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돼 있습니다. -편집자 주

◈죄와 중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명령의 오해

신연식 감독은 시사회 당시 <로마서 8:37>이 한국교회의 특정 인물이나 특정 계층이 자행하는 죄악을 폭로하는 데 목적을 둔 영화가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로마서 8:37>은 신앙을 의지해 살고자 하는 이들 모두에게 최우선적으로 다가오는 직접적 현실은 죄의 현실이라는 것을 알리려 한다. 영화는 기독교인의 삶이 자신의 죄든 아니면 타인의 죄든 간에, 기본적으로 죄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죄가 삶의 경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에서 교회는 자유롭지 못하다. 교회는 본원적으로 칭의, 거룩함, 성결함을 사모하고, 그로 인해 경중을 가리지 않고 죄를 드러내 회개하려 하는 공동체이다. 교회가 의로움을 생활의 지향점으로 설정하는 한, 죄로 물든 현실은 교회 내부에서 더 확연하게 진면목을 드러낸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현실에 죄악이 편만하다 해서, 그 죄악을 방치하고, 무마하고, 은폐하는 것은 교회의 본분이 아니다. 죄가 드러나면 그 죄를 지목해 드러내고, 회개를 촉구하고, 필요한 경우 성서에 허락된 범위 안에서 단호하게 단죄하는 것이 죄를 다루는 교회의 지당한 태도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의로움을 위해 죄악의 현실과 투쟁해야 할 본분을 망각하고, 갖가지 변명을 동원하여 죄를 무마하고 은폐하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마 7:5)." 이는 교회 내부에서 죄 문제가 드러날 때마다 어김없이 인용되는 명령들이다.

그러나 과연 이 명령들 속에 내포되어 있는 참 의미를 이해하고 인용하는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다반사다. 이 명령들을 단편적으로 해석하고 받드는 경우,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죄를 대하는 근본적 태도에 심각한 왜곡이 발생한다.

역사상 어떤 교회도 100% 성결한 곳은 없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던 초대교회조차 죄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항상 교회 구성원 중 누군가는 신앙인으로서 합당치 않은 죄를 저지른다. 그러나 이런 허물이 있음에도 완전한 성결을 위해 나아가려는 자세와 심령을 유지하는 교회와, 허물을 의도적으로 용인하고 무마하는 태도를 고수하는 교회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

<로마서 8:37>은 허물을 의도적으로 용인하고 무마하는 교회가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는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왜곡된 '중보(mediation)' 개념을 전달한다. 부순교회 담임목회자 강요섭 목사가 자행한 심중한 죄악을 둘러싸고, 그의 아내, 남동생, 그리고 매제(여동생의 남편)가 중보를 위해 힘쓰는 모습은 사실 죄악의 문제에 단호하게 대처하는 데 주저해 온 한국교회의 고질적 문제이다.

<로마서 8:37>이 이런 잘못된 중보 개념을 전달하게 된 것은 영화 자체의 잘못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 잘못된 중보 개념은 한국교회 자체의 문제이며, 영화는 이를 대다수 한국 기독교인들이 규정하는 방식 그대로 솔직하게 전달했을 뿐이다.

◈죄의 층위: 근원적 죄성과 실제적 죄

죄악을 의도적으로 무마하고 은폐하는 한국교회 내부의 고질화된 정서를 보다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성(sinfulness)과 죄(sin)라는 용어를 구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 용어는 성서에서 주로 원죄(original sin)와 개인의 죄(personal sin)로 구별되어 소개된다. 서로 다른 층위를 점유하고 있는 이 두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에 대한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의 철학과 종교는 형이상학적 사고에 지배되고 있었다.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는 용어는 주전 4세기 마케도니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철학으로부터 유래됐다. 아리스토텔레스 저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 제목이 <형이상학(τὰ μετὰ τὰ φυσικὰ βιβλία, ta meta ta physika biblia)>이다.

