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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목사의 한국교회사] 한국 교회의 조직 (III)

기독일보 news@christianitydaily.com

입력 Feb 01, 2018 12:17 PM P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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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07년 9월 2일 오전 9시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개최되었다. 그 때 상황을 총회록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주후 1912년 9월 2일 오전 9시에 평양 서문밖 신학교에서 회장 이눌서 씨, 박예헌 씨의 미가 6장 8절의 강론과 기도로 개회하다. 회장이 총회 취지를 설명한 후에 서기가 회원 천서를 검사하고 조명(출석)하는데 경기·충청노회……전라노회……경상노회…… 함경노회……남평안노회, 평북노회, 황해노회……목사 합 (외국 목사 44인, 조선 목사 52인) 96인과 장로 합 125인 총 합계 221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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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총회장에는 언더우드가 선출되었고, 부회장에는 1907년 대부흥운동의 기수 길선주 목사가 선출되었다. 총회 개회 시 가장 흥미 있는 일은 일곱 노회를 상징하는 일곱 가지 다른 색깔의 나무로 아름답게 장식하여 만든 의사봉(고퇴)을 총회장에게 전달한 일이다.

총회의 창립으로 장로교회는 세계 교회의 일원이 된 것을 확인하였다. 총회의 창립을 축하하기 위해 세계의 장로교회와 중국 산동성노회, 일본 기독교회 그리고 만국장로교연맹(현재 세계개혁교회연맹) 등에서 축전을 보내왔다. 또한 총회는 그 창립을 만국장로교회연맹과 각국 장로교회의 총회에 통고하였다. 이제 명실공히 한국의 장로교회는 세계 장로교회와 세계교회의 일원이 됐다. 비록 국가는 일제에 의해 독립을 빼앗겼지만 교회는 오히려 당당한 독립 기구로 세계 교회와 어깨를 같이 하는 경사를 맞았다. 총회는 200명 총대 중 선교사 숫자가 40명을 넘지 못하게 총회 법으로 못 박아, 한국 교회의 독립을 강화하였다. 이제 한국교회는 더 이상 선교사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한국 목사, 장로가 다수여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를 책임지고 이끌고 가야 하는 책무 또한 지워진 셈이 되었다.

총회가 창립되고 나서 수행한 첫 번째 일은 해외 선교부의 조직이었다. 독노회가 설립된 당시,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파송했다. 그 후 국외의 서간도, 만주, 동경, 시베리아, 미국, 멕시코에까지 전도인들을 파송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어디까지나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를 위한 일이지, 이민족(異民族) 선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해외 선교는 아니다. 그러나 외국 민족에게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은 곧 우리 교회의 존재 확인으로 국가가 없어지고 한국 사람이 일본 사람과 같이 취급 받던 시대에 한국의 정체성(identity)을 갖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1970년 미국의 저명한 교회사가이며 시카고대학교 교수인 마티(Martin Marty) 교수가 “국가의 정체성과 선교는 밀접하게 연결 되어 있다”고 한 말은 바로 일제 치하의 한국 교회 해외 선교 수행에 정확하게 적용되는 말이다. 총회는 선교지를 중국 산동성 내양현(萊陽縣)으로 확정하고 첫 선교사로 김영훈(金永勳), 사병순(史秉淳), 박태로(朴泰魯) 등 세 목사를 이듬해 파송키로 결정하였다.

한국 목사의 산동성 선교는 서양 선교사보다 무척 용이했는데, 그것은 한국 목사는 한자를 읽고 쓸 수 있어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언어도 중국말과 발음이 비슷해 무척 쉽게 습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외 선교비는 전국 교회 감사주일 헌금을 전도국에 보내 충당하기로 결정하였다. 산동성은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고장으로 외국 선교사가 선교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곳이었다. 우리 총회는 남이 성공한 지역에 가는 것보다 실적이 없는 곳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 그곳을 택하게 되었고, 중국 교회도 이곳을 천거했다. 해외 선교에 앞장섰던 선교부장 길선주 목사는 다음과 같이 중국 선교의 시작에 대해 피력하였다. “한국 교회가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힘에 겨운 일이다. 그러나 나라를 잃었을망정 국외에 선교하는 교회로서 세계 선교국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가장 의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복음운동에 대한 한국 교회의 의무인 동시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말씀에 순응하는 믿음의 실천이다. 우리는 이를 이행하기 위해 최대의 힘을 다할 뿐이다.”

한국 교회의 중국 선교에 대해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 선교부 총무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두 나라간의 역사적 관계에서 [볼 때], 조선은 중국에 그 문명과 문학에 빚 진 바 [커서, 한국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 더욱 강조되었다. 그들 [한국인들]은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왜소하고 뒤떨어진 민족이라고 여겨 왔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교회에서 [한국인들이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오! 주여 우리는 멸시받은 민족이며, 이 지구상에서 가장 연약한 민족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멸시받은 자들을 택하는 분이십니다. 아시아를 위하여 이 민족을 들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시옵소서.”

모든 제도와 문물을 중국으로부터 전수받았고, 배우기만 했던 한민족이 대국으로 섬겨만 오던 중국 사람들을 복음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일에 대해「장로교회사전휘집」에 “이는 조선교회가 선교 밧은 지 28년 밧게 안 된 때였다. 실로 세계에 유(類)가 업는 경이적 사실이 아니고 무엇이랴.”라 감격했다. 산동성 선교 첫 수세자는 장수명(Chang, Soo Myung)이란 70세 학자로, 그는 김영훈 목사가 그 지방관에게 보낸 한시(漢詩)를 읽고 감동하여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산동 선교는 크게 성공하여, 평도(平度), 즉묵(卽墨), 해양(海陽), 누하(樓霞) 등 5개 현으로 선교 구역이 확대되었다. 1932년에는 내양 남관(南關)교회에서 내양노회가 창립되어 중국 교회의 산동대회 산하 16개 노회 중 하나로 가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곳에서 선교를 시작한 지 30년이 지난 후 교회가 35개 소, 교인이 1,716명으로 중국 선교사상 최대의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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