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일의 폭스테리어 닙(Nip), 마페트와 게일의 전도여행에 동행하다

걷는 자는 복되다. 저희가 사람을 사귀며 언어와 문화를 배우리로다. 
발품으로 사는 이는 아름답다. 울며 씨를 뿌리나 때가 되면 영혼을 구하리로다.

◈한국교회사에서 최장거리 도보 전도여행: 기마서백(奇馬徐白)로

1891년(신묘년) 2월 말 겨울의 끝자락에 선교사 게일(James S. Gale 奇一, 1863-1937)과 마페트(Samuel A. Moffett 馬布三悅, 1864-1939)와  조사 서상륜(徐相崙, 1848-1926)은 함께 서울을 떠나 송도-평양-의주-봉천(심양)-자성-함흥-원산을 거쳐 다시 서울로 돌아온 긴 전도여행을 감행했다.

의주에서 서상륜은 서울로 돌아가고 백홍준(白鴻俊, 1848-1893) 조사가 의주-봉천-자성의 길을 안내했다. 기차나 자전거가 없던 시절이었다. 두 선교사는 약 3,000리의 길을 걷고 일부는 마차를 타고 여행했다. 2월 25일 출발, 5월 20일 도착, 3개월간의 탐사와 전도 순행(순회여행)으로, 한국교회사에 기록된 최장 도보 선교 여행이었다.

여행의 목적은 ①신참 선교사인 마페트와 게일이 서울을 떠나 한국인들과 지내면서 한국어를 익히고 한국 사정을 배우고, ②오가는 장거리 여행에서 한국인에게 전도하며, ③의주가 북한의 첫 선교 지부를 설치할 장소로 적당한지 조사하고, ④서간도 한인촌 28개 마을과 압록강 양안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수백 명의 한국인 신자들(1884-1885년 100명이 로스와 웹스터로부터 세례를 받음)에 대한 실태를 조사하며, ⑤1890년 여름 네비어스 부부가 서울 방문 때 가르쳐준 네비어스 방법을 만주에 적용하여 발전시킨 로스 목사를 만나 그의 선교방법론을 배우는 것 등이었다.

3개월 동안 이 다섯 가지 목적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여행 결과 마페트는 의주가 아닌 평양을 북한 선교의 중심지로 확신하고 선교지부를 설치하기 위해 몇 년 간 노력하게 된다.

우리는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지도나 방문지를 외울 정도로 열심히 배운다. 그러나 바울의 전도여행 못지 않게 중요한 초기 한국교회사의 전도여행도 그 행로와 의미를 그려보고 공부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가 시작된 길이요, 통일이 되면 기일, 마포삼열, 서상륜, 백홍준의 첫 자를 따서 기마서백로(奇馬徐白路)로 칭하고, 그 3,000리 루트를 순례의 길로 걸으며 청년의 기상, 북한과 만주 선교의 열정을 기를 것이기 때문이다.

게일과 닙의 선교여행(1891). ⓒ옥성득 교수 제공
게일과 닙의 선교여행(1891). ⓒ옥성득 교수 제공

◈여행의 동반자들: 테리어 닙도 함께 가다

마페트는 내한한 지 막 1년이 지난 초보 선교사였으나, 봉천에 있는 로스 목사를 만나 그의 선교방법론을 배우려는 강한 열망이 있었다. 봄이 오면 얼었던 길이 녹으면서 진흙탕 길이 오히려 걷기에 불편했기 때문에 2월 말 북쪽으로 올라가는 게 최선이었다. 또 가는 길마다 임진강부터 압록강까지 여러 강이 가로 놓여 있었으므로 강물이 녹기 시작한 시점이어야 배로 건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열다섯 살이나 많고 만주에서 잔뼈가 굵어 중국어가 능한 서상륜 조사가 두 청년 선교사의 초행길을 안내했다. 소년(머슴) 마부 금돌이가 말 두 필에 짐을 싣고 함께 갔다.  

게일은 닙(Nip)이라고 부르는 어린 반려견 폭스테리어도 데리고 갔다. 예민한 감각과 민첩한 행동, 총명한 두뇌를 겸비한 닙은 사냥개로서나 남자들만의 여행에서 동반자로 손색이 없었다.  

"우리 일행의 또 한 친구는 반쯤 자란 테리어였는데, 1천 마일의 여행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두 시간 정도의 소풍에 나선 투로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놈은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제법 영리해 보였으므로, 한국 사람들은 개로 여기지를 않고 귀신을 보는 듯이 여겼는데, 우리 서양인들[마페트과 게일]은 마음이 맞는 동료로 여기고 데리고 떠났다. 우리는 그를 '닙(Nip)'이라고 불렀는데, 일행 중 고상한 서양족의 일원이었다(J. S. Gale, Korean Sketches (1898), 73.)."

