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우 목사.
(Photo : ) ▲이창우 목사.

 

 

성령은 오신다. 그분은 오는 데 실패함으로써 사람들을 기만하지 않는다. 성령은 사도들에게 오지 않았는가? 성령은 그들을 속였는가? 성령은 믿는 자에게 늦게 오셨는가? 성령은 오는 데에 실패함으로써 그들을 기만했는가?

아니, 성령은 오시며 성령의 선물을 가져오신다. 이것은 영과 생명이다.(요 6:63) 한 마디로 말해, 성령의 오심도 선물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여러 가지 선물(은사)를 가져오신다. 성령의 대표적인 선물이 있다면, 믿음, 소망, 사랑이다. 이 시간에는 믿음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성령은 무엇보다 믿음, 이 '믿음'을 가져오신다(고전 12:9).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죽음이 사이에 온 후에만 나타나는 성령의 선물이다.

우리 인간들은 말의 의미에서 대해 명확하지 않다. 가장 엄밀한 기독교적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종종 믿음이 아닌 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때가 있다. 따라서 믿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천부적인 재능의 다양성을 따라, 우리 모두는 더 강하거나 더 약하게 태어난다. 강할수록, 더욱 원기 왕성하고 저항에 대해 더 오래 버틸 수 있다. 이런 인내, 자기 속에 있는 이런 건강한 확신, 세계 속에, 인류 속에 있는 이런 확신, 이 모든 것과 더불어 하나님 안에 있는 이런 확신을 우리는 믿음이라 부른다. 그러나 더 엄밀한 기독교적 이해에 따르면, 이것은 믿음이 아니다.

확률을 믿는 것, 이것도 믿음이 아니다. 가끔 우리는 1백만 분의 일 정도의 확률만 있어도, 믿음으로 그 길을 간다고 말할 때가 있다. 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전혀 없는데도 하나님께 믿음으로 구하면 복권에 당첨될 수 있는 걸까? 승진할 기회가 거의 없지만, 믿음으로 구하면 승진할 수 있는 걸까?

우리는 가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믿음으로 구했더니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그런 확률, 그러니까 거의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 구하면 이루어주실 줄 믿고 그 길을 가는 것, 그것은 믿음일까?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확률 신'을 섬기는 것은 아닐까? 그가 믿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라기보다 확률이니까.

약 2천년 전 역사 안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상해 본다. 그분은 마치 거지와 같은 모습으로 계셨다.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아무 것도 갖고 가지 말라고 가르치셨던 분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실 때, 같은 모습으로 다니지 않았을까? 그런데 거의 거지꼴을 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 당시 과연 누가 이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어느 날 누군가 비싼 차에 명품 가방을 들고 나타나서 당신을 좀 쉬게 해주겠다 해도 믿기 어려운데, 거의 거지꼴을 한 사람이 나타나서 어느 날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다 오라고 하면 누가 가겠는가?

"아니, 정작 쉬어야 할 사람은 당신 같은데, 누가 누구를 쉬게 하겠단 말인가!"

아마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어느 날 경찰에게 신고가 접수된다. 도둑이 나타나서 모든 것을 다 훔쳐갔다는 신고다. 경찰이 급히 출동한다. 막상 현장에 가 보니, 신고한 사람은 거지였다. 경찰이 뭐라 말할까?

"아니, 자네가 거지인데, 무엇을 잃었단 말인가? 당신은 어차피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아닌가? 도대체 누가 무엇을 훔쳤다는 말인가?"

아마 그 당시에 주님의 저 말씀은 경찰이 거지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보다 더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6)."

그러나 당시에 아마도 실족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원래 '실족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σκανδαλίζω(스칸달리조)'라는 말인데, 우리말 성경에는 여러 의미로 번역되고 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마 26:31)."

그때도 제자들 중에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한다.

"다 주를 버려도 나는 언제든지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마 26:33)."

이때 쓰인 '버리다'는 단어가 헬라어로 실족하다라는 "스칸달리조"라는 말이다. 해석하자면 이렇다. "모든 사람이 다 실족해도 나는 절대로 실족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 이것이 베드로의 주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가? 베드로 역시 세 번이나 부인하고 주님을 떠났다. 결국 12제자 모두 믿음을 떠나 실족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베드로는 어떤 고백을 한 사람인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정말로 제대로된 믿음에 이른걸까? 상황이 이렇다면,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찬송하며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했다가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돌을 던진 군중 역시 실족한 것이 아닐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그 기적을 본 자들은 다 떠났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만 있을 때 말씀하신다.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그때 다 떠났던 자들은 주님을 보고 실족한 것이 아닐까?

믿음은 이해에 반한다. 믿음은 죽음의 이면에 있다. 당신이 죽을 때, 당신이 자신에 대하여 죽고 세상에 대하여 죽을 때, 당신은 또한 자신 속에 있는 이런 모든 직접적인 이해에 대해 죽었다.

이것은 당신 자신 안에 혹은 인간적인 지원 안에 있었던 모든 확신, 또한 직접적인 방식에서 하나님 안에 있었던 모든 확신이 전멸했을 때이다. 또한 이것은 모든 확률이 전멸했을 때, 모든 확률이 어두운 밤처럼 어두웠을 때이다. 이것이 진실로 우리가 서술하고 있는 죽음이다.  

바로 이때, 생명을 주는 영은 오시고 믿음을 가져오신다. 이 믿음은 온 세상보다 더욱 강하다. 이 믿음은 영원의 능력을 갖고 있다. 이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령의 선물이다. 이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다(요 5:4).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신은 넉넉히 이긴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