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장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기법(1)

인간의 정신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이 존재한다. 인간의 정신에서 의식은 현실세계이면서 논리의 세계요, 무의식은 이상이나 환상의 세계이면서 비논리의 세계이다. 이처럼 인간은 삶에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살아가야 하지만, 정신에서는 의식되는 세계와 잘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 이런 것에 균형을 이루는 상태가 건강한 정신이라면, 그 반대로 불균형을 이루게 되면 병리적인 상태가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우리는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기법에 대해서 더 잘 알아야 한다.

1.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

의식과 무의식은 정신의 세계에서 중요한 두 체계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이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기초한다.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된 정신을 갖고 있기에 두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 이런 두 세계는 마치 현실의 세계와 환상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의식과 무의식의 차이를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정신질병에 걸려 있는 것으로 진단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와 그 특징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1) 자아가 주체가 되는 의식

인간의 정신에서 의식(意識, consciousness)이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이다. 의식은 간단하게 감각하거나 인식하는 모든 작용을 말한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는 "그 사람은 구조된 직후에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마치 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은 일중일 동안이나 병원 신세를 진후에야 겨우 의식을 찾았다" 등의 말을 하게 된다. 때로 이런 의식은 삶이나 역사와 같은 대상에 대한 올바르고 제대로 된 인식이나 판단하는 작용에도 동일하게 사용된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의식하는 주체를 자아(Ego)로 인식한다. 자아가 존재하기에 의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다. 그러니까 의식하는 주체는 바로 자아라는 말이다. 최근 뇌-과학의 발전은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여겨진 의식의 본성을 해명하는 중요한 실마리를 잡은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그에 대한 반론 역시 뜨겁다. 이런 사정은 의식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라는 점을 보여준다. 의식에 대한 자연과학적 설명들은 모두 인과관계에 대한 해명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방식은 의식의 다양한 작용들을 제대로 해명해 주지 못한다. 특히 자극과 반응이라는 도식으로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다양한 의미작용들을 구분해 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력을 갖지 못한다. 이러한 의식의 중층적 작용은 그러나 우리 모두가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의식에 대해 더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 우리는 의식수준의 5단계를 알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의식수준의 5단계는 의식하는 정도에 따라 명료, 기면, 혼미, 반(伴)혼수, 혼수 등으로 구분된다. 명료(Alert)는 정상적인 의식상태로 시각, 청각, 기타 감각에 대한 자극에 적절한 반응을 즉시 보여주는 상태다. 기면(drows)은 졸음이 오는 상태로서 자극에 대한 반응이 느리고 불완전한 상태다. 이때 반응을 보기 위해서는 자극의 강도를 증가시켜야 하는데, 여기에는 질문에 대한 혼돈이 있고 때로는 섬망, 불안을 나타난다.

혼미(stupor)는 계속적으로 큰소리, 밝은 광선, 자극 등의 강력한 자극을 주면 반응을 나타내는 상태다. 이 혼미에서는 간단한 질문에 한두 마디 단어로 대답을 보이고, 통각 자극에는 더 이상의 자극을 피하려는 행동을 보이기도 하며, 꼬집으면 다른 한 손으로 치울 수 있다. 반혼수(semicoma)는 자발적인 근육의 움직임이 거의 없고, 고통스러운 자극을 주었을 때 어느 정도 피하려는 반응 보이고, 꼬집힌 손을 치우며, 신음소리, 중얼 거리기도 한다. 혼수(coma)는 모든 자극에 반응 없는 상태이며, 뇌의 연수는 기능을 유지하고 있으며 빛에 대한 동공반사도 존재한다.

2) 자기가 주체가 되는 무의식

인간의 정신에서 의식이 아닌 다른 세계를 우리는 무의식이라 부른다. 인간의 마음 또는 정신은 표층의 마음인 의식과 심층의 마음인 잠재의식으로 구분되고 있다. 이 심층의 마음은 무의식적인 마음을 말하는 것인데, 무의식은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하나가 내부의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무의식의 상태, 즉 사람이 마취제로 잠들거나 타격을 받아 정신을 잃은 혼수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로버트 비너(Robert Winner)는 인공두뇌학 지식을 발전시킨 최초의 사람인데, 그 지식이란 무의식이 두뇌를 통해서 전기계산기처럼 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순전히 기계적이고 복잡해서 가장 정밀한 계산기라도 인간의 두뇌에다 비교한다면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 이론은 무의식이 사고하는 능력을 부정하는 것으로 일단의 심리학자와 행동주의자는, 인간은 환경과 인간에게 일어나는 것에 의하여 완전히 지배된다고 믿고, 잠재의식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러나 이 개념은 현대 심리학자들에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생각하고 사고할 수 있는 내적 마음의 존재를 확실히 보여주는 자동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로도 반증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정신에서 무의식의 작용이 일반화 될 정도로 확산되어 상용화되고 있다.