닙은 닙폰(Nippon, 일본)의 줄인말로 Japanese(일본인)을 줄인 비속어 Jap(잽)처럼 왜소하고 눈치 빠른 일본인을 낮추어 부르는 속어였다. 그래도 그 품종이 영국산이었으므로, 일행 중에는 서양족이 셋(게일, 마페트, 닙), 동양족이 넷(서상륜, 금동이, 말 두 마리)이라는 설명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선교사들 의식 속에 숨어 있는 백인 우월주의(인종주의)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선교사들은 전도여행 때 사냥총을 휴대하고 들판이나 산길에서 오리나 꿩 등을 사냥하여 잡아먹고 영양을 보충했기에, 사냥감을 물고 오는 사냥개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폭스테리어(Fox Terrier)는 어깨 높이 약 40cm의 작은 개인데, 원래 여우사냥에 많이 쓰인 사냥개로 원산지는 영국이었다. 입은 흰 바탕에 검은색과 황갈색의 얼룩점이 있었는데, 총각 게일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서울을 떠난 지 한 달이 될 무렵인 3월 20일, 세 사람은 건강하게 국경도시 의주(義州)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350마일 거리였다. 당시 3마일을 10리로 쳤으니, 1,000리 길이 넘는 길이었다.

게일과 닙(1891). ⓒ옥성득 교수 제공
게일과 닙(1891). ⓒ옥성득 교수 제공

3월 29일은 부활주일이었다. 30명이 참석한 예배 때 마페트와 게일은 10명의 한국인 세례교인들과 성찬을 나누었다. 로스 목사의 성경 번역과 전도의 열매였다. 20년 가까이 기독교가 전해진 곳이라 의주 사람들은 복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상인과 관리들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입교했다. 이때 의주에서 마페트는 미래의 동역자인 20대 초반의 한석진(韓錫鎭, 1868-1939)을 만났다. 이후 두 사람은 평양 선교지부를 개척하게 된다.

의주에서 서상륜은 서울로 돌아가고, 의주 이후의 여행은 백홍준이 동행하며 안내했다. 이들은 함께 만주 심양으로 가서 로스 목사와 크리스티 의사 웹스터 목사를 만나 나흘 간 이들의 성공적인 선교 사역을 확인하고 테니스도 쳤다. 네비어스 방법을 만주에 적용시킨 로스의 토착 선교 방법론을 배웠다.

백홍준의 안내로 자성까지 온 후 함흥, 원산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이 여행을 통해 두 사람은 친구가 됐고, 게일은 마음속에 묻어둔 헤론 부인에 대한 사랑을 먼저 마페트에게 고백함으로써(사실 마페트도 헤론 부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여행 후에 게일은 헤론 부인과 결혼하게 된다.

◈네비어스-로스 방법을 배우다

여행의 정점은 봉천에서 로스 목사를 만나, 그의 전도 방법을 배운 것이었다. 마페트는 로스의 토착 선교 방법론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를 1894년부터 평양 선교지부에 적용함으로써, 이후 평양을 세계 최대의 선교지부이자,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만들 수 있었다.

마페트가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부분은 사진에서 보는 서양식과 중국식의 절충 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봉천장로교회 건물(1889년 10월 완공)과 5백 명 가까이 모인 교인들의 예배를 인도하는 중국인 목회자들이었다. 변형된 고딕 양식에 도교 사원 양식을 더했다. 지금 봉천에 있는 예배당 이전의 것이다.

담장에 둘러싸인 도교 사원 양식의 예배당은 곧 남녀 좌석을 기역자(ㄱ) 형식으로 분리하여 여자 교인들을 배려했다. 모든 것이 중국식, 중국 생활과 문화와 관습에 뿌리를 내린 이 토착 교회는 마페트와 게일에게 영감을 주었고, 두 사람은 한국에서도 "성경의 원리에 반하지 않는 한 최대한 자유롭게 한국적 관념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한국 문화와 관습에 바탕을 둔 토착 교회를 발전시키겠다"는 꿈을 품고 돌아왔다.

1887년 로스의 서울 방문, 1890년 네비어스의 서울 방문, 그리고 1891년 마페트와 게일의 심양 방문은 한국 장로교회가 '네비어스-로스 방법'을 채택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한인촌의 쌀 신자들

돌아오는 길에 마페트는 지안(集安)을 중심으로 한 서간도 한인촌을 방문했다. 마페트는 심양보다 한국 쪽에서 선교하는 것이 더 좋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세금과 기근을 피해 압록강 건너편 한인촌으로 이주한 농민들 중에서 1884-1885년에 100명이 세례를 받았는데, 제대로 신앙을 지키는 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들은 관리나 지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교한 쌀 신자였다. 그들은 교회에 가입하면 선교사로부터 경제적 정치적 지원을 보장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목회자가 돌보지 않는 상태에서 복음에 대해서는 무지했기 때문에, 핍박 앞에서는 쉽게 신앙을 버렸다.

