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블로그 오네시모
(Photo : ) 출처: 블로그 오네시모

 

 

[질문]

히브리서 6장 4 - 9절을 근거로 해서 가룟 유다와 사울의 경우처럼 한 번 잃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해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과연 한 번 얻은 구원을 잃을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까? 

[답변]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십자가에 우리 대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자체가 사실 모순이 아니겠습니까? 구원이 인간의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전적 은혜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을 잃고 안 잃고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절대 이뤄질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하나님이 취소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구원했다는 뜻이 되어 버립니다. 한 번 준 구원을 언제든 취소할 가능성을 열어 놓은 채 예수님을 인간으로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하셨겠습니까? 

이 질문이 성립되려면 구원 받은 인간이 구원 이후에 하는 짓이 도저히 마음에 안 들어 하나님이 구원했을 때의 그 심정에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인간이 구원 되었을 때의 상태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상태입니까? 절대 아니지 않습니까?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롬5:8) 

간혹 질문자가 적시한 대로  히브리서 6:4-9절을 근거로 해서 사울 왕과 가룟 유다의 예를 들어 구원 받은 사람도 그 구원이 취소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성경의 진리를 추적해서 과연 그런 주장이 옳은 지 살펴 보기로 합시다. 

사울 왕의 경우 

성경에 하나님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한 삶이 있는가 하면 단순히 하나님의 인류 전체를 향한 구속사를 진행 시킴에 있어서 일정 부분의 역할만 담당 시키기 위해 선택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구원과는 상관 없이 악역 배우 역으로만  등장한 자가 있습니다. 이 둘을 구분할 줄 아셔야 하는데 사울과 유다의 경우가 바로 후자에 속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사울이 왕이 된 배경을 자세히 살펴 보면 사울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원래 의도는 완전한 신정 국가였습니다. 세속적인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계획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8:5)라고 줄기차게 사무엘에게 요구했습니다. 실망한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8:7)고 그 사태를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재차 그들에게 세족적 군주 제도의 폐해를 열심히 설명해 준 후 "그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8:18)고 까지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자 할 수 없이 하나님은 사무엘더러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비록 성경 기록에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 보았노라"(삼상9:16)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 어디에도 사울 개인에 대한 구원의 언급은 없습니다. 자기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초대 왕의 역할을 할 자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선택에 주권적 간섭을 했다고 해서 사울을 구원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려 하나님이 자기들의 왕이 되지 않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는 기준에 합당한 왕으로 사울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드는 왕 다윗을 예비 해 놓으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뽑은 왕 사울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다윗과 극명하게 대조시키기 위해 그를 세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울의 무엇을 보고 왕으로 뽑았습니까?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삼상9:2) 그들의  기준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다"에 가장 적합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세울 때에 사무엘에게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통할하리라"고 했습니다. 오직 백성의 요구에 맞게 고른 왕일 뿐 내 참 의도와는 상관 없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삼상16:12) 신체적 조건을 말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해 얼굴이 동안이었고 눈은 천진난만할 정도로 순수했다는 것입니다. 전쟁과는 전혀 상관 없는 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자기들을 앞서 나가 싸워줄 전쟁의 용사를 왕으로  구했지만,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했습니다. 다윗을 세울 때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용모와 신장을 보지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했다고 기록된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해에 맞추기 위해 신인동형법(神人同型法 Anthropomorphism) 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구원했다가 취소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해 예언을 했다는 것(삼상16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구약 시대는 알다시피 성령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요엘이 예언했었고 승천하시기 전 주님이 약속했던 대로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그 이후 신약시대는 성령이 신자에게 한 번 임하면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 모든 성도가 성령의 전이 됩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개인의 구원과는 상관 없이 성령이 특정 사건의 특정 인물에 특정 목적으로 일시적으로 왔다가 떠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를 왕으로 세우는 절차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하며 또 본인을 좀더 강건하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당신의 뜻을 거슬려 세속적 왕을 세워주지만 전혀 자격과 능력도 없는 왕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악인이라도 일반적 은총으로 다스리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망하게 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설령 자격 없는 자를 세웠거나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라도 그를 변화시키기 원한 것입니다. 

