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히어로 우상화: 너드(Nerd)들의 판타지와 신화의 조합

슈퍼히어로 영화가 확장된 유니버스(universe)를 형성해 가고 있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 한국에서도 상당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히어로들은 물론이고, 닥터 스트레인지나 발키리, 헬라에 이르기까지 영화 개봉 전에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캐릭터들이 속속 개봉작에 등장하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들이 두세 달 간격으로 연이어 개봉되는 중이다.

집계된 바에 의하면 2000년 이래 70편 이상의 슈퍼히어로 영화가 제작된 것으로 확인된다. 1년에 4편씩 제작된 셈이다. 이 70여편의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총합 150억 달러(약 16조원 이상)를 벌어들였다.

미국식 너드(nerd)/긱(geek)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거의 20년 가까이 헐리우드가 공장에서 찍어내듯 양산하고 있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물량공세, 그리고 그 지속적인 흥행의 이유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는 서구 특유의 신화 만들기 전통도 관여돼 있는데, 그 기원은 주전 8세기 그리스 신화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신화의 원형이자 집대성으로 알려진 호메로스(Homer)의 일리어드(Iliad)와 오디세이아(Odysseia)를 시작으로, 각종 후속 신화들을 서사시와 희곡으로 발표하며 그들만의 고유한 신화 유니버스를 완성해 갔다.

이런 신화 작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들로는 그리스 비극 3대 작가인 소포클레스(Sophocles), 에우리피데스(Euripides), 아이스퀼로스(Aeschylos) 등이 있다. 이들은 서구 극 문화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며, 신과 사람의 관계를 제례에 속한 유흥 문화로 발전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런 문화 전통은 현대에 이르러 슈퍼히어로 신화의 영화화라는 새로운 외형을 덧입게 되었는데, 그 선봉장으로 스탠 리-잭 커비(Stan Lee-Jack Kirby), 제리 시걸-조 슈스터(Jerry Siegel-Joe Shuster)등을 지목할 수 있다. 스탠 리와 잭 커비는 마블 히어로 대부분을 창안해냈고, 제리 시걸과 조 슈스터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슈퍼히어로 캐릭터로 인정받는 슈퍼맨을 만들어냈다. 흥미로운 사실은 네 사람 모두 유대계 혈통의 미국인이라는 점이다.

너드/긱 문화, 고대 그리스 신화, 신화의 현대화, 이 세 주제를 자세히 살펴보면 최근 홍수처럼 범람하는 슈퍼히어로 영화에 대해 사회학적으로나 기독교적으로 이해할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본다면 기독교적 관점에서 히어로 영화는 부정적 평가를 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그렇지만 포스트모던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현상의 하나로서, 오늘날의 인간이해가 갖는 특징들을 엿볼 수 있는 소재라는 점에서 분석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토르 라그나로크
▲영화 <백 투 더 퓨처(1985)>와 드라마 <빅뱅 이론(2007-2017>)에 등장하는 너드들의 이미지

◈슈퍼히어로와 너드(nerd): 부유한 너드들의 우상화

 

너드/긱 문화란 무엇인가? 오랜 기간 하위문화(subculture) 수준으로 격하되어 왔던 너드/긱 문화가 헐리우드 영화의 주류로 등극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우선 너드와 긱의 정의부터 알아보자. 너드는 쉽게 말해 '학업 성취도는 뛰어나지만 사교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이'를 뜻한다. 한국이나 중국처럼 성적이 학생의 가치를 보장하는 사회에서 이는 그리 큰 흠이 아니지만, 육체적 건장함과 사교적 활동을 중시하는 미국의 보편적 10대 문화 속에서는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한국에서는 학업에 몰두하게 되면 잡다한 인간관계 정도야 당연히 허술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국에서는 사회적응에 실패한 까닭에 보상심리로 학업에 전념하게 된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

긱은 이 너드 성향을 가진 이들 가운데 특정한 하위문화 장르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다수의 너드들은 학업에 주력하는 관계로 과학이나 역사 지식에 친숙하고, 사교성이 부족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영웅담 혹은 연애담에 대한 환상을 갖는다. 그 결과 이들이 집착하는 하위문화 장르는 주로 Sci-fi(공상과학 영화), 판타지 소설, MMORPG(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다중접속 역할수행게임), 일본 애니메이션 및 연애 시뮬레이션 등이다.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너드 혹은 긱에 대한 인식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면서 이런 분위기에 현저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미국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이들 너드/긱의 삶과 가치에 대해 재조명하는 일들이 많아졌기에, 어느 정도 친숙해진 감도 있다. 이런 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1985년 개봉 영화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와 2007년부터 방영 중인 TV 드라마 <빅뱅 이론>이 있다.