의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런 경험 때문에 마페트와 다른 선교사들은 1894년부터 학습제도를 만들어, 교리 교육은 물론 신자로서의 삶을 6개월 이상 관찰한 후에 세례를 주게 되었다.   

남한산성에서 마페트와 게일과 닙과 헤론 부인(앞, 1891). ⓒ옥성득 교수 제공
남한산성에서 마페트와 게일과 닙과 헤론 부인(앞, 1891). ⓒ옥성득 교수 제공

◈1891년 여름 남한산성에 간 닙

5월 20일 서울에 돌아온 게일과 마페트는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닙도 마페트를 따랐다. 이들은 여름이 되자 피서로 남한산성에 가게 된다. 산성의 지휘소인 수어장대까지 장로회 선교사들 전체가 큰 무리를 이루어 피서를 갈 때 걷기에 이력이 난 닙도 함께 동행했다.

닙을 사랑한 로맨티스트 게일이 미인 헤론 부인의 마음을 얻어 두 사람은 1892년에 혼인하고 원산으로 갔다. 게일은 내한할 때 캐나다에 약혼자를 두고 혼자 왔는데, 이때 파혼하고 두 딸을 가진 헤론 부인과 혼인했다.

여러 선교사들이 게일을 비난할 때, 마페트가 변호함으로써 사태가 마무리될 수 있었다. 또한 신학교를 다니지 않은 게일에게 5년간 매코믹신학교 과정을 따라 신학을 공부하게 하여, 1897년 안식년 때 마페트가 소속된 인디애나 뉴알버니노회에 함께 가서 목사 안수 시험을 치르고 안수를 받도록 주선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지속되었다. 게일은 1899년 마페트가 9년간의 독신 선교사 생활을 마감하고 엘리스 피시 의사와 혼인할 때, 마페트의 들러리가 되어 축하해 주었다.     

◈도상의 순례자

기독교는 천천히 걸어가는 종교, 길 위의 종교이다. 예수님은 3년간 걸어 다니며 제자들을 훈련했고, 바울은 몇 차례 선박 여행을 제외하면 평생 걸어 다니며 선교했다.

사람의 영혼은 걷는 속도로 무르익고 제자는 대화하는 시간만큼 변한다. 비행기로 가면 빠르지만, 길가의 민들레꽃은 볼 수 없고 강변에 부는 바람은 만질 수 없다. 길동무와 발걸음을 맞추고 그들의 말을 듣고 익히는 것이 선교의 첫 걸음이다.

1세대 선교사들은 한국인 전도인과 함께 먹고 함께 자면서 길거리 전도를 했기에, 토착적인 한국 교회를 일구어낼 수 있었다. 월 스트리트, 메인 스트리트만 길이 아니다. 탄탄대로, 첩경만 길이 아니다. 두멧길, 시골길, 오솔길, 황톳길, 뒷골목길, 선한 사마리아인이 내려간 여리고로 가는 길, 좁은 길에 사람이 있고 강도 만난 자가 있고 진리가 있다.

그 길을 따라 우리와 같이 되시기 위해 몸을 입고 걸어오신 예수님, 절망의 엠마오로 가는 길의 두 제자와 함께 걸으며 떡을 떼어주신 부활하신 예수님, 그 길을 따라 복음 짐을 지고 나선 서상륜, 마페트, 게일을 만나러, 오늘 한국교회는 길로 나가자.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수 14: 9)."

꿈을 꾼다. 서울을 떠나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의주에서 고려문을 지나 만주 산야를 바라보며 심양까지 걸어가는 여행의 꿈. 그곳에서 고구려의 영광의 자취가 서려 있는 서간도로, 압록강을 건너 자성에서 광활한 산맥을 넘어 함흥으로, 그리고 원산에서 서울까지 돌아오는 순례의 꿈.

127년 전 그 꿈을 현실로 만든 네 사람이 있었다. 아름다운 전도자의 발을 가진 서상륜과 백홍준, 청년 선교사 마페트와 게일. 그리고 동행한 닙이 있었다.

옥성득 교수.
옥성득 교수.

옥성득

현재 UCLA 인문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의 임동순·임미자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다. 서울대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장신대 신대원을 거쳐 프린스턴 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역사로 학위를 받았다.

저술로는 『마포삼열 자료집』 1, 2권(책임편역),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이상 새물결플러스), 『대한성서공회사』 1, 2권(1993, 1995), 『대한성서공회사 자료집』 전3권(2004, 2006, 2011), 『언더우드 자료집』 전5권(2005-2010), Sources of Korean Christianity(2004), 『한반도 대부흥』(2009),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2013), 『첫 사건으로 본 초대 한국교회사』(2016), 『한국 근대 간호역사 자료집』 1, 2권(2013, 201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