사울이 처음 왕이 되었을 때는 기골만 장대했지 성격은 매우 부끄러움이 많은 자였습니다.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택함을 받고도 숙부에게 "사무엘의 말하던 나라의 일은 고하지 아니"(삼상10:16)했으며 모든 백성이 모인 중에 왕으로 선출되었음에도  행구 사이에 숨었습니다.(10:22) 그러자 백성 중 일부는 심지어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드리지 아니"(10:27)했습니다. 그런 사울을 좀더 담대한 왕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히 구원 받은 자라면 처음부터 악신이 그를 괴롭힐 수 없으며 나아가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본인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여 자신의 일생을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기를 왕이 되고 여러 사건을 겪고 난 한참 후에야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단이었더라" (삼상14:35) 고 합니다. 

사울의 생애를 가만히 살펴 보면 하나님이 왕으로 선택한 직후를 포함해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에게 완전히 겸비하게 무릎 꿇은 적이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님께 구원 받으면  반드시 진정한 회심이 따르며 삶에서 실제 행동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구원을 위해 선택 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왕의 역할을 감당하려고 세움 받은 것 뿐입니다. 처음부터 구원 받지 않은 자였으므로 구원이 취소된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 

하나님이 인류 구속사를 진행시키는 과정 중의 한 역할만 맡기려고 뽑았다는 것이 가룟 유다의 경우에는 더욱 명백합니다. "내가 곧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雇價)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11:12,13) 스가랴 선지자는 주님 오시기 500여년 전에 이미 유다의 배반을 예언했습니다. 예언대로 유다가 배반했었으므로 그 예언의 역할을 맡을 자로 뽑힌 것이지 처음부터 구원을 전제로 선택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하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길 수 없다고 사양했지만 주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성질 급한 베드로는 또 다시 이왕 씻겨져야 관계가 생긴다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 씻겨 줘서 더 많은 관계를 맺고 싶다고 덤벼 들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13:10)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목욕했는가, 식사 전에 손 발을 씻었는가를 따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목욕한 자란 예수님이 구원을 위해 택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일하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듯이 구원 받은 자라도 매일의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짓는 죄가 있는데 그것도 매일 주님께 씻음을 받고 또 제자들끼리 서로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요13:11)라고 유다는 목욕하지 않은 자 즉 구원을 위해 택한 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럼 이제 문제는 배반할 줄 알고도 선택한 주님 쪽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닌가 입니다. 그럼 유다를 선택하지 말았어야 했고, 또 설사 잘못된 선택을 했어도 유다를 삼 년간 같이 다니면서 깨끗게 해서 구원해 줄 수도 있었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맞습니다. 충분히 그런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실 것은 이것입니다. 유다는 반드시 언제 어디나 있게 마련입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인류 구속의 신비는 영원을 꿰뚫는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유다라는 한 특정인의 입장에서 이 경륜의 잘잘못을 논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고의로 유다를 택해 그가 배반토록 하고 비극적인 자살로 강제적으로 몰아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배반했을 때 이미 그 모든 되어질 상황을 알고 계셨지만 아담의 자유의지에 맡겼습니다. 그러나 아담을 말리지 않거나 미리 사탄의 흉계를 막아 주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탓할 수 없습니다. 아담이 범죄치 않게 하려면 인간에게서 자유의지를 뺏고 전부 로보트 같은 인간으로 만들든지 사단을 아예 없애 버려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느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경배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참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해 자신을 배반할 줄 알아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습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이 준비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유다가 배반할 자인 줄 알지만 그를 택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아니라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속사 가운데 제 3, 제 4의 유다는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인간 세상의 어느 집단에나 배반자는 반드시 있습니다. 수난 받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야 스승에게 로마를 무찔러 주는 메시야를 기대했던 유대인 제자 중에서 배반자가 한 명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더 신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미 다 아시고도 유다에게 3년간 한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도 않았고 차별 대우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회계라는 중책을 맡겼습니다. 아마 여러 번 그에게 마음을 고쳐 먹을 기회도 주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까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마26:21)고 회개의 기회를 주었고 심지어 유다가 그 배반할 제자가 자기인가 물었을 때도 "네가 말하였도다"(26:25)라고 직접적으로 마지막 경고까지 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완악하여져 죄 짓는 것 조차 하나님이 막아 주지 않았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책임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유다가 배반할 줄 알고도 택한 것을 가지고 유다에게만 마치 불공평하게 대한 것으로 착각하셔선 안 됩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26:3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유다 뿐 아니라 제자 12명 다 예수님을 버리는 자로 선택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수제자 베드로마저 세 번 부인했지 않습니까? 