<백 투 더 퓨처>에서는 주인공 마티 맥플라이의 아버지 조지 맥플라이가 심각한 너드이자 긱으로 등장한다. 마티의 계획과 온갖 사건사고가 겹친 덕에 조지는 너드이자 긱에서 벗어나 대단한 사교성과 능력을 갖춘 작가로 환골탈태한다. <백 투 더 퓨처>에서 너드/긱의 삶의 방식은 지양돼야 할 것으로 그려진다.

반면 <빅뱅 이론>은 MIT 학부 출신에 칼텍(Caltech,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연구직으로 재직 중인 공학 석사/박사들의 긱 문화에 빠진 일상, 그리고 이웃 및 친구들 사이에 벌어지는 온갖 해프닝을 다룬 드라마다. 이 작품은 그보다 약 20여년 전 제작된 <백 투 더 퓨처>와 달리, 너드/긱의 삶의 방식을 지양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흥미로운 현상으로 보고, 그 자체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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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드들의 대잔치, 코믹 콘(Comic Con). 너드/긱 문화가 대단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입증하는 축제다.

미국 사회의 이런 분위기 변화에는 여러 요인이 반영됐지만, 결정적이었던 것은 정보화 시대의 개막이다. IT, 통신, 미디어 기술의 발달은 삶의 방식과 함께 가치관도 변화시켜 놓았는데, 너드/긱 문화의 대두, 그 가운데 슈퍼히어로 영화의 대두는 바로 이런 가치관 변화에 편승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업가를 영웅시하는 미국의 문화적 풍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산업혁명은 영국보다 약 한 세기 늦은 19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미국은 자유주-노예주 분쟁과 남북 전쟁으로 인해 어수선한 정치적 분위기였지만, 경제적으로는 캘리포니아 지역의 골드 러시(Gold Rush), 은광 개발, 대규모 철도 부설 사업, 유전 개발, 농기계 근대화, 그리고 대규모 자본 대출을 위한 은행업의 전문화 등이 어우러져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 경에는 대규모의 부를 축적한 기업가들이 등장했다. 카네기(Andrew Carnegie, 철강),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석유),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 철도), J. P. 모건(John Pierpont Morgan, 은행) 등이 이 당시 등장한 신흥 거부들이었다.

이 시기는 기독교적으로도 점차 제2차 대각성운동(the 2nd Great Awakening)의 동력이 소진되고, 미국의 전통적 청교도 정신이 쇠퇴해 가던 시기였다. 청교도 정신은 과도한 재물 축적에 비판적 측면이 있었는데, 이런 정신이 쇠퇴하면서 미국 사회는 점차 기업가들을 영웅시·우상시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시대정신 때문에 역사가들은 다소 비판적인 관점에서 이 시기를 '도금시대(the Gilded Age, 겉만 화려하게 금박을 입힌 시대)'라고 불렀다. 이 시기 이후로 미국에서는 억만장자 기업가들이 여러 흠결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영웅시되는 풍토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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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의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 너드들의 영웅이자 우상으로 떠오른 IT 업계의 거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들에 속한다.

21세기 IT 산업의 융성은 이렇게 영웅시되는 기업가 무리에 너드들을 편승시켰다. 스티브 잡스(Apple), 빌 게이츠(Microsoft), 래리 페이지/세르게이 브린(Google), 엘론 머스크(Paypal/Tesla), 마크 저커버그(Facebook) 등이 그 주인공이다. 실제 이들에게 사교성이 결여돼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스티브 잡스를 제외하고 이들 대부분이 하버드 혹은 스탠포드 대학 출신의 수재들인 것은 분명하다.

과거 미국 사회에서 조롱과 멸시 대상으로 취급받던 학창 시절의 너드들이 본격적으로 미국의 경제와 문화 전반을 주도해 가는 위치에 서게 되자, 이들이 즐기던 문화도 일종의 모방심리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그 정점에 위치해 있는데, 특히 기술문명의 발전을 체감할 수 있는 분야라 더 각광을 받는 듯하다. 2008년 <아이언맨(Iron Man)>을 필두로 형성되기 시작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의 초강세는 이런 세태를 대변한다.

