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to Korea
(Photo : ) Grace to Korea

Question:성경이 그 당대의 가치관이나 지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요? 제가 읽기로는 고린도서에 여자들이 나와서 앞에서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새도 똑 같이 여자들이 교회에서 발언하는 것을 금지 해야 하나요? 

 


이것은 정말 도리어 사회의 소외계층에게 발언권을 허락하시고 이전의 거의 카스트 제도와 가까웠던 유대사회의 대변혁을 일으키신 주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 아닐런지요? 즉 여자들과 대화하는 것도 금지된 그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많은 여자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고치시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들로 인식하던 유대사회에 율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동으로 모든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져야 한다고 말하시던 주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에서는 정말로 뚱딴지 같이 예수님의 그 공로사역을 완전히 무시하듯이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수 없고 그리고 행위가 가미되어야지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에 보면 개미가 감독자가 없이도 그렇게 자기 일을 잘 하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개미사회같이 잘 조직된 계급 사회도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개미가 두령이 없이도 일을 열심히 한다는 그 말씀은 아무리 봐도 당대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잠언기자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러면 과연 성경의 무오류라는것에 대해서 어떠케 생각해야 할까여? 정말 그렇게 무오류한 것인지 무언가 그 영감은 받았지만 분명히 그 당대의 가치관에 구속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정말 궁금하고요, 저의 생각에는 짧은소견이지만 그런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허락하신 것이 아닐런지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의지 가운데서 성경을 작성하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그 전체적인 개관을 보여주신것이 아닐까여? 그러니까 즉 창세기의 그런 어려운 말들이나 요한계시록의 그 어렵고 모호한 말들은 다 그런 영감안에서 본 비전들을 기자들이 적은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그 어구 하나 하나가 오류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적인 뜻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으러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그 무오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결국에는 오류에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운영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Answer: 1. 하나님의 진리는 불변하지만 그 메시지가 주어지는 수단이나 방법은 항상 그 시대의 상황에 알맞게 전달됩니다. 이것은 그 메시지를 받는 수신인들이 특수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입니다. 수쳔년 전의 사람들에게 양자역학이나 블랙 홀 이야기를 하면 전혀 알아들을 리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 문화라는 포장을 뜯고 깊이 들어가 보면 모든 시대에 적용이 되는 보편적인 진리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보편적인 원리들을 찾아서 오늘의 우리에게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질문하신 내용을 가지고 이 점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2. 여자들의 발언을 금지한 일에 대해서!


  여자들의 발언을 금지한 내용은 고린도서가 아니라 (딤전 2:12)에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후서는 아시는 대로 바울이 말년에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전해준 목회 지침서입니다. 이 책은 바울이 죽기 전에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목회의 원칙과 기타 목회에서 명심하거나 참고할 만한 일들을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목회자에게 긴요한 내용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바로 님이 지적하신 "교회에서 여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에서 여자들을 다음과 같이 대하도록 부탁하고 있습니다.
1) 외적 단장보다 선행과 내적인 단장을 더욱 강조할 것(딤전 2:9-10) 2) 순종하며 조용히 배우게 할 것(딤전 2:11).3) 가르치는 일(설교권)과 남자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일(행정, 치리)을 허락하지 말고 조용하게 할 것(2:12)
바울이 디모데에게 여자 성도들의 순종과 침묵을 요구한 것은 말 많은 여자들로 인해 여러 가지 시험과 어려움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현재 목회 현장에서도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상황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일(설교하는 일)과 남자를 다스리는 일(행정, 치리)을 금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교회에서 설교와 행정을 담당하는 일이 여자에게 주어진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자 목사 제도와 안수 문제가 제기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현재도 이 문제에 대해서 각 교단에서 여러 가지 논란이 일고 있다면...2000년 전에 이러한 일이 금지된 것은 당연한 일로 보입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여자가 설교와 행정권을 갖는 것이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그 후에 남자로부터 여자를 만드셨다고 말합니다(딤전 2:13).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이름을 남자(이쉬)로부터 나왔다는 뜻을 가진 여자(이솨)라고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창조 원리에 근거해서 교회 공동체에서 설교와 행정권을 남자가 담당하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사탄의 유혹을 먼저 받은 것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딤전 2:14). 여자의 경우 남자보다 유혹을 받기가 더 쉽기 때문에 바울은 설교권과 행정권을 여자보다는 남자가 갖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물론 현대에 와서 여성 목사들이 안수를 받기도 하고, 여성들의 권한이 많이 높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또 실제로 여성들이 훌륭하게 교회를 인도하는 경우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는 매우 극소수에 속하고...지금도 여전히 대부분의 교회는 남자 목회자에 의해 인도되고 있습니다.
구약의 경우를 보면 드보라와 같은 훌륭한 영적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 역시 남성(발락?)을 선두에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락(?)이 믿음이 없어서 그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했을 때에, 드보라는 부득불 그와 함께 동행하는 일을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서 발락은 그 날 모든 영광을 무명의 한 여인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특수한 경우에는 얼마든지 여성이 영적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드보라 역시 이 일이 정상적이며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현대에 와서 소수의 교회가 여성에 의해 인도되는 경우가 있지만, 이러한 예는 일반적인 일이 아니고 특수한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여성의 인권을 낮추려는 것이 아니라, 창조 때부터 남자와 여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바울 만큼 여성의 인권에 대해서 강조한 사람도 드뭅니다. 그의 서신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바울은 그녀들을 자기의 동역자로 인정을 했고, 또 어느 경우에는 남자보다 여인을 앞세우기도 했습니다(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하게 표현했습니다. 

