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린도전서 7장 10-16절

고린도전도 7장에서 바울은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서 이혼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10-11절은 믿는 자들의 이혼에 대한 것이고, 12-16절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한 자로 이혼을 생각하는 믿는 자들에 대한 말씀이다. 주목해야 하는 점은 두 부류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① 믿는 자들의 이혼

고전7:10-11은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명령이 믿는 자들의 이혼에 대해 주어지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 아내도, 남편도 서로 이혼으로 헤어질 수 없다. 둘째, 비록 헤어졌다고 해도 다시 합해야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바울은 예수님과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다.

10절에서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라는 명령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명령 뒤에 남편에게도 주는 또 다른 명령이 나온다. 11절에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이 두 개의 명령은 예외가 없는 주님의 명령이다. 더욱이 여기서 그것에 대한 그 어떤 예외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계속해서 바울은 11절에서 "만일 갈라섰으면"이라는 가정법 표현을 써서 이혼을 막으려고 하는데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의도는 궁극적으로 "화해"에 있다. 만일 아내가 이 명령에 불순종하고 이혼으로 결혼을 파탄 낸다면 아내는 재혼하지 않은 채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른 남자와 재혼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남편에게 용서를 구하고 화해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여자가 화해하지 않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면 이것은 간음죄를 범하는 죄라는 바울의 경고다.

그런데 왜 바울은 이혼한 여자에게 "그대로 지내라"고 조언을 하는가? "그대로 지내라"는 말은 이혼한 여자가 전남편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와도 결혼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재혼하지 말고 전남편을 기다리라는 말이다. 더 좋은 방법은 당장 회개하고 잘못되게 떠난 남편과 재결합하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추구하는 것은 화해에 있다. 화해하고 재결합할 때까지 두 사람에게는 결혼의 모든 의무나 권리 그리고 특권도 없는 상태다. 두 당사자의 주된 의무는 화해다. 서로 화해에 이르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혼으로 갈라섰지만 그대로 지내야 한다는 명령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질문이 하나있다. 서로 합의하에 갈라섰는데 "여전히 결혼한 상태"라고 보는 것이 성경적인가? 비록 불법적인 사유로 이혼이 성립되었다고 해도 결혼은 이미 해체된 것이다. 결혼이 언약적인 합의로 이루어졌어도 그 합의는 이혼으로 무효가 되고 결혼은 해체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혼 당사자들은 "결혼하지 않은 자"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즉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도 합법적인 것이 아닌가라는 말이다.

바울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신24:1-4 신24:1-4절의 말씀은 부적합한 이유로 이루어진 이혼증서와 연관된 내용이다. 첫 번째 남편을 떠난 뒤 아내는 또 다시 남편이라고 불리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다"(2-3절). 그리고 첫 번째 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라는 구절이 있다(4절). 이혼은 했지만 여인이 여전히 '하나님 보시기에' 첫 번째 남편의 아내라면 그 여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곧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중혼죄를 짓는 행위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아내"라는 표현은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 여인이 다른 사람의 아내라면 더 이상 첫 번째 남편의 아내가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여인이 중혼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첫 번째 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4절)라는 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말은 여인이 어떻게 행동을 하든 줄곧 첫 번째 남편의 아내라는 관점을 부인한다. 그 여인은 첫 번째 남편의 아내가 다시 될 수 없다. 그것은 곧 그 여인이 이혼 뒤에는 첫 번째 남편의 아내가 더 이상 아님을 뜻하는 것이다.

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그들을 "결혼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즉 동반자의 멍에를 벗고 자유하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도 괜찮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혼을 했지만 여전히 결혼한 상태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황성철
▲황성철 박사. 

② 불신자와 결혼한 믿는 자의 이혼

고전7:12-16절은 예수님이 다루지 않은 내용이다. 바울은 12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논의하지 않으신 문제를 제기하려고 한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12절에서 언급된 "나머지 사람들은" 10-11절에 언급된 사람들과는 다른 상황에 직면해 있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교회가 지중해 지역으로 옮겨 갔기 때문에 그리스와 로마의 회심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래서 상대 배우자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남편이나 아내 어느 한쪽이 구원받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것은 많은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이혼과 관련된 문제였다.