로마서 8:37 영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Metaphysics)의 중세 라틴어 역본.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이 책의 내용을 '제일철학'(the first philosophy)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 제목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붙인 것은 아니고, 주전 1세기경 아리스토텔레스 저서 편집자인 로도스의 안드로니쿠스(Andronicus of Rhodes)가 붙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은 이 철학적 작업에 '제일철학(the first philosophy)'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τὰ μετὰ τὰ φυσικὰ βιβλία(ta meta ta physika biblia)'에서 μετὰ(meta)는 '-이후, -이상, -뒤로 더 나아간 영역'을, 'φυσικὰ'(physika)는 '자연학'을, 그리고 'βιβλία(biblia)'는 '책'을 각각 의미한다. 즉, '형이상학'이란 '자연학 그 이후 혹은 이상의 영역에 관한 책'이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여기서 자연학을 대략적으로 자연의 현상과 원리에 대한 학문으로 본다면, 형이상학이란 그 자연 현상과 원리 이면의 근원적인 영역에 대한 학문으로 규정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연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근원적 원리이자 동력으로서 최고 존재자를 찾아가는 학문이라 할 수 있고, 이는 곧 신 혹은 신적인 것에 대한 학문을 말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제일'철학, 측 최고의 존재 원리에 대한 철학으로 명명했던 것이다.

자연학은 자연 내부에서 현상과 원리를 구별해서 보여주고, 형이상학은 그런 자연의 현상과 원리 이면에 있는 존재의 본질을 밝히는 학문인 것이다. 이런 사고는 고대인들이 갖고 있던 이원적 세계 이해, 즉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 현실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을 구분 혹은 구별하는 세계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주후 1세기경 유대교가 기독교로 갱신되었을 때, 즉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이 전파되었을 때, 구약성서의 히브리적 개념들 중 다수는 이원적 세계 이해의 구도 안에서 보다 완전하게 재해석됐다. 사도 요한이나 바울의 경우, 구약성서와 그리스도의 말씀을 적절하게 이해시키기 위해 고대 그리스 형이상학의 일부 용어와 사고의 얼개를 절제된 방식으로 차용했다.

이 과정에서 죄의 정체도 현실적 차원과 근원적 차원의 이원적 구도 안에서 해명됐는데, 이런 해명이 가장 길고 자세하게 기록된 책이 바로 로마서이다. 영화가 <로마서 8:37>이란 제목을 단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작용하고 있다. 로마서 전체를 통해 집중적으로 해명되는 바는, 바로 구약에 기록된 아담의 죄와 현재 우리가 현실에서 저지르고 있는 죄악 간의 관계이다. 이 관계가 해명되면, 여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8:37 영화
▲시사회 인터뷰 중인 신연식 감독과 배우 이현호(안기섭 간사 역). 인터뷰 중 신 감독은 원래 영화 제목으로 로마서 6장 말씀을 선정하려 했다고 밝혔다. 이유는 6장이 죄의 무게에 대해서 가장 깊게 전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영화는 세상과 교회에 편만한 죄의 문제를 조명하는 데 집중한다.

죄에 대한 로마서의 자세한 논의는, 훗날 신학자들이 정리한 바에 의하면 죄성과 죄를 구별해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죄성은 형이상학적 차원의 실재로, 죄는 실제적 차원의 경험으로 각각 간주된다. 이 둘은 현실에서는 모두 후자, 즉 죄(의 행위)로 경험되지만, 직접적이고 현실적으로 경험되는 죄 이면에는 이 모든 죄를 유발하는 죄중의 죄, 즉 죄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 근원적 죄로서의 죄성은 아담의 죄로부터 유래된 것으로서,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 단절, 불순종, 불신앙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근원적 죄성과 실제적 죄를 구별해 보여주기 위해 그리스 철학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구도를 일부 차용한다. 그 의도는 사람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의 문제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죄의 문제를 구별해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근원적 죄성은 사람의 힘으로 해결하기 불가능할 지경으로 근원적이고 불가항력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자발적 믿음을 조건으로 수여되는 칭의(justification)의 은혜, 그리고 이 칭의의 은혜를 힘입고 있음을 확증하고 고백하는 침례가 요청된다. 이러한 층위에서의 죄란 근원적 불신앙이며, 이것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복음을 믿는 신앙에의 의지가 필수적이다.

