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교수는
(Photo : ) ▲김형석 교수는

 

 

"신앙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일이다. 주님을 대신해서 사랑을 베푸는 생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의 공존성이다(49쪽)."

김형석 교수는 신앙의 의미를 이처럼 간명(簡明)하게 이야기한다. 책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를 통해 김 교수는 철학적인 이야기도 적지 않게 풀어놓고 있다. 그는 "적지 않은 철학 책과 사상 서적을 읽으면서, 자연히 비종교적이며 반기독교적인 책들도 읽었다"며 "그러나 이상하게도 종교와 기독교를 비판, 거부하는 저서를 읽으면, 종교적 욕구를 더 강하게 느끼곤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쇼펜하우어나 니체 뒤에는 더 높은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고, 그것은 종교적 과제임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며 "그것들로 인간과 세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깊은 자아를 찾기 위해서는 반종교적이거나 비신앙적인 책을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책들이 내 신앙을 뒤흔들지 못했다. 종교는 철학적 과제라기보다는 인간과 삶에 관한 궁극적 관심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54쪽)"이다.

김 교수는 그런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같은 책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와 신앙적 해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기독교 신앙을 위해 도움이 되었고 지금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사상가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파스칼, 키에르케고어 등을 꼽았다. 이번 인터뷰는 '인문학과 기독교'에 대한 내용이다.

-기독교 안에서도 인문학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철학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이를 문제시하는 신부나 목사님들의 수가 너무 적기 때문에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먼저 이야기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인들을 '이중인격'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아닌 줄 알았지만, 저도 알고 보니 그랬습니다. 교회에 설교하러 갈 때는 기도로 준비했지만, 일반 대학이나 사회에서 강연할 때는 준비만 잘 하려 했지 기도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20-30년 전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느끼게 됐습니다. 그만큼 신앙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교인들보다는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더 걱정하고 사랑하신 분 아니었습니까? 그러면 제가 설교하러 갈 때나 강연하러 갈 때나 다같이 기도로 준비해야지, 교회 갈 때는 기도하고 바깥에 갈 때는 기도 안 하는 것은 이중인격이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교회에 가서 설교도 많이 하는데, 제 아내가 아이들보고 '아버지 강연하고 설교하시는데 왜 안 가냐'고 말합니다. 애들이 들으러 왔습니다. 그 애들이 뭐라고 했겠어요? '아버지가 설교하실 때는 좋은 말씀 많이 하시는데, 같이 살아보면 그렇지 못하다'고 했지요.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게 이중인격이지요. 목사님들이 그걸 생각 안 하시니, 점점 더 높은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의 잣대와 기독교의 잣대가 달라집니다.

더 위험한 것이 있습니다. 역사, 세계사는 하나입니다. 세계사를 보는 사람은 기독교 역사도 포함해서 봅니다. 하지만 교회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교회사만 따로 떼어서 봅니다. 그렇게 둘로 보니, 역사를 올바로 보지 못합니다.

영락교회에서 한때 대학생 성경공부반을 이끈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크리스천이 교만해지면 안 된다. 그 중 하나가 세상 역사를 보려면 밝은 눈으로 봐야 하는데, 종교라는 안경을 끼고, 거기에 기독교라는 안경을 끼고, 개신교라는 안경을 끼고, 장로교라는 안경을 끼고, 또 통합 측이라는 안경, 그리고 영락교회라는 안경까지 끼고 이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겠는가?'

더더욱 위험한 것이 있습니다. 1961년 강화에 간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생들이 '선생님, 신앙 좋은 사람은 대학에 가지 말아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보니, 미국에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유치원 때는 모두 하나님을 믿지만 초등학교 때는 90%, 중고등학교 때는 70%로 이것이 떨어지고,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는 안 믿는 사람이 60%가 되니, '안 믿고 지옥가느니 믿고 대학 안 가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중적입니다."

-이런 '이중인격'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요.

"아주 쉽습니다.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는 절대 그리스도만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예수는 인간 중의 인간입니다. 인간답지 못한 사람은 신앙을 못 가져요. 이해가 잘 안 가지요?

