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루터>의 한 장면. 보름스(Worms) 교회회의 중 루터소송사건(Causa Lutheri, 1517).
(Photo : ) ▲영화 <루터>의 한 장면. 보름스(Worms) 교회회의 중 루터소송사건(Causa Lutheri, 1517).

 

 

영화 성 프란치스코 vs 루터(下)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 양측 모두 루터가 교회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시대의 거인(巨人)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간 평가의 관점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개신교회 입장에서는 순전한 신앙을 위해 일생을 바친 존경스러운 인물로 여겨질 것이고, 가톨릭교회에서는 보편 교회를 분열시킨 원흉 정도로 비춰질 것이다. 물론 종교 및 종파 간 화해와 에큐메니즘을 강조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Concilium Vaticanum Secundum, 1962-1965) 이후로는 가톨릭교회에서도 루터에 대해 일부 재평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개신교 기독교인들 입장에서 루터는 순전한 신앙을 찾아나갈 길을 열어 준 은인이나 다름 없다. 개신교인들이 루터에 대해 갖는 감사와 존경의 마음은 루터에 대한 영화 제작 역사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20세기 초 영화 산업이 개화한 이래 여러 개신교 단체들이 물심 양면으로 앞장서서 루터 관련 영화를 제작해 왔다.

이렇게 제작된 영화의 편수가 적지 않은 까닭에, 2011년에는 루터 관련 영화의 역사를 개관하고 분석한 서적이 출간되기도 했다. <영화 속의 마틴 루터: 변형의 역사(Martin Luther in Motion Pictures: History of a Metamorphosis)>는 루터의 행적과 삶을 표현한 영화들을 시대별로 소개하고 분석한 저서다.

이 저서는 독일 뮌헨 소재 예술사(史) 중앙연구소(Zentralinstituts für Kunstgeschichte) 소속 역사학 박사 에스더 위플러(Esther Pia Wipfler)가 집필한 것이다. 위플러는 이 책에서 루터 관련 영화들의 제작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각 작품이 간직하고 있는 예술적 가치를 학술적인 관점에서 평가한다.

위플러의 설명에 의하면, 2003년작 <루터>는 그간 제작된 루터 관련 영화의 21세기형 완성판이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특별히 1950-60년대를 기점으로 루터 영화 제작이 활발하게 진행됐는데, 이 시기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루터의 모습에서는 유독 혁명가적인 측면이 중점적으로 부각됐다.

 

▲면죄부 판매를 옹호하는 가톨릭 교회의 문서들을 불태우는 루터. 혁명가로서의 카리스마가 돋보인다.
(Photo : ) ▲면죄부 판매를 옹호하는 가톨릭 교회의 문서들을 불태우는 루터. 혁명가로서의 카리스마가 돋보인다.

 

 

이는 마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의 인권운동(the Civil Rights movement) 덕분에 나타난 현상이다. 비폭력 흑인 인권운동을 이끈 동명의 침례교 목회자 마틴 루터 킹의 모습이 영화 속 마르틴 루터에게 투영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대개 영화 속 루터의 모습은 역사적 루터가 원래 가졌던 신학적 입장과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조명된다. 원래 루터의 신학은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와의 유명한 자유의지 논쟁에서 보듯, 예정론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이미지를 덧입은 '미국형 루터'는 예정론과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조화를 이룬 복음주의의 이상형을 구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개혁과 면죄부: 연옥 형벌의 경감을 위한 보속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했던 면죄부는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으며, 가톨릭 교회의 구원론 전반을 통해 교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가톨릭교회의 구원론은 유아세례로부터 출발된다. 가톨릭 교의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유아세례를 받은 자는 세례시 사용된 성스러운 물의 효력으로 죄 사함을 얻는다.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지 않는 이상, 이 죄 사함의 효력은 영원토록 유효하다. 단 유아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평생 '교회가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도를 따라야 한다. 이는 천국에 들어가기 전 공로를 시험받는 연옥(purgatorium)의 형벌을 피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유아세례를 통해 가톨릭 교인이 되었으나, 육체와 마음의 여러 죄악을 통해 부정해진 자들은 고해성사와 보속(satisfactio)을 통해 이 땅에서 미리 연옥의 형벌을 경감받을 수 있다. 여기에서 보속은 개인적인 근신부터 가톨릭 교회를 위한 구체적 헌신까지 다양한 형태로 부여될 수 있다.

 

▲로마에서 면죄부를 산 뒤 보속의 기도를 드리는 루터.
(Photo : ) ▲로마에서 면죄부를 산 뒤 보속의 기도를 드리는 루터.

 

12세기 이전의 보속은 대개 개인적 차원에서 신앙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수행됐으나, 십자군 전쟁을 통해 획기적인 변화의 국면을 맞이한다. 11세기 말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 II)는 십자군 전쟁에 참여할 병력을 모으기 위해, 이 보속의 개념을 극단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우르바노 2세는 성전(聖戰)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거나 목숨을 바치게 되는 경우 연옥에서 받을 정화의 형벌을 완전히 면제받게 되며, 죽는 즉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는 "십자가의 길을 실천한 자들(Viae Crucis exercitium)"에게 주어지는 면죄부로 알려졌다.