무의식과 관련하여 분석심리학에서는 자기(Self)가 주체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의식의 주체가 자아이듯이, 무의식을 움직이는 주체가 자기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의식의 작용이 정신에서 일어나는 알기 위해서 우리는 꿈-분석을 하게 된다. 이때 환자의 꿈-분석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활동을 이해하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여기에서 상징이 전제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상징과 관련된 산물의 몇 가지는 융의 특수한 저서로서 출판되었다. 어느 여성 환자의 무의식 내용이 붕괴된다면, 그녀는 항상 비슷한 종류의 환상을 산출하게 될 것이다. 그 가운데는 반드시 나타나는 남성의 영웅적인 모습이 바로 아니무스이기 때문이다.

3) 무의식의 존재와 인격의 변형

인간의 정신에서 의식과 무의식, 또는 무의식과 의식은 균형적인 상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의 심각한 불균형은 정신병을 초래한다는 점에서다. 어떤 사람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지나친 환상에 빠져 있다면, 이는 정신의 두 요소인 의식과 무의식이 불균형을 초래한 결과이다. 사람에게 때로 환상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지나칠 때 의식을 압도하여 정신의 문제를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어떤 사람이 지나치게 환상에 빠져 있다면, 그 환상적인 체험의 결과는 점진적인 변형과 자율적 콤플렉스의 해소를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변형은 바로 무의식과 대결하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만약 변형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의식은 어떤 축소되지 않는 조건적 작용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둘 중의 하나인데, 어떤 경우에서는 우리의 모든 분석과 이해에도 불구하고 노이로제 증상을 유지하게 되거나 노이로제와 같이 힘든 강압적 전이(轉移, Uebertragung)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서는 암시, 선한 의지 그리고 단순히 축소적인 이해가 무의식의 힘이 파괴되는 것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분석자가 무의식에 몰두할 때에 특이한 무의식과의 대결을 결심해야만 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물론 무의식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서는 분석자가 무의식을 해석할 수 있기 위하여 이미 사전에 무의식에 관하여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즉 무의식과의 대결의 경우에서는 무의식의 해석보다는 다른 어떤 것이 중요하다. 즉 환상의 형태에서 의식에 나타나는 무의식적 과정의 분리가 중요한 것이다.      

2. 의식과 무의식의 분석

의식과 무의식을 분석한다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도 의식과 무의식을 구분하여 그것이 얼마나 현실적인 것인가, 아니면 비현실적인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런 것은 치료적인 의미가 아니고 단순히 현실을 기준으로 하여 무의식을 구분하자는 것에 비중을 둔다. 그러나 심리학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구분하는 것은 치료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분석심리학에서 의식에서 문제되는 것을 무의식에서 찾아서 그 원인을 알아서 인격의 통합 내지는 치료하자는데 목적이 있다.

1) 무의식의 분석에서 환상의 해석

무의식을 분석함에 있어서 환상의 해석을 모색할 수 있다. 환상은 환자의 무의식을 잘 알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를 구분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환상과 환타지의 차이다. 환상(vision)은 현실과 어느 정도 결부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것에 대한 도피 혹은 의식에 의해 환상성과 이어지는 개념이다.

그런가 하면 환타지(fantasy)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면서 오로지 환상성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환타지는 형식상의 구애를 받지 않은 자유로운 감성과 생각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상상이다. 그러면 심리학에서는 환상을 더 병리적인 문제로 삼는다. 이런 경우 환상은 현실적 기초도 가능성도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분석에서 환상의 해석을 중요시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여러 사례에서 환자는 발생된 환상의 의미로부터 어떤 예감을 갖는다는 사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환자가 환상을 완전히 체험하고 그리고 지적인 이해가 체험의 총체성에 속해있다는 한에서 또한 환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무의식의 분석에서 환상의 이해에다 반드시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다만 치료자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환상의 이해를 가질 수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분석가에게는 환상을 해석하는 기술이 요구된다. 근본적인 것이 환상의 해석이나 이해가 아니라 환자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알프레드 쿠빈(Alfred Kubin)은 다른 측면, 즉 무의식의 매우 훌륭한 표식을 제공하였다. 그는 예술가가 무의식에서 체험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 체험이라는 의미에서 완벽하지 않은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 책을 읽는 사람은 그런 불완전성을 책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예술가의 세계에서 무의식을 깨달았고 체험된 것이지만 인간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체험 아래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그것은 저자의 인격이 환상(Vision)에는 수동적으로 폐쇄될 뿐 아니라 환상의 모습이 완벽한 의식성과 함께 할 때는 반응적 및 행동적으로 대립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의식의 환상이 형성되는 것에 대한 체험이다.