3. 야고보서가 행위를 강조하는 이유


  이것은 예수를 믿은 성도들이 입으로만 읻는다고 하면서 실제로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역시 바리새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요구하신 적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믿음이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 그 믿음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만일 현대교회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저 역시 이러한 설교를 할 것입니다.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고, 실제 생활 속에서는 전혀 믿는 사람다운 모습이 나타나지 않으면 "저 사람이 정말 성령을 통해 중생한 사람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될 것입니다.
주님 역시 중생하지 못한 니고데모가 왔을 때에 그에게 "네가 다시 나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그는 유대인의 존경받는 선생이었지만, 그는 성령을 통해 태어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주님께서 영적으로 하시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야고보 사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은 입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들이 수반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열매가 없다면 그가 정말 믿는 것인지 아닌지 의심을 할 수밖에 없겠지요!

4. (잠 6:6-8)에 나오는 개미 문제


  (잠 6:6-8)에서 지혜자는 게으른 자에게 개미에게 가서 부지런함을 배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지혜자는 개미를 보면서 어떤 면에서 인간보다 낫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지혜자는 개미가 주어진 본능을 따라 먹을 것을 여름과 추수 때에 모아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개미에게 있어서 여름과 추수 때는 매우 긴 시간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생과도 같은 긴 시간입니다. 이러한 긴 시간을 개미는 본능을 따라 공동체를 위해 쉬지 않고 겨울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노아가 120년 동안을 믿음으로 기다리면서 방주를 예비한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우기 지혜자는 개미가 인간이 받은 탁월한 은사를 받지 못했음에도 이러한 삶을 사는 것에 더욱 감탄을 했습니다. 인간 세상에는 잘못 하면 그들을 재판하는 재판관도 있고, 그들을 잡아 처리하는 경찰이나 군대도 있으며, 그들을 통치하는 지도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보며 영원을 위해 주어진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사용할 줄을 모르고 낭비해 버립니다. 그러나 개미는 이러한 은사를 받지 않고도 훌륭하게 긴 시간을 미래를 위해 준비합니다. 개미의 경우 존재하는 계급은 수캐미, 여왕개미, 병정 개미, 일개미 정도입니다. 수캐미와 여왕 개미는 날개가 있는 데, 수캐미는 주로 여왕 개미와 교배를 하고 죽습니다. 그리고 여왕 개미는 수많은 수캐미와 교배를 하고 정자를 보관한 후에(이것을 결혼 비행이라고 부름), 날개를 떼어내고 작은 집에 들어가서 새끼를 낳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영 개미가 낳은 개미 중에서 날개가 없는 개미는 "일개미"가 됩니다. 그리고 머리가 단단하고 큰 소수의 병정 개미가 있는데, 이들은 적을 막고 단단한 물건을 부수는 일을 합니다. 이러한 개미 사회는 사법기관(재판관)이나, 경찰력, 또는 통치자가 없습니다(우리 말 성경에 두령, 간역자, 주권자로 번역된 말은 재판관, 경찰(군대)력, 통치자를 의미함). 그들은 단지 모게사회와 같이 일개미들을 낳은 여왕 개미를 중심으로 공동체 생활을 할 뿐입니다. 
이러한 개미의 집단은 인간에 비해 열악한 집단체제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개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노아와 같이 공동체를 위해 부지런히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인간 세계의 훌륭한 모든 제도(입법, 사법, 행정)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재능을 가지고 미래를 위해 부지런히 준비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 지혜자가 게으른 자에게 가서 이러한 개미의 부지런함과 근면함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한 것을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5. 성경 무오류 문제에 대해서!


  저는 성경 기자들이 기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적었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글자가 무오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성경 기자들을 통해 성경을 기록할 때에 그들이 가진 경험, 사상, 생각 등을 모두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전해주시려는 구원의 계획과 뜻을 오류없이 전달해주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20년이 넘게 매일 성경을 연구해왔지만, 아직까지 성경에서 오류가 있는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난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면, 그 본문이 옳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곤 했습니다. 저 역시 때로 성경을 연구하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그 본문이 이해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혹시 있을 때에도, 놀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 부분도 깨닫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성경을 기록한 분들이 너무나 (성령 안에서) 신실한 분이었으며, 또 그들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출처:biblenar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