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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공포를 이긴 순교’ 그의 영혼을 흔들다

기독일보 김진영 기자

입력 Feb 06, 2018 07:04 AM P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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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극적 회심’ 이정훈 교수를 만나다(上)

이정훈 교수. 그는 한때 독실한 불교 신자였지만 ‘극적 회심’을 통해 기독교인이 됐다. 그리고 법학자로서 동성애 등 현대 ‘성 주류화’(GM) 운동의 사상적 배경을 치밀하게 연구해 그 실체를 고발하고 있다. ⓒ김진영 기자

이정훈 교수. 그는 한때 독실한 불교 신자였지만 ‘극적 회심’을 통해 기독교인이 됐다. 그리고 법학자로서 동성애 등 현대 ‘성 주류화’(GM) 운동의 사상적 배경을 치밀하게 연구해 그 실체를 고발하고 있다. ⓒ김진영 기자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소위 GM이라 일컫는, 지금 서·북유럽을 장악한 이데올로기의 목적은 교회 해체다. 이건 내가 한 얘기가 아니라 게이 프라이드 운동을 하는 이들이 그들의 책에 직접 쓴 내용이다. '왜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가, 그건 억압받고 있으면서도 그런 줄 모르는 기독교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부터 해체해야 한다' 이것이 GM의 목적이고 실제 효과를 봤다. 법을 만들고 혐오라는 굴레를 씌워 교회의 입을 막았다. 이것이 이제 쓰나미처럼 한국을 덮치려 한다.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한국이, 그리고 교회가 놓여 있다. 이걸 막으려는 것이다. 이 타이밍을 놓치면 끝장이니까. 그래서 나섰다. 목숨을 걸 각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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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민했던 20대의 불자(佛子)

이정훈 교수(울산대 법철학)를 만났다. 이미 많이 유명해진 그다. 교회가 부르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그 때마다 위와 같이 외쳤다. 그렇게 혜성처럼 나타나 뜨거운 반응을 낳았다. 이토록 극적일 수 있을까? 그의 회심, 그의 메시지,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다.

불교 신자였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2학년 때 출가했다. 조계종 대표 문중(학파·學派와 비슷한 개념, 제자들의 모임-편집자 주)에 들어가 수행했다. 그는 "불교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다"고 했다.

그러나 질풍노도의 20대는 끊임없이 번민했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런 류의 질문이 그를 따라다녔다. 출가 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설법(설교의 일종-편집자 주) 잘한다는 소리는 제법 들었다. '집착하지 말라!' 하지만 집착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따금씩 절을 뛰쳐나가기도 했다.

끝내 환속(還俗, 승려가 다시 속인이 되는 것-편집자 주)을 결심했다. 그리고 군법사(기독교로 치면 군목-편집자 주)로 군대에 갔다. 일각에서 그의 출가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승적이 없으면 군법사가 될 수 없다고 그는 단언했다. 목사가 아닌 자가 군목이 될 수 없듯이.

제대 후에는 답을 찾지 못한 인간에 대한 물음을, 사회에 던지기 시작했다. 그 모순에 분노를 느꼈다. 정확히 말하면 자본주의가 싫었다. 바꿔보고 싶었다. 그래서 법학을 공부했다. 뭐든 본질을 알고 싶은, 그런 본능 같은 것이 있었다.

"68혁명의 후예", 그리고 종자연

종교자유정책연구원(종자연)과 인연을 맺은 것도 이 무렵이다. 그에 따르면 종자연은 진보적 성향의 불교계 단체인 참여불교재가연대의 산하 단체다. 그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 교수는 단호했다. "종자연은 기독교(개신교)를 타깃으로 삼았다"고. 공적 영역에서 몰아내야 할 존재로 기독교를 지목했다는 것이다.

그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저들은 개혁을 가로막는, 반개혁적 집단이었다. 게다가 부패했다. 가진 자들의 편이었고 부자들을 대변했다." 이 교수에게 기독교는 투쟁의 대상일 뿐, 공존의 상대가 아니었다. '왜 저모양인가?' '저런 저급한 설교에 아멘을 외치다니!'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2007년, 이 교수는 종자연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했다. 법학자로, 그의 전공을 십분 활용했다. 치밀하게 법리를 짜, 소위 '3대 입법 과제'를 제시했다. 국가공무원법, 사립학교법, 지방자치법. "기독교를 초토화 시키자는 것"이었다. 특히 국·공립학교 교사들을 겨냥했다. 미션스쿨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 교수는 핵심 '브레인'이었다.

"프랑스 68혁명의 후예" 당시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여겼다. '모든 권위에 저항하다' '금지를 금지하다' 68혁명의 구호다. 절대 가치란 없고 모든 게 상대적이다. 그는 "푸코를 공부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 그가 누군가? 후기구조주의의 대표주자다. '성(性)이 억압된 것은 사실은 권력 때문이다, 그 뒤에 기독교가 있다' 푸코의 생각이다. 그렇게 성을 해체시켰다. 이 교수는 이처럼 철저하게 기독교의 반대편에 있었다.