세상에서 봅시다. 원불교가 왜 생겼는지 아십니까?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불교 신앙을 가지니, 아이가 아프면 부처님에게 가서 '낫게 해 주십시오' 기도드립니다. 하지만 석가님의 뜻은 '그건 내가 하는 게 아니니 병원으로 가서 좋은 의사에게 치료받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래 불교는 부처님한테 빌라고 합니다. 그래서 (원불교가) 생겼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교육을 못 받은 사람에게는 신앙이 미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 예수를 모르니 그리스도도 모르는 것입니다. 목사는 됐을지 몰라요. 신학자는 공부하면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인간 예수를 모르면 신앙을 가지기 힘듭니다.

제 천주교인 친구가 프랑스에 기독교 연구하러 갔다가 불교도가 됐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예수님 마음이 석가님 마음보다 너무 좁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석가님은 인간들에 대해, 사회와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사는 그곳에서 책임을 느꼈다.' 그래서 예수는 헤롯왕을 욕하지 않고 악을 저주했습니다. 우리도 지금 핵문제를 이야기하는데, 핵무기를 만드는 죄악은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까 라인홀드 니버 이야기를 했는데, 니버는 하버드대 강의에서 '너희 선조들이 자본주의를 통해 부자가 됐는데, 그걸 갖고 즐겁게 살자고 하면 아메리카에는 미래가 없다. 세계 가난한 나라에 자꾸 줘야 한다. 가난한 나라들이 잘 살게 되면 아메리카는 저절로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니버를 좋아합니다. 예수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국가도 소유욕에 빠져선 안 됩니다.

소유욕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저는 친구들 중에 신부도 스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목사님이 결혼하면 안 된다는 의견에는 반대합니다. 그렇지만 하나 목사님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스님들은 스님이 될 때 인간적인 욕심을 버립니다. 세상 떠날 때 스님들이 가져가는 게 없습니다. 그것이 출가(出家) 아닙니까. 신부들도 간혹 실수하는 건 있지만, 신부가 될 때는 가정이나 소유욕을 버립니다.

요새 교회에서 세습을 이야기하는데, 신부들은 상상도 못하는 일입니다. 우리도 그건 있어야 합니다. 결혼도 좋고 다 좋지만, 최소한 목사가 되려면 명예나 권력, 소유의 노예가 돼선 안 됩니다. 거기에 빠진 사람이 가르친다는 건 말도 안 되지요. 적어도 내 소유가 내 인생이라는 인생관을 가진 한, 목사가 돼선 안 됩니다.

우리 교회가 커진다고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교인이 많아졌다고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좋은 점보다 걱정스러운 점이 더 많습니다. 6·25 전쟁 때부터 사회는 위로 올라가는데 교회는 그 자리에 있습니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갑니다. 교회가 사회보다 높으면 예수님의 뜻이 사회로 흘러 내려가는데, 그 반대라면 예수님 믿는 분들도 사회에서 배워야 합니다."

연세대 철학 김형석 교수
▲김형석 교수는 "학문이나 철학보다도 종교 특히 기독교의 정신은 동서양을 구별하지 않는 과제와 영역을 개척해 줄 것이라는 희망적인 길을 열어준 것 같았다"며 "종교 특히 기독교는 서양이나 동양의 종교가 아니다. 인간의 신앙이며 인류의 종교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학문은 좁은 영역에서, 그러나 신앙은 넓은 세계에서'라는 사고에 나도 모르게 근접했던 것 같다"고 책에서 말했다. ⓒ김신의 기자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세계관으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몇 해 전 한 목사가 쓴 칼럼을 봤습니다. 미국 볼티모어의 한 목사님이 캘리포니아 지방에 여행을 갔다가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데,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지금 워싱턴 D.C.를 지나고 있으니 창밖을 보십시오. 국회의사당, 백악관, 펜타곤 등이 있습니다.' 볼티모어에 다 왔을 때 다시 내다보니 대학도 있고 병원도 있고 백화점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도드렸다고 합니다. '저는 이제까지 비행기 타고 내려다 봐도 보일 정도의 큰 교회를 생각했는데, 얼마나 주님 뜻과 어긋난 것인지 알았습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게 작아야 하고, 교인들을 국회의원이 되고 백악관, 국방부에서 일할 일꾼으로 만들어 보내기 위해 존재해야지 교회가 커지게 해선 안 된다는 걸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걸 모릅니다. 천주교가 그걸 거꾸로 해서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천주교는 예수님 말씀과 성경에 교리와 전통을 더하고, 교회법까지 만들었습니다. 기독교 정신과 맞지 않았지요. 그런데 인문학, 철학과 문학과 역사학이 나와서 '그게 아니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몰아낸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교리화한 구약과 신약을 인문학이 몰아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잘못됐기 때문에 몰려나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잘못됐다 잘됐다는 차원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답하겠습니다.