반면 실제적 죄는 근원적 죄성의 문제가 선행적으로 해결되어야 극복될 수 있는 문제다. 여기서 '선행적으로'라는 표현은 시간적 의미보다 근거 혹은 조건으로서의 우선순위를 염두에 둔 것이다. 실제적 죄는 매일의 생활에서 개인이 어떤 생각과 감정과 행위를 따를지 결정하는 가운데 발생한다. 이러한 층위에서의 죄란 현실적 불순종이며, 이것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죄악을 멀리하는 순종에의 의지가 필수적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바는, 근원적 죄성이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의존을 통해서만 도말되는 반면, 실제적 죄는 개인이 그 책임을 절감하는 결단과 선택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차이에 주목해야 중보의 참 의미를 올바르게 되새길 수 있다.

협의의 관점에서 중보란 그리스도의 중재적 공로를 가리키는 것으로, 죄로 인해 '근원적으로' 단절된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를 순종과 희생을 통해 다시 연결해 주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중보란 모든 인류에게 차별없이 수여된 하나님의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이다.

한국교회에서 중보라 할 때는 이 협의의 중보 개념이 일정 부분 확장된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광의의 중보는 그리스도의 선행은총을 기반으로 기독교인의 일상적 생각과 생활과 환경에까지 하나님께서 관여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관여와 역사는 현실의 차원에서 기독교인들의 기도에 의해 실현되므로, 광의의 중보 개념에는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의 응답을 불러옴'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그런데 중보라는 말이 이처럼 사람의 기도행위를 지목할 경우, 하나님의 은혜가 수여되는 방식과 범위에 대한 오해가 발생할 소지가 다분하다. 광의의 중보 개념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일상적이고 실제적인 차원에서 실현되는 하나님의 역사는 일단 근원적 죄의 사함이라는 선행은총, 즉 협의의 중보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협의의 중보 문제를 실제적 죄의 회개에까지 결부시키는 경우, 죄성과 죄의 두 층위에 대한 이해, 그리고 사람의 자유의지가 가진 가능성에 대한 이해에 심각한 결함을 발생시킨다.

◈죄와 중보: 실제적 죄의 중보?

<로마서 8:37>의 결말부에서 안기섭 간사는 부순교회 담임목회자 강요섭 목사의 성범죄를 폭로하고 강 목사의 면직을 요청하다, 강 목사를 지지하는 교회 내 친위세력에 의해 노회 내부에서 매장당하는 처지에 이른다. 크게 상심한 안기섭 간사는 장인이 시무하는 시골 교회로 내려와 있다, 장인의 권고로 새벽기도 인도와 설교를 맡게 된다. 이 설교 장면에서 안기섭 간사는 개혁주의 전적 타락론과 예정론을 훌륭하게 반영한 설교를 전한다.

로마서 8:37 영화
▲새벽기도회 설교 중인 안기섭 간사. 개혁주의 신학을 훌륭하게 반영하는 설교를 전한다.

"제단은 인간이 계명을 어기기 전에 지어졌습니다. 이미 인간은 계명을 지킬 수 없음이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 우리는 스스로 변할 수 없기에 우상을 좇습니다. ... 우리의 분별력은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라고도, 우상을 만들라고도, 남을 비방하라고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성령은 서로 중보하기 위해 보내신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이 근원적 죄성 때문에 계명을 전부 지킬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약에도 신실한 자들이 전무하지는 않았다. 여기에 더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근원적 죄성이 해결된 신약 시대에는, 각각의 의지로 수행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가르침이 부가된다.

"우리 안에 성령은 서로 중보하기 위해 보내신 것"이라는 설교가 나오는 장면에서, 영화는 변질되고 타락해 버린 강요섭 목사의 회개와 갱신을 위해 눈물로 절규하다 끝내 자살해 버린 강목사의 사모, 그리고 이 사모의 부탁으로 역시 눈물로 기도하는 강 목사의 동생을 비춘다.

이로써 영화가 전하는 '중보'의 의미는 단순히 성도들이 서로의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거나, 전도대상자를 위해 기도하거나, 난관에 처한 상황에서 기도 응답을 위해 기도하는 수준의 개념을 넘어서 있다. <로마서 8:37>은 죄인(강 목사)이 자기 의지로 저지른 죄, 그래서 죄인 스스로의 의지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죄까지 다른 이가 떠맡아 기도하는 행위를 '중보'로 표현하고 있다.