"공포가 없는 죽음, 그것이 공포였다"

어느 날, 짐을 챙겼다. 책과 자료를 들고, 양평과 횡성 사이에 있는 절에 들어갔다. 심신을 충전하고, 정교하게 기독교를 공격하려면 연구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박사논문도 마무리 할 참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집중이 안 됐다. 그에게 절은 "친정집"이었다. 새벽예불을 올리고, 아침 공양을 드렸다. 전 같으면 정신이 맑아야 했다. 그런데 머리가 아팠다. "뭔가 기분이 나쁜 두통이었다."

더 이상했던 건, 절을 벗어나면 두통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러다 다시 절과 가까워지면 찾아오는 '기분 나쁜' 두통. 더는 그곳에 머물 수 없었다. 다시 짐을 챙겼다. 돌아온 그를 의아해 하는 아내. 이 교수도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아내가 밥을 준비하는 사이, TV를 켰다. 한 기독교 채널에서 설교가 나온다. 그는 어김없이 조소를 날렸다. "웃기고 있네, 너나 잘하세요!" 그런데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 교수는 입을 더 뗄 수 없었다. 혀가 굳는다는 걸 느꼈다. "무언가가 온 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그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 죽는구나!"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그 순간 회심했다. '누구보다 의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주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는 그 기적과도 같았던 찰나에 그것을 온 몸으로 깨달았다. '대체 누가 나 같은 쓰레기를 위해 죽었던 말인가? 주님이다, 창조주 하나님이다!'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가 왜 십자가에 달렸단 말인가?' 두 눈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갑작스러운가? 누구보다 기독교를 미워했던 그다. 그런 그가 이런 고백을 하다니. 납득하기 어려운 반전 아닌가? 하지만 이 사건이 있기 전, 그는 이미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극적 회심은, 흔들리던 마음이 마침내 부서진 결과였다.

"지피지기(知彼知己). 기독교를 공격하려면 기독교를 알아야 했다. 성경은 아무리 읽어도,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순교자들의 역사는 생생했다. 후스 같은 종교개혁자 말이다. 그 당당했던 죽음을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충격에 가까웠다. '이게 뭘까? 어찌 죽음의 공포가 없단 말인가!'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공포가 없는 죽음, 그것이 내겐 공포로 다가왔다. 혁명을 위해 죽는 이가 있다. 그렇게 영웅이 되지만, 그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죽음이다. 순교자들의 그것과 다르다. 스스로 택하는 죽음, 그 앞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정말이면 어떡하지? 예수가 진짜면, 그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나는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닌가?' 사실 그 때부터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동성애는 한낱 사랑놀이가 아니다"

결국 회심으로 그것에 마침표를 찍었다. '누가 죽으신 거냐?' 그는 이 질문에 사로잡혔다. '창조주가 날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 이 교수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길을 걷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십자가만 보면 가슴이 아렸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세상이 달리 보였다. 너무 아름다웠다. '이것이 과연 악이 넘친다 믿었던 그 세상이 맞던가?' 성경도 다시 보였다. 보아도 보이지 않았고, 들어도 들을 수 없었던 그 말씀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다. 입에선 찬양이 떠나지 않았다. 2007년의 끝자락, 그가 마침내 기독교인이 된 순간이다.

이듬해 그는 울산대 법학과의 교수가 됐다. 그의 나이 만 33살에.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교수가 된 셈이다. 그런 뒤 교수로서 연구에만 몰두하며 살았다. 그러다 우연히 교내 집회에서 한 목사를 만났다. 그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것이 인연이 돼 서로 가까이 지내며 부자의 정을 나누었다. 진짜 부모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이 교수. 그가 '투사'가 됐던 건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정훈 교수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건 지난해부터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울산에서 이데올로기를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 우연찮게 그것이 방송을 탔다. 입소문이 났고, 나설 때임을 직감했다.

"동성애를 연구한 뒤였다. 그것은 한낱 사랑놀이가 아니었다. 배후가 있다. 바로 젠더이데올로기. 남자와 여자만 있지 않고 수십 개의 성이 있다는 건, 다양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성을 해체하자는 것이다. 그럼 인간이, 가정이 모두 해체된다. 그것이 유럽을 휩쓸었다. 그리고 한국에 상륙하려 한다. 혐오세력이라며 교회의 입을 막는다. 미디어도 여기에 가세한다. 그런 다음 법을 만든다. 차별금지법이다. 여기까지 가면 교회는 쓰러진다. 그래서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우아하게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돌이킬 수 없는 회한에 빠질 것 같았다.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나서야겠다고 결단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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