둘째로, 프랑스 혁명입니다. 그 당시 풍자만화를 보면, 바짝 마른 농민이 지게를 지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피둥피둥하게 살찐 세 사람이 올라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족, 귀족, 신부였습니다. 밑에 이렇게 써 있지요. '이 가난한 농민이 견딜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꺼내놓은 것이 자유·평등·박애입니다.

기독교 정신이 무엇입니까? 자유·평등·박애입니다. 이것 없는 기독교는 필요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 못하는 기독교는 버림받아야지요. 이것을 버린 것이 천주교였습니다. 그걸 밀어낸 것이 인문학이었지요.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위해 모든 걸 주신 분입니다. 그러면 프랑스 혁명과 다른 게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인간을 사랑하고 이성과 자유의 가치를 최고로 여깁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와 가치로는 개인의 구원도 없고 역사도 불행해지니, 하나님 뜻을 받아들여 인간의 가치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문학보다 더 높은 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신부님 2명이 천주교를 전파하다 붙잡혀 사형 집행을 당하게 생겼습니다. 일본 관리가 '여기 있는 예수님과 마리아 성상을 네 발로 밟으면, 저기 물에 빠진 두 사람을 건져주겠다'고 합니다. 신부가 성상을 보면서 '주님, 저 두 사람을 버릴까요, 성상을 밟을까요'라고 하니, 성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이 '밟으라'고 합니다.

밟으면 그는 신부 직위에서 떨어집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가 떨어지면 파문에 해당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그게 휴머니즘이지요. 하지만 신학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목사님들은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고 묻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말을 못하지요. 그건 목사님들이 만든 말이지, 세상에 그런 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인데, '하나님 없는 인간, 인간 없는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바울이 기독교 신앙을 가장 정확히 말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 인간다움입니다. 인간답지 못한 인간은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히틀러는 하나님 자녀가 못 됩니다."

-말씀대로 교회에서 듣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크게 성공한 한 목사님이 어떤 신문에서 교회 성장 비결을 물으니 '살아서는 전도하고 죽어서는 천당가고, 이 둘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걱정하지요(웃음).

요새 선교사들 많이 보내는데, 예수님 말씀에서 교리를 강요하기보다 봉사하고 교육을 해 주고 병원을 지으며,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라고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전도를 봉사라고 생각해야지, '너희들은 안 믿으니까' 위에서 베푸는 것처럼 해선 안 됩니다.

이건 세상 이야기인데, 미국 카터 전 대통령이 가장 신앙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우리나라에 왔다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마지막 말로 '예수 믿어야 합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갓뎀(God damn)'이라고 했답니다(웃음).

카터가 무슨 실수를 했는가? 신앙은 소중한 선택입니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부족하다 해도, 권고하듯 하는 건 인격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그걸 보고 신앙이 좋다고 하는 것은 너무 교회적이 아닌가 합니다.

간음한 여인 이야기 같은 것이 왜 소중합니까? 인간의 공감대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휴머니티(humanity)를 알아야 합니다. 공감대 없이 자꾸 이야기하면 실패합니다.

유명한 목사님이 한인교회 목회 시절, 고교생 딸이 마리화나 피우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 시절 미국에선 그 나이대 아이들이 다 그럽니다. 그런데 이 완고한 목사님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책망했습니다. 이 아이가 자살해 버렸습니다. '친구들이랑 다니다 그랬구나. 그거 좋은 게 아니야. 한국엔 없고 여기에나 있는 거다' 그 정도면 되는데, '너 크게 죄 지었다'고 하니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요. 딸을 자살하게 만들었으니 잘못한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