2) 무의식과의 대면

무의식과의 대면은 무의식에 대립된 의식의 입장을 요구한다. 융은 이에 대하여 환상을 가진 남성 환자를 예로 든다. "그는 마치 그녀의 약혼녀가 강 저편에서 길 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보고 있다. 때는 겨울이며 강은 얼음이 얼어 있다. 그녀는 얼음 위로 달려 나오며 그는 그녀의 뒤를 따른다. 그녀는 계속 걸어가고 있고 거기 얼음은 구멍이 나 있었다. 그런데 어둠이 내리 깔렸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넘어질까봐 겁을 낸다. 실제로 그녀는 갈라진 얼음구덩이에 빠졌고 그는 그녀를 슬프게 보고 있다." 이 부분은 의식의 태도를 인식하게 만드는데, 이는 의식의 태도가 인지적 및 수동적으로 견디게 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상태는 환상의 상(像)이 단순하게 보이고 느껴진 상태로서 이른바 이차원적인 것이다. 그 환자 자신이 환상의 상에 불만족스럽게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환상은 비록 외관상으로 또는 감각적 자극이기는 하나 꿈과 같은 비현실적인 하나의 단순한 상으로 남아 있다. 이런 비현실은 환자 자신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가운데 있지 않다는 데에 기인한다.

만약 이런 환상이 현실이었다면 그는 자살을 수행할 때 자기의 약혼녀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쉽게 그녀를 데려올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녀는 갈라진 얼음부분을 뛰어넘어 신체적으로 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환상에서 취한 태도처럼 현실에서 그런 태도를 취한다면 그는 분명히 정신이 마비된 상태일 것이다. 그녀가 자살을 시도할 때에 거기에 전혀 거침이 없는 공포상태이거나 무의식적 사고의 상태라는 것이라는 점에서다.

일반적으로 그가 환상에서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태도로 볼 때는 무의식의 활동에 이르는 한 표현이다. 이제 그는 무의식에 의해 매료되고 몽롱해진 상태이다. 그는 현실에서는 아무 쓸모없다는 것, 그는 희망이 없는 악질 유전을 보유한 것, 자기의 뇌는 퇴화된 것 등의 모든 가능한 우울한 상상과 확신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부정적 감정은 그가 논쟁할 겨를도 없이 받아들이는 수많은 자동암시와 같은 것이다.

환자는 지적으로는 그런 자동암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비현실적인 것으로서 인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정적 감정은 계속된다. 그 자동암시는 결코 지적으로 이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자동암시란 지적 및 이성적 기초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의식적 비판에 접근할 수 없는 무의식적이고 비합리적인 환상의 생활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정신질환으로서 무의식의 활동

의식과 무의식은 일정한 통합이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그 반대인 불균형은 정신을 질병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다. 이런 시각에서 지나친 환상은 이미 질병의 상태를 보이는 것이 된다. 앞에서 예를 든 청년의 사례는 무의식의 이해를 위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무의식이란 환자의 환상을 산출하는 기회를 제공하며, 그 환상의 부분은 무의식의 환상적 활동이라는 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그 사례는 물론 정신질환인 우울증의 하나이다. 그의 우울증은 그에게 있었으나 전혀 무의식적이었던 그런 환상에 기인하고 있다. 더욱이 그 사례는 진정한 우울, 힘든 괴로움, 중독 등에서 거꾸로 된 상태이다. 그 환자는 우울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런 환상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는 그런 환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기소침하게 되었다. 이 환자는 오랜 기간의 분석을 통하여 자기의 노이로제 원인에 관하여 지적으로 깨닫게 된 매우 총명한 젊은이였다. 그러나 이 사례와 관련하여 분석자가 유념해야 되는 것이 있는데, 지적인 이해는 그의 우울증을 전혀 바꾸어 놓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분석가는 그 사례에서 무익한 수고를 해야만 했다. 이 사례에서 무의식이란 단순히 이해할 수 없는 과중한 무게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무의식은 가능한 흡인력을 모든 가치의 무의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처리되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리비도는 의식계로부터 당겨져 그것으로 하나의 우울증, 즉 정신수준을 내리누르는 상태를 유발한다. 그러기에 이 사례의 무의식에서 -에너지의 법칙에 따라-어떤 가치의 축적, 즉 리비도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리비도란 일정한 형태, 즉 환상의 상(Phantasiebilder)과의 일치에서 이해될 수 있다. 리비도를 그 형태에 상응하는 환상의 상을 가져오는 것으로만 무의식에서 다시 풀어놓을 수 있다. 무의식에 자기의 환상을 표면에 이르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때로 환상의 상이란 의식과 내용이 상실된 모든 에너지의 분담에 일치되기 때문이다. 환자의 의식 세계는 차갑고, 텅 비어 있고 회색적이 된 상태이다.

그에 반하여 그의 무의식은 생동적이고 힘이 있고 풍부한 상태이다. 환자의 의식계가 스스로 즐기며 인간적 주의점을 전혀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의식 정신의 본질에 대한 표식이다. 언젠가 무의식에 떨어진 것은 거기에 남게 되며 의식이 그것에 시달리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의식은 무의식에서 푸르러져 꽃피는 동안에 주리며 얼어붙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3. 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기법에 대하여 기술했다. 인간의 정신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했다. 인간의 정신에서 의식은 현실세계이면서 논리의 세계요, 무의식은 이상이나 환상의 세계이면서 비논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삶에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살아가야 하지만, 정신에서는 의식되는 세계와 잘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에 균형을 이루는 상태가 건강한 정신이라면, 그 반대로 불균형을 이루게 되면 병리적인 상태가 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우리는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기법에 대해서 기초적인 지식을 가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