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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말씀, ‘교회 안’에서만 실천하는 것입니까?

기독일보

입력 Jan 10, 2018 06:05 PM P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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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북뉴스 칼럼] 개인은 없고 교회만 있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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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겸손을 이루는 핵심요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려는 자발적인 자세다(존 스토트,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IVP, 243쪽)."

이러한 말이 지금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질문이나 저항 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존 스토트의 글을 보면, 모든 것이 당위적 전제 위에 놓여 있는 듯하다.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려는 자발적 자세'에 누가 토를 달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무엇을 말하는지를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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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우를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한, 나의 의를 위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만족함을 얻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순종과 겸손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에 속하지만, 스토트가 말하고자 한, 말씀이 내 주인 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겸손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에 대한 설명은 아직 내가 읽고 만난 사람들 중에서는 말해주는 이가 없었다.  

스토트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님이신가, 아니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주인인가"의 질문을 제기한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에게서 치명적으로 안타까운 부분은 '개인'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교회로 귀결되고 있는 점은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막아 버리고, 원시적 제의(예배)와 공동체의 희생제물 관점에서만 예수를 바라보게 한다.

물론 교회라는 것이 구약의 성전에서 신약의 에클레시아로 전환된 핵심적 모형임은 분명하지만, 성경을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지금의 복음주의자들이 강조하는 만큼 교회를 강조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부분은 신학적 논의가 더 필요한데, 공교롭게도 나는 목회자이지 신학자는 아니다. 신학을 지속적으로 공부하는 목회자이기에 위의 문제제기에 대해 해결한 능력은 결여(지식적으로, 시간적으로도)돼 있다.

다만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목회의 현장에서 목회(개인이 아닌 조직)에 관한 연구와 말씀은 넘쳐나지만, 그 목회의 대상으로서 각각 만나는 개인에 대한 말씀은 여전히 기근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즉 제의적 말씀은 넘쳐나지만 현장의 말씀은 기근(자기의 소견에 옳을 대로)을 만난 사사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기복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자기를 위한 레위인(목회자)을 모시는 원시제의 수준으로 다시 퇴행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지교회(현대 부족 공동체)에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담임목회자에게 돌려, 담임목회자를 추방(교체) 또는 세습하는 파르마 코스를 재현하고 있다.

며칠 전 정일권 박사의 <예수는 반신화다>라는 책의 서평을 썼다. 지금까지 정 박사의 글을 4권 정도 읽었는데(3권을 서평했다), 지라르의 관점에서 현대 교회의 모습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과 많은 일치점도 있지만, 상당한 부분에서 원시적인 불일치도 함께 발견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개인의 부재(不在)'와 '제의중심'이다. 교회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전혀 아니다. 그러나 지교회(현대적 부족 사회) 중심의 신앙은 결국 예수를 희생제물로만 보게 한다. 그리고 개교회의 담임목사는 현대의 오이디푸스로 기능하고 있다.

지금의 교회는 원시적 제의(예배) 공동체에서, 공교회성과 공공성의 기능을 감당하는 보편주의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스콜라에서 사이언스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배타적 보편주의의 위험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즉 스스로의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켜야 하는 과제가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성경만 읽은 자들의 독선의 위험을 극복해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한 것처럼, 성경 또한 아는 만큼 보인다. 아무리 많은 기도를 하며 성경을 해석한다 해도, 결국은 자신의 인식범위를 초월할 수는 없다.

이러한 가운데 우려되는 위험은 폭 좁은 깊이이다. 폭이 좁은 인식 가운데 깊이만 더해질 때, 확신에 찬 배타와 마녀사냥이 나타난다. 즉 다양성에 대한 공감보다는 자기 확신에 찬 배타성이 강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 수없이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성경 말씀은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어느 시대에도 완벽한 해석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한다. 즉 자신의 해석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존 스토트는 언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과거 해석의 중요성만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말씀이 교회 안에서만 행해지는 것을 바라시지 않으며, 개인의 삶 속에서 행할 것을 요구하신다.

교회뿐 아니라 개인이 이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땅 끝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세상의 복음화(세상의 종교화가 아님)를 성취할 수 있다. 즉 성경의 복음은 교회가 아닌 세계 시민(하나님 나라)의 복음화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앞에 겸손과 순종의 제의(예배)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개인의 일상성)을 닮아야 한다. 예수님의 순종은 제의(성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세상)을 향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강도헌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제자삼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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