이로써 영화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스스로의 의지로는 회개의 결단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존재하며, 이런 이들에게는 비판과 비방이 아닌 중보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사고를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고는 모두가 죄인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긍휼한 마음으로 돌아봐야 한다는 한국교회 특유의 공동체적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이런 정서는 근원적 죄성이라는 차원에서는 잘못된 점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신앙을 갖기 전의 사람은 모두가 근원적으로 죄인이기에, 앞서 기독교인 된 이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기를 기도하고 전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중보가 그들에게 이르게 할 의무를 갖는다.

그러나 근원적 죄성이 아닌 실제적 죄의 행위라는 차원에서까지 타인의 기도에 의한 중보가 실현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소지가 남는다. 이는 믿는 자의 행함과 성결을 강조하는 신약성서의 가르침 때문에도 그렇고, 현실적으로 관찰되고 경험되는 바에 의해서도 그렇다.

로마서 8:37 영화
▲작중 강요섭 목사의 회개를 위해 '대신'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강 목사의 동생. 그러나 강 목사는 끝내 자기 범죄를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다.

영화 전체는 실제적 죄의 행위까지도 중보로 해결돼야 할 대상의 범위에 포함시킨다. 그리고 그 근거로 '모두가 타락한 죄인'이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실제로 한국교회 내부에서는 이 논리를 대표하는 성구로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이 자주 인용된다. 영화에 주로 등장하는 목회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큰 도덕적 흠결이 없는 빈민촌 목회자 김 목사의 대사 역시 이런 논리를 대변하고 있다. "나쁜 놈이 진짜 나쁜 건, 너무 나빠 가지고 나도 나쁜 놈이라는 걸 까먹게 만든다는 거야."

영화는 이런 논리를 부각시키기 위해 몇 가지 무리수로 보이는 장면과 대사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부분이 강 목사의 성범죄에 가장 심하게 희생된 부순교회 신도이자 봉사자 지민의 대사다. "거짓 평화, 그걸 그분(강 목사)도 느꼈을 거에요. 거기에 취했던 게 저의 죄였던 거 같아요. 그날 그런 일(성폭행)이 있고 나서도 그분과 관계가 끊어질까봐 겁이 났었으니까. 전 우상을 섬긴 거였어요."

다음으로는 교회 내 공의의 구현과 성범죄 피해자 지민의 구제에 가장 앞섰던 안기섭 간사의 마지막 기도 부분이다. "우리의 사랑은 늘 서툴고 이기적이어서 아픔이 많습니다. 실수를 할 때 비판하고 조롱했지, 중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의 사랑이 필요한 건데 속좁게 외면했습니다."

이 기도 가운데서 안기섭 간사는 자신이 강 목사의 성범죄를 폭로하고 면직을 요청했던 것을 후회하는 심정을 내비친다. 죄를 지은 강 목사를 위해 기도해 주기 전 단죄하는 데 주력했던 자신의 처사가 부당했다고 여기는 듯하다.

영화의 제목 <로마서 8:37>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붙여진 것이다. 영화 내용 전체는 한국교회의 심각한 도덕적 타락을 조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제목은 반어법이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아무리 교회 내 지도층이 추락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교회는 중보를 통해 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소망이 영화의 제목에 반영되어 있다.

로마서 8:37 영화
▲<로마서 8:37>의 마지막 장면. 안기섭 간사의 기도가 이어진다. 영화는 한국교회에 아직 이런 인물들이 있기에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회개할 자를 위해 대신 기도해 주어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계속된다면, 한국교회가 죄를 이겨나갈 힘은 고갈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강 목사의 의도적이고 일방적인 성범죄를 피해자인 지민, 그리고 교회 내 공의 확립에 힘쓴 기섭 스스로의 죄로 돌려 버리는 사고는 억견(臆見)적으로 판단될 수밖에 없다. 대체 이런 억견은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 바로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죄인이라는 사고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고는 한국교회 내부의 도덕적 능력을 좀먹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의 교의는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에 의해 확고하게 정립되고, 루터(Martin Luther)와 칼빈(John Calvin)에 의해 강화됐다. 이 교의는 하나님의 선행은총을 부각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무가치함과 비천함을 되새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지만, 한편으로 잘못된 중보 개념과 극단적 칼빈주의의 근거를 이루기도 한다. 그래서 전적 타락 교의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교회는 실제적 죄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를 확률이 높다.

