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중 한 장면.
(Photo : )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중 한 장면.

 

 

영화화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로버트 제임스 윌러의 소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라는 소설이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진작가인 로버트 킨케이드와 가정주부인 프란체스카의 나흘간 사랑을 다룬 실화 소설이다.

여주인공인 프란체스카는 교사 일을 하며 행복했지만, 남편의 반대와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교사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지만 현실은 꿈을 이루기에 너무나 척박했다.

남편과 아이들이 함께 여행을 떠나고 홀로 집을 지키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마을을 찾아온 사진작가를 만나게 된다. 그는 감정에 이끌려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사진작가였던 킨케이드와 대화를 나누면서 프란체스카는 그녀가 그토록 동경하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그에게 푹 빠지고 만다. 떠돌아다니는 사진작가의 특성 때문에 결국 전처와 이혼하고 정착된 삶을 살지 못한 그는 프란체스카를 만나며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일생에 이런 감정은 단 한 번 찾아온다'고 말하며 함께 떠날 것을 요구한다.

프렌체스카는 가족과 꿈 사이에서 갈등한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위에서 말이다. 결국 꿈을 포기하고 가족을 선택한다. 눈물을 흘리며.... 지루하고 평범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프란체스카는 현대를 살아가는 정체성을 잃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중년 여인을 보여준다.  

사람의 영혼은 원초적으로 자유롭다. 태초의 영혼은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창조됐다. 완전한 독립적인 존재로서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의 원죄 이후 영혼은 종속되고 물화(物化)되고 타자에 속박(束縛)된 채 살아가게 되었다. '당신이 준 저 여자' 때문이라는 변명(變名)은 분명 종속된 영혼이 자명(自明)해 낸다. 여자 또한 뱀에 의해 자신이 조종(操縱)되었다고 변명함으로 스스로 종속된 영혼임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아담과 여자에게 준 저주는 서로에게 종속된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임을 상기(想起)시킨다. 그 종속에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자 하는 갈망이 끊임없이 갈등하는 이중적 자아의 모순이 내재화되어 있다.

종속된 존재이면서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는 독립된 영혼을 갈망한다. 분열된 자아로서 갈등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이중적 분열된 자아를 가지며 살아가는 존재에 수많은 의심과 추측을 던지지만, 답을 결코 찾지 못할 것이다. 타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말이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프란체스카는 꿈을 잃은 평범한 중년의 주부로 나타난다. 남편과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며, 자유를 찾아 떠나고 싶은 욕망을 억압하며 살아간다.

처음에는 자녀들을 키워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 때문에 자신을 희생한다. 자녀들은 자라나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가지고 어머니를 외면한다. 남편은 여전히 아내의 차가운 타자로, 불편한 존재로 동거한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알아주거나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동안의 희생이 물거품처럼 의미 없이 살아가고 있다. 의미 없이 살아가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삶은 없을 것이다.

중년의 때에 위기가 찾아오는 이유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며 살아온 바쁜 20-30대가 지나고, 자신을 찾고 싶은 '틈'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공자는 마흔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불혹(不惑)이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의 마흔은 흔들리는 유혹(誘惑)의 시기이다.

그러나 중년은 유혹의 시기인 동시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시기이다. 틈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마흔은 완전히 달라진다. 프란체스카처럼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왜곡된 영혼으로 바라본 자유를 찾아 갈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집적(集積)된 경험과 성찰로 인하여 지혜로워지기도 한다.  

근래 일어난 한국교회 속 욕망의 일그러진 초상화는 중년기에 일어나는 '영적 틈'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성공과 성장이라는 물화된 성공주의에 빠져 스스로를 성찰하지 못한 한국교회가 갑자기 찾아온 틈에 적응하지 못하고 급속하게 성적 타락의 길로 내리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교회의 존재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다. 복음과 문화를 구분하지 못했고, 너무 쉽게 성공을 목회로 오해했던 것이다. 목회를 상품화시켜 적당히 포장하여 팔고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으면 그것이 성공한 목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교인들은 기도하거나 대면하지 않으면서 종교적이 될 수 있다. 매춘부 목사이다(유진 피터슨, <목회자의 소명>)'.

영적 관음증에 빠져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산 영혼을 이데올로기와 축복으로 포장하여 교회라는 시장에서 팔고 있는 것이다(계 18:13).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하고 쾌락을 찾은 현대교회 교인들은 더 이상 고상한 것을 찾지 않게 되었다. 자신을 잃어버린 존재감의 부재 속에서 '틈'에서 새어나오는 온갖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시대의 고통을 담지한 이들에게 축복과 희망을 제공해 줌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행복과 자기 실현의 기회를 줄'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복음을 상실하게 됐다.

한국교회는 지금 중년의 위기를 지나고 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할 시기에 무너지고 자빠지고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것은 외부의 폭풍 때문이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난 폭풍 때문이다.

이제 다시 원시적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애굽과 바벨론에서 불러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복음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없는 한, 우리는 중년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정현욱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