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랜스제일장로교회가 고창현 목사 부임 후 새로운 변화를 겪고 있다.
(Photo : 기독일보) 토랜스제일장로교회가 고창현 목사 부임 후 새로운 변화를 겪고 있다.

‘교회다운 교회, 성도다운 성도’란 말은 무엇일까? 당연히 교회는 교회다울 것이고 성도는 성도다울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까? 상처 입은 이민자들이 모이는 한인교회에 문제가 없을 수는 없지만, 그 문제가 때로는 씻기 힘든 상처로 남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과거 누구누구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면 현재도 일하고 계신 주님을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토랜스제일장로교회가 최근 10년간 겪은 일은 여기서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2016년 1월 이후부터 일어난 일을 통해 미래를 말할 뿐이다.

토랜스제일장로교회 고창현 목사
(Photo : 기독일보) 토랜스제일장로교회 고창현 목사

“제가 한 일이라고는 예배에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려 한 것뿐인데 성도들의 상처가 회복되고 선교에 헌신하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한국 지구촌교회에서 9년간 이동원 목사 설교 통역, 찬양, 장년 교구, 젊은이 사역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고창현 목사가 2016년 첫날 부임했을 때, 토랜스제일장로교회는 여러 가지 아픔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과거와 달랐던 것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는 성도들의 절박함이었다. 한인 교계는 물론, 미국 교단과 심지어 한국에까지 유명했던 이 교회로 고 목사가 부임한다고 할 때 이동원 목사가 말했다.

“고 목사, 예배에 목숨을 걸어. 은혜 받으면 성도는 변화돼.”

엄밀한 의미에서 고 목사는 이민자는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 미국에 온 조기 유학생 출신이다. 그 지역 한인교회에서 그의 성악적 재능을 ‘알아본’ 한 사람의 손에 이끌려 이스트만 음대에 시험을 봤는데 덜컥 합격했다. 그러나 주님은 음대에서의 시간을 통해 그를 빚어가시며 좀 다른 길을 열어가셨다. 바로 목회였다.

그가 처음 간 신학교는 미국 내에서도 상당히 진보적인 콜게이트 로체스터 신학교였다. 당시 신앙생활하던 교회 목사로부터 “복음적인 교회 토양에서 자랐으니 진보적인 신학을 배워 보는 것도 좋겠다”는 조언도 있었고 그 교회 교육 전도사로 섬기기 위해 가까운 신학교를 택한 것이었다.

1990년대 말인데도 이미 동성애자들이 그 학교에 많았으며 다원주의적 신학이 지배적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복음주의적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을 해야 했다. 대신 보수적인 교회가 왜 이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지 그 이유를 반성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프린스턴신학교를 거쳐 복음주의 신학교의 대명사인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졸업했다. 진보의 끝에서 복음주의로 돌아오니 복음주의의 강점과 약점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됐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이민교회에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다. 조기 유학생이던 자신이 자란 곳이며, 도움을 받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구촌교회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목회할 때도 ‘주님이 부르신다면’에 대한 부담이 늘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토랜스제일장로교회에서 청빙이 온 것이다. 아내와 상의하고 곧장 짐을 쌌다. 교회가 내건 조건은 2년 단임이었다. 2년 뒤에는 다시 짐을 싸야 할지도 모르지만, 이민교회에 진 빚을 갚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1년여 만인 2017년 2월에 영구직 목사로 위임받았다. 그러나 이번엔 그가 평상시 생각하고 있었던 ‘5년 재신임’을 조건으로 걸었다. 그는 “모든 교회에 일반화될 수는 없지만,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는 이런 기회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짧게 설명했다.

그는 취임 후 예배와 함께 전도와 선교에 힘을 쏟고 있다. 지역사회와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이 일은 주님의 명령이기도 하지만 토랜스제일장로교회 성도들에겐 한 가지 더한 의미로 다가온다. 서로 싸우는 데에 사용하던 힘을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일이 사용하니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제는 아픔 가운데 교회를 떠났던 형제들이 돌아올 때, 그들을 넉넉한 마음으로 안아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교회다운 교회,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