이것은 유다에 대한 주님의 형평성의 문제도, 유다가 구원을 받고도 구원이 취소되는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12제자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베드로마저 저주하며 부인했다는 것 자체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삼년을 가르침을 받고 동고동락을 해도 그 깨우침만으로 절대 구원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케 목욕시켜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목욕시킨 후 내 쫓아 내겠습니까? 그럴 것 같으면 왜 목욕한 자는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까? 목욕은 일회로 충분하고 발만 씻으면 되는 것입니다. 발을 안 씻었다고 목욕한 사실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6:4-9

그런데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 드는 성경 근거는 히브리서 6:4-9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 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브리서를 해석하는 근본적인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책의 제목 그대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지은 책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인 수신자가 유대인들이었으며 본 구절이 의미하는 내용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할 수 있는 기적과 표적을 보았고 예수님이 직접 증거하신 말씀도 들었고 부활을 목격했음에도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이후의 유대인들(지금 히브리서의 수신자)도 똑 같이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하여 선조들이 예수님을 못박은 것 같은 잘못을 다시 범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두 번 못 박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 못 박았던 자들과 다름 없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본 구절들의 표현이 마치 구원을 얻은 자가 타락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는 것은 다 같이 "한 번 비췸", "맛보고", "참예 한바 되고", "맛보고" 네 번 모두 일회성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부흥회나 은사 집회 가서 말씀에 은혜 받고 심지어 병이 낫고 방언도 터졌는데 예수님을 믿지는 않는 경우와 같습니다. 성령으로 완전히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 밭에서 채소를 내면 구원을 얻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저주를 받는다고(히6:7,8) 했는데 신약 성경 전체적 맥락에서는 나무가 다르면 다른 열매를 맺는 것이지 나무가 노력한다고 열매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저자가 앞장에서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으로 화합지 아니함이라'(히4:2)고 믿음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히6:6)라는 구절이 논란이 될 소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타락한 자들은 거룩한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 타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은 후에 죄를 지었다고 해서 다시 용서 받지 못한다거나 하나님이 구원을 취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 구절의 앞 뒤 문맥을  살피면 예수님을 못 박는 잘못을 하는 타락입니다. 스스로 예수님의 신성을 끝까지 거부하고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타락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어떤 문제에 봉착하는가 하면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가 예수님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고 성령 세례를 받았으면 성령님이 타락을 막아 주시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듭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경은 분명히 자연인에게 성령의 간섭이 있어야만 예수의 신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확증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처음부터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 받은 자라면 스스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며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령 본 구절이 스스로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타락한 자를 지칭한다 할지라도 처음부터 구원과 상관이 없었던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히브리서 본문과 같은 설명은 이곳과 벧후 2:20-22 두 군데 뿐입니다. 베드로 후서의 경우도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신자들이 선한 생활을 하며  복음을 따르는 듯 하다가 다시 이단 사설에 넘어가 배교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지 거듭난 성도들의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구절에 조금 오해할 소지가 있는 표현이 있을 때는 성경 전체의 맥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은 완전히 거듭난 신자를 두고 윤리적 타락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이야기하고 있지만 구원 자체의 취소에 대해선 어느 곳에도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두 구절로 인해 미혹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이므로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해하셔야 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범죄한 것을 회개케 하여 죄인을 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 자체를 새롭게 바꾸어 범죄 한 것에서 건지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출생이자 새 피조물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구원된 신자를 다시 죽이면 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이 스스로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 박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녔던 자들이 교회도 나오지 않고 도저히 돌아 올 수 없는 것 같은 타락한 겉 모습만 보고는 마치 구원 받은 자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해선 안 됩니다.  교회 안에 거듭난 신자는 사실10-20%에 불과하거나 더 낮을 수도 있습니다. 구원 받았는지 아닌지는 하나님과 본인만이 압니다. 

예수 믿었다는 것, 거듭났다는 것, 구원을 얻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그 형벌을 면한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어떤 선한 행위나 경건한 제사로도 도저히 구원은 불가능했고 주님이 흘리신 보혈로만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확신이 있는 자이며 두 번 다시는 죄의 종과 사단의 노예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돌아 갈 수도 없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이렇게 간단하게 접근해 보시기 바랍니다. 중생의 확신이 있는 자에게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몰랐을 때의 생각과 생활로 다시 되돌아 가기를 원하는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 같습니까? 백이면 백이 '노(No)'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거듭났다고 해서 죄를 안 짓고 윤리적으로 타락에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번 다시 원죄 아래로 돌아가 사단의 종이 되지는 않겠다는 뜻입니다. 본인이 그러지 않겠다는데 왜 하나님이 구원해 놓은 자의 구원을 취소하겠습니까?

[출처: 박진호 목사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