믿지 않는 배우자와 이혼을 생각하는 믿는 자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이 경우는 믿는 자들의 경우와 똑같이 화해하도록 주장할 수가 없다. 사실 바울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믿는 자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구원받지 못한 배우자와 이혼하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보다 덜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 즉 믿는 자는 상대 배우자가 결혼을 계속 유지하고자 한다면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 믿는 자는 믿지 않는 배우자를 위해, 또한 자녀들을 위해 결혼을 유지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이혼을 막기 위해 믿는 자가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배우자가 결혼생활을 계속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이혼할 수밖에 없다. 바울은 믿는 자가 불신 배우자와 이혼하는 문제에 대해 아주 간결하게 결론을 맺어 주었다.

고전7:12-16절에서 언급되는 이혼은 절대로 이상적이지 않다. 이 문제에 있어서 바울이 추구하는 목표는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라는 데 있다. 바울은 믿는 자에게 믿지 않는 배우자가 계속 살기를 원한다면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한 논증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단호한 말을 덧붙였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13절) 믿는 자는 계속 함께 살기를 원하는 불신 배우자와 이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배우자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했음에도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다면 "갈리게 하라"(15절)고 말한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갈리거든"이라는 말은 불신 배우자가 마음으로 이미 갈라섰을 뿐만 아니라 결혼생활을 끝내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하는 말이다. 이혼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말이다. 불신 배우자가 분명히 이혼으로 갈라서기를 원한다면 믿는 배우자는 그것을 막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바울은 허락을 나타내는 명령형을 사용하고 있다. "갈리게 하라." 이혼하라는 강력한 권고다.

그런데 믿는 배우자에게 "갈리게 하라"고 명령을 한 후에 덧붙이는 두 개의 말씀이 있다. 첫째, 15절에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이 구절에서 "구애될 것"(δουλοω)이라는 원어의 의미는 "노예를 삼다"이다. 이 말은 결혼의 구속이 깨어졌을 때 믿는 자가 불신 배우자에 대한 결혼 의무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말이다. 결혼의 모든 구속이 제거되고 모든 의무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말이다. 이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이다. 다시 화해해야 할 의무도 없어진 것이다. 믿는 배우자는 불신 배우자와 재결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불신 배우자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재결합이 가능하지만 말이다. 믿는 자는 불신자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 "주 안에서만"(고전7:39)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은 화평 중에 너희를 부르셨느니라."는 구절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대해 결말이 나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혼의 문제가 화평 중에 매듭지어지기를 원하신다. 결혼생활이 유지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하나님은 결혼생활이 모호한 상태로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것은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미제상태로 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평이 있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그릇된 조언을 받아들여서 그 중간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바로 별거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별거는 성경적이 아니다. 그것이 문제해결이라는 원칙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별거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미해결된 상태로 계속 있게 한다. 별거는 일시적인 안도감을 주고 잠간 동안 시간적 여유를 줄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과론적이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지도자들조차도 별거가 이혼보다 덜한 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주 이혼보다는 별거를 선택하고 또 권고도 한다. 그러나 별거가 성경에 근거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한 방법이기 때문에 유익보다는 해를 더 많이 가져온다는 것이 일선 지도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상담자들은 별거를 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화해를 이루기가 더 어렵다고 말한다.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 부부에게 별거를 권할 경우 그들을 다시 연합하게 하기는 쉽지 않다. 별거를 하면서 거짓 평안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면하고 다루는 법을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려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기를 원하신다.

종종 사람들은 별거를 '냉각기'로 묘사하곤 한다. 문제를 더 차분하게 뒤돌아보기 위해 한 두 시간이나 며칠을 '냉각기'로 삼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의도가 아닌 장기적으로 '냉각기'를 갖는 것은 성경적이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다루려고 하는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