칼빈 스스로도 이런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라는 고유의 예정론적 성화 개념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존 웨슬리(John Wesley)에 의해 종합되고 정리된 아르미니우스주의 구원론을 지지하는 감리교는 기독교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과 제2의 축복(the second blessing)이라는 교의를 통해 신앙을 갖게 된 후의 성화 문제를 심각하게 다뤘다.

양자는 성화를 향한 의지의 근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피력하지만, 중생 체험 이후 당연하게 뒤따라야 할 성결한 삶의 필수성에 대한 인식에서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저지른 죄의 변명과 은폐에 급급한 나머지, 성화의 교의들은 뒤로 무른 채 전적 타락과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에만 의존하는 성향을 보인다.

<로마서 8:37>은 한국교회 내부에서 이런 성향이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모습까지 포착해 묘사하고 있다. 영화에서 제시된 왜곡된 중보 개념은 영화의 서사 자체의 문제로 인해 나온 것이 아니라, 이 서사가 반영하고 있는 한국교회 본연의 문제 때문에 나오게 된 것이다.

로마서 8:37 영화
▲영화 <밀양>에서 아들의 유괴살인범을 만나 용서한다는 말을 전하려는 이신애(전도연 분). 한국교회의 잘못된 중보, 잘못된 용서 개념이 낳은 비극의 장면이다.

이 왜곡된 중보 개념의 제시를 목격하면서, 개인적으로는 2007년 개봉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밀양>에서 원래 알던 주변인에게 아들을 납치당하고 살해당한 피아노학원 강사 이신애(전도연 분)는 교회로부터 큰 위안을 얻게 된다. 영화 속에서 교회는 이신애에게 죄인을 용서하라는 가르침을 전하는 데 주력한다.

이에 이신애는 교도소에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범인을 직접 찾아가 용서의 마음을 전달하려 하는데, 여기서 유괴범이 한 말 때문에 이신애는 한국교회 전체에 대해 완전하게 절망하고 만다.

다음은 바로 이 유괴범의 대사다. "하나님이 이 죄많은 놈한테 손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가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 그라고 나서부터 마음에 평화를 얻었습니다. ... 하루하루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이 대사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다. 그러나 자신이 고통의 나락에 떨어뜨린 피해자 이신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용서받았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는 유괴범의 태도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모든 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 어떤 죄는 다른 사람을 고통에 빠지게 한다. 이런 실제적 죄는 하나님에 대한 회개도 중요하지만, 법적 처벌과 함께 피해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죄도 동반되어야 한다. 그것이 죄를 진정 자기의 죄로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의 태도여야 함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런 회개의 심령이 필수적임을 무시한 채, 모두가 죄인이라는 동질감과 왜곡된 중보의 사랑을 명분 삼아 서로 죄를 덮어주고 무마해주는 가운데 얻는 화합, 즉 <로마서 8:37>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인 '거짓 평화와 거짓 화합' 안에 안주하도록 가르쳐 왔다. 결국 이런 가르침이 유발하는 폐해들은 <밀양>이나 <로마서 8:37> 같은 영화 속에서 상당히 진지하고도 신랄한 비판의 소재로 채택되기에 이른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8:37>에서 한국교회의 희망으로 제시된 의인들의 중보 노력에는 심각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게 존재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실제적 죄의 행위를 서로 덮어주는 평화, 혹은 이 죄악의 책임을 타인이 대신 짊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기독교인 각 개인이 자기의 죄를 이기는 평화를 절실히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교회들이 암울하게도 여전히 왜곡된 중보 개념에 희망을 걸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문제에 적극 대처하지 않는 한, 한국교회는 내부적으로 기독교적 양심과 도덕의 힘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형 포털사이트에서 <로마서 8:37>의 감상평 및 평점은 전반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그러나 일부의 감상평이나 전문가 평점은 이 영화가 전달하고 있는 왜곡된 죄인 개념과 중보 개념을 질타하고 경종을 울린다.

로마서 8:37 영화
▲기자, 평론가 평점에서 <로마서 8:37>에 가장 낮은 점수를 준 씨네21의 황진미 평론가. 한줄평을 통해 한국교회의 잘못된 중보 개념을 지적하고 있다.

성서적으로든 상식적으로든, 죄의 회개와 극복을 죄지은 당사자에게 직접 요구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일반적 행태는 분별력 있는 이들 누구에게나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게 되기 마련이다. <>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