하지 않고 순종하며 바쳤습니다. 그가 칼을 들고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은 이삭 대신에 번제할 제물 어린 양을 미리 준비해놓으셨고 그 후 바로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당신의 때를 기다리다가 보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약속을 먼저 받고 그 약속이 실현되는 것도 나중에 보았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받은 것과 실현된 것 사이에 시차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창22:17에 따르면 이삭을 바쳤더니 처음으로 메시야 약속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불려 나왔을 때에 벌써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2,3)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 즉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의 시발점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며 그가 이루는 큰 민족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된다는 약속은 이 때에 이미 받았습니다. 그는 이 때부터 믿음으로 자기 후손을 통해 어떤 큰 구원의 역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소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삭을 바친 후에는 하나님은 분명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22;16,17)라고 '네 씨'라고 구체적으로 밝혀주었습니다. 바로 이삭을 통해 메시야가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이삭을 바쳤더니 하나님이 이삭 대신 어린양 제물을 이미 준비해 놓으신 뜻을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먼 훗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구세주가 이삭의 씨를 통해 나올 것이라는 것을 이미 자기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믿은 것은 아니지만 이삭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때가 되면 나타나 전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에 드러난 구원의 진리

흔히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자꾸 선행과 공적과 대비한 개념만 강조해서 인간이 아무 하는 일 없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식으로 소개하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 교리의 문자적인 의미만 수긍하고 동의하여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따라 믿는 것과 예수님을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그 본질에서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 교리를 수긍하여 믿기로 한 것은 여전히 행위에 속합니다. 사고활동이라고 말하듯이 인간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도 몸이 행동(action)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정신이 활동(mental activity)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근본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구원의 진리를 믿고 실제로 자기의 전존재를 걸어 그 진리에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구원의 진리란 간단합니다. 우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당한 자 한 사람도 없는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어느 누구도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지 다 죄인이지 그래서 종교가 필요하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반성하고 기도해야지" 식의 상대적인 죄의 비교가 아닙니다. 절대적이고도 개인적인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도저히 어떠한 선행, 공적, 자격, 능력과 심지어 회개나 믿음으로도 바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자각하는 것입니다. 자기야말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로 죽음 말고는 그 죄를 하나님 앞에 갚을 길이 도저히 없기에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대신해서(단순하게 자기를 위해서가 아님) 죽으신 것 말고는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 하는 길은 전혀 불가능했다는 것을 온전히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자기 옛사람은 완전히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지금껏 나는 무엇이든 내 힘으로 할 수 있고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인간 중심의 사고체계와 모든 가치관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확신하고 그렇게 살아 가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전존재 전삶 전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오직 선한 것은 하나님께로만 나오며 자기 스스로 뜻하고 게획하고 실현하는 것에는 하나도 유익하고 거룩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하고 그 분의 계명대로 따른다고 구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죄인 되었을 때 그것도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자기를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기고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한 그 자비와 긍휼 앞에 완전히 벌거벗고 나와 항복하는 것입니다. 전인격적으로 자신의 속이 그분의 보혈로 깨끗이 씻기어 완전히 뒤집히는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나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3-15)고 고백했습니다. 분명히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이 모든 구원 받은 자의 입술에서 저절로 동일한 강도와 열심과 진정으로 나와야 합니다. 사도라 우리보다 믿음이 더 좋아 할 수 있고 일반 신자는 안 해도 되는 고백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는 "무릇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롬6;3,4)된 자들입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새사람으로 거듭나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와는 전혀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꼭 선행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이제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삼아 그 분의 뜻에 생명을 걸고 자신의 뜻과 계획으로는 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어떤 이유입니까? 물론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불러내었고 하나님이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쪽에서 보면 오직 믿음으로 모든 인생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살았습니다. 이삭을 바치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그 믿음이 온전함을 보였습니다. 그가 한 어떤 선행이나 인간적 의로 하나님께 구원 받은 것 하나 없습니다. 세상에선 오히려 실패가 많았고 죄도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님을 하나님 다우심 그대로 믿고 따르고 반응했습니다. 

로마서에서도 아브라함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1-5)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 믿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어야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하고 예수를 믿기로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가 자신이 경건치 아니함에도 오직 하나님이 당신의 영원한 긍휼로 의롭다고 해 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가장 먼저 자신은 죄인이라고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 분께 나아가는 자는 그분이 모든 인생을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특별히 이 땅에선 형통치 않더라도 이 땅의 장막이 아닌 돌아 가야 할 본향이 있음을 믿었기에 자기 생명마저 내어 맡기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를 믿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숱한 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큰 일을 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이미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자신의 전존재를 걸 수 있었기에 그런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그 순종함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그 일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신념을 가지고 큰 일을 했더니 하나님이 그 담대함을 보시고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이 먼저이며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엘리야 때의 칠천 명도 하나님이 남겨 두신 자들이었듯이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믿음을 심어 준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성도도 오직 예수를 믿은 자만이 구원 받았습니다. 역사적 실존 인물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드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를 인정한 자들입니다. 즉 자신의 의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으며 하나님이 전적으로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믿은 자입니다. 

이방인의 경우 그 확률은 아주 낮지만 완전히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하게 자복하고 믿음으로만 하나님과 동행한 자들은 구원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 예를 들어 한국에서 예수가 전파되기 전에 누가 구원 받았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당사자 본인과 하나님 만이 아십니다. 

사실은 예수님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교회 나가 로마서의 복음의 원리를 배워 수긍하고 믿기로 했다고 다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성령으로 거듭나서 자기의 전존재와 삶과 인생을 예수님께 내어 맡긴 자만 구원 받습니다. 누가 구원 받았는지 목사도 모를 수 있습니다. 당사자도 어쩌면 자신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만은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구원 주시기로 작정한 자는 다 믿게 되며 구원 받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구약 백성의 구원의 원리도 신약 시대의 구원의 원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바로 그 원리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그 구속의 원리가 점진적으로 조금씩 계시 되다가 때가 차매 십자가에서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 신약 시대에 살게 된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큰 축복입니다. 구약시대에 누가 어떻게 구원 받았을까에 관심 갖기 보다는 지금 과연 내가 주님 안에서 이 십자가 은혜를 제대로 누리고 있는지 항상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나아가 이제는 구원의 진리가 십자가 상에서 분명하게 눈에 보이도록 계시되었는데도 아직도 믿지 않는 자들을 더욱 불쌍히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시대의 누구라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출처:박진호 목사님 홈페이지  http://whyjesuson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