일전에 <닥터 스트레인지(Doctor Strange)>와 <원더 우먼(Wonder Woman)>에 대한 칼럼에서 언급한 바 있듯, 원래 슈퍼히어로 코믹스는 1930-40년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암울한 사태를 겪고 있던 미국인들에게 교회를 대신해 심정적인 위로와 구원을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상업적 미디어 회사들이 탄생시킨 하위문화 장르다.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자 표상을 덧입은 초월적이고 신화적인 슈퍼히어로들이 큰 인기를 얻었다. 슈퍼맨과 원더 우먼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21세기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슈퍼히어로 군단은 과학 기술을 힘입어 만들어지거나 탄생한 이들이 큰 인기를 얻는다. 대표적으로 마블 편으로는 아이언맨을 비롯해, 캡틴 아메리카, 헐크, 스파이더맨, 엑스맨 무리를 예로 들 수 있고, DC 편으로는 배트맨, 플래시(Flash), 사이보그(Cyborg)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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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크,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등은 과학 기술이나 과학적 사고에 의해 탄생한 캐릭터들이다. 최근에는 이처럼 과학의 이미지를 덧입은 캐릭터들이 특별히 강세를 보인다.

이들의 캐릭터 창안은 이미 오래 전인 1930-60년대 완성되었지만, 21세기에 특히 더 큰 인기를 얻는 것은 앞서 설명한 사회-경제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결국 슈퍼히어로 영화의 강세는 너드들의 테크놀로지적 환상이 영웅적 기업가들에 대한 우상화에 힘입어 주류 문화로 승격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너드들에 의해 표출되는 돈, 기술, 힘, 그리고 자기 우상화에 대한 욕망이 일반에게까지 전이되며 슈퍼히어로 영화의 연속된 제작과 성공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어렴풋이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는 듯하다.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미래 기술과 과학의 발달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 그리고 화려한 CG를 통해 미디어 기술의 발달 수준을 보여준다. 미국과 크게 다른 문화적 풍토를 가진 한국에서조차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어느 정도 흥행에 성공하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을 의식한 관객들의 호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미래 세계를 향한 미국의 전망에 대한 관심, 그리고 돈과 기술을 힘입어 실현되는 자기우상화의 욕망을 자극하고 있고, 이 자극에 한국 관객들이 부응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슈퍼히어로와 신화: 그리스 신화의 예술적 확장

우상화의 전형적 경로는 신화화(mythologization)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신화가 처음부터 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의 체계적인 신화 세계가 등장하려면 기본 수백 년에서 수천 년에 걸친 신앙, 제의, 축제가 요청된다. 이 과정에서 원형이 되는 신화(proto-myth)는 구전, 녹취, 개작과 창작, 비평의 과정을 겪게 된다.

전 세계 신화 체계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서구 문화의 대표적 기원이 된 그리스 신화 역시 이런 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초월성, 영원성, 불변성을 인정하면서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동일한 신에 대해 믿음의 내용을 달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화 체계 속에 엿보이는 이런 내적 불일치는 기본적으로 신화가 영원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사람의 실존에 얽힌 하나의 잠정적이고 가변적인 현상이라는 증거로 제시된다.

그렇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을 최고신이자 영원한 진리로 추대하고 싶은 마음은 고대인 누구나 보유하고 있었던 욕망이고, 이에 따라 원-신화의 개작과 창작, 그리고 비평 시도는 수시로 대단한 수준의 저항을 초래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소크라테스(Socrates)의 신성모독 재판과 사형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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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죽음(1787)>. 자크루이 다비드 작.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플라톤이 작성한 <대화편>(Dialogues)에는 소크라테스의 사형 사건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에우튀프론(Euthyphro)'에는 소크라테스를 신성모독으로 고발한 에우튀프론과 소크라테스 간의 논쟁이 기록돼 있고, '변명(The Apology)'에는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서서 배심원들에게 자신을 변론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에게 부여된 혐의는 '무신론자(ἄθεος, atheos)'라는 죄목이다. 이 무신론자라는 말의 의미는 오늘날 주로 통용되는 의미와는 다소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궁극의 진리, 선, 아름다움은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상을 가졌던 소크라테스는 서로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참된 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지만 신이 없다는 가르침은 전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부여된 '무신론자'라는 명칭은 단순하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를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아테네인들이 대대로 신봉해 오던 일리어드와 오디세이아의 신들을 믿지 않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사형 언도에는 당시 그리스 철학 학파들 간의 정치적 알력이 깊게 관여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가 원-신화의 권위를 뒤흔드는 비평을 시도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에,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신화 개작과 창작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아테네인들의 칭송을 받은 이들이 있다. 바로 위에 언급했던 그리스 비극 3대 작가들이다. 이들이 신화를 개작하고 신화 세계를 확장해 가는 방식은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우선 이들 대부분은 원-신화인 일리어드와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올림포스 12신을 비롯, 주된 신들의 내러티브와 권위를 보존하는 데 힘썼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역사적 사실들을 신화에 접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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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인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퀼로스.

대표적인 것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Helen)>,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Agamemnon)>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영웅적이면서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도시국가 테베의 왕 이야기를 담았고, <헬레네>는 트로이 전쟁의 발발 원인이 된 왕비 헬레네의 이야기를 담았으며, <아가멤논>은 도시국가 미케네의 왕이자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 맹주를 지낸 영웅의 이야기를 담았다.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오이디푸스 왕의 운명이나 트로이 전쟁 내러티브가 모두 정확한 역사적 사실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화가 엄연한 사실의 기록이라 생각했고, 여기에 그들이 역사적 사실이라 본 일들을 첨가하는 데 별 거부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 비극 작가들은 원-신화를 개작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첨부할 때 예술적 가치를 높이는 일에도 전력을 다했다. 애초에 원-신화인 일리어드와 오디세이아가 상급의 예술적 가치를 가진 대서사시였기에, 개작이나 창작에도 비등한 수준의 예술성이 요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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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의 한 장면. 그리스 비극 작가들은 신화의 체계를 예술적으로 확장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로써 이 비극 작가들은 소크라테스와는 다르게 그리스 신화의 체계를 공고히 하고 그 지경을 넓힌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들은 서구 극 문화의 시조로 인정받아 왔으며, 2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테(Dante), 세르반테스(Cervantes), 셰익스피어(Shakespeare), 괴테(Goethe)를 비롯한 서구 대문호들의 롤 모델로 인정받으며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이는 오늘날 슈퍼히어로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들과 각본을 쓰는 작가들에게서도 동일하게 확인되는 사실이다. 우상화 작업을 위한 방편으로 신화화를 선택한 만큼, 신화화 작업의 대선배인 그리스 비극 작가들의 방법을 벤치마킹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슈퍼히어로와 사실성: 신성과 과학의 조합

오늘날 연속으로 제작되고 있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캐릭터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계보를 따르는데, 이런 계보의 형성 역시 그리스 신화의 확장 방식을 그대로 차용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 계보는 신화적 영웅 계열로, 기존에 존재하던 종교나 신화의 신 혹은 영웅을 모티브 삼아 창안된 캐릭터들이다. 슈퍼맨과 원더 우먼을 비롯해, 현재 개봉된 영화의 주인공 토르, 발키리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기존에 존재하는 신화의 친숙함과 신성의 신비로움에 힘입어 캐릭터의 생동감을 확보한다.

둘째 계보는 과학적 영웅 계열로, 상당히 개연성 있어 보이는 과학적 기술, 실험 혹은 사고에 의해 탄생한 것으로 설정된 캐릭터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배트맨,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헐크, 플래시 등이다. 이들은 실질적으로 거의 허상에 불과한 과학적 인과관계를 통해 캐릭터의 사실성을 확보한다.

이로써 고대 그리스 시대에 신화 체계 확장을 위해 활용된 신화적 권위와 역사적 사실의 조합이, 오늘날에는 신화의 친숙함과 과학적 사실의 조합으로 대체된 채 새로운 모습의 신화 체계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과학적 영웅 계열의 캐릭터들 대부분은 현대의 굵직한 세계사적 사건들과 연계되어 탄생한 경우가 많아 캐릭터 설정의 현실성을 높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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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들이 신화 체계를 확장하던 방식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문화 조류는 이런 시도들을 권장하고 부추기는 환경을 제공한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신화 체계의 구축은 고대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상상력과 창작의 자유 속에서 수행되고 있다. 아울러 고대 세계에서는 볼 수 없었던 기독교 문화를 배경으로 삼고 수행되고 있다. 종교적 가르침과 전통 문화의 원본성(originality)보다 현재의 실존적 정황에 맞는 재해석 및 패러디를 선호하는 포스트모던 문화는, 이런 시도를 권장하고 부추기는 데 앞장선다.

이런 저런 조건들이 맞물려, 오늘날 헐리우드 영화계는 새로운 우상, 새로운 신화를 창안해 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IT 및 통신 산업 부상으로 화려하게 문화계 주류에 편입된 너드들의 판타지가 이런 창작욕의 그물에 포섭된 셈이다. 슈퍼히어로 영화들은 여전히 하위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자본의 힘과 예술적 창작력이 집중되면서 급속히 영화계 내부의 지분을 늘려가고 있다.

이로써 이 영화들은 우상화 및 신격화를 위한 신화 체계를 도용한 채 점진적으로 더 강력한 대체종교(substitute religion)로 부상하고 있다. 기독교인 입장에서 슈퍼히어로 영화의 창궐과 강세가 그리 달갑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