이 면죄부를 받기 위해 유럽 전역의 범죄자들이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는데, 이런 정황은 2005년 개봉된 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에도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거대한 왕국을 이룬 아유브 왕조의 시조 살라딘(Salah-ad-Din)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긴 12세기 말 이후, 가톨릭교회의 보속 개념은 성전 참여보다는 헌금 면죄부 형태를 띠게 된다. 이후 거의 300년 이상 면죄부는 가톨릭교회의 소중한 재원으로 자리잡게 된다.

영화 <루터>의 초반부는 바로 이 면죄부와 관련된 루터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루터는 독실한 어거스틴 수도회 수사였으나, 로마 교황청 순례시 가톨릭교회의 심각한 타락을 목격하고 면죄부의 효력에 대하여 깊은 회의감을 품게 된다. 루터 자신도 면죄부를 사서 보속의 행위에 동참해 봤으나, 진정한 죄 사함과는 아무 연관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루터의 개혁은 바로 이 시점으로부터 태동한다.

 

▲설교 중 면죄부의 거짓됨을 폭로하는 루터.
(Photo : ) ▲설교 중 면죄부의 거짓됨을 폭로하는 루터.

 

 

영화는 루터가 면죄부의 효력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장면을 세심하게 묘사하는데, 사실 당시 유럽에서 면죄부의 효력에 대해 의심을 품은 것은 루터만이 아니었다. 루터보다 한 세기 앞선 14세기에 이미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3-1400)는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를 통해 당대 면죄부 판매인들(Pardoners)의 표리부동함, 그리고 면죄부의 거짓된 효력을 비판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이런 사정은 영국이나 독일처럼 훗날 개신교 종교개혁이 강세를 보이는 지역뿐 아니라, 가톨릭교회 중심부인 이탈리아나 스페인 지역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종교개혁을 전후하여 면죄부에 비판적 입장을 보이던 문필가들은 풍자와 해학을 통해 면죄부의 허황됨을 알렸다.

대표적인 예로 거짓 이적을 통해 면죄부를 판매하던 사기꾼들의 수법을 설명한 스페인의 악자(惡者)소설(novela picaresca) <라사리요 데 또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La Vida de Lazarillo de Tormes y de sus fortunas y adversidades, 1554)>을 들 수 있다. 식자들의 눈에는 면죄부가 상식을 벗어난 종교적 사기로 비춰졌던 것이다.

이처럼 면죄부 판매는 이미 유럽 지식층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판 대상이 되고 있었다. 다만 누가 교황청의 권위에 직접적으로 도전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켄터베리 이야기>나 <라사리요 데 또르메스>의 경우 가톨릭교회의 직접적인 제재를 피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저급하게 여겨지던 풍속소설 형태로 저술됐다. 이런 작품들은 진지함의 정서를 배제하고 우회적 비판을 시도함으로써 단순한 소설 취급을 받았고, 간혹 금서(금서)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작가들의 신변에 위협을 줄 정도로 교회의 눈길을 끌지는 않았다.

 

▲<캔터베리 이야기>의 한 장면. 이미 14세기부터 유럽의 식자층은 면죄부가 종교적 사기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Photo : ) ▲<캔터베리 이야기>의 한 장면. 이미 14세기부터 유럽의 식자층은 면죄부가 종교적 사기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루터는, 철저하게 학술적이고 신학적인 방식으로, 극도의 진지함을 가지고 '95개조 반박문(95 Thesen)'을 작성했다. 교회 개혁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으나, 개혁이 실제로 촉발되기 위해서는 앞장서 행동할 인물이 필요했다. 루터는 자신이 이 일을 위해 예비된 자라고 여겼던 듯하다.

◈개혁과 자유의지: 자유의지론 대 노예의지론

루터보다 앞서 가톨릭교회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이들의 중심에는 에라스무스가 있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어거스틴 수도회 성직자 에라스무스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인문주의자(humanist)였다.

르네상스기 및 종교개혁 시기의 인문주의자들은 전통적인 교회의 성서해석보다 사람의 이성에 의한 자율적 성서해석의 가능성을 믿었다. 이들은 성서를 포함해 고대 헬라 및 라틴 문헌을 깊게 연구했고, 그 결과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성서의 가르침 사이에 심각한 편차가 존재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학자의 입장에서 온건한 개혁을 추구했고, 이 점 때문에 가톨릭교회 내부의 엘리트 성직자들 및 각국 위정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처음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을 때, 에라스무스는 일부 급진적 조항들에 우려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전반적으로는 환영하는 입장을 표했다.

그러나 1521년 보름스 교회 회의를 기점으로 루터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논조는 급변한다. 에라스무스는 교회를 분열시키면서까지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이성적 태도로 점진적인 개혁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믿었다. 루터 역시 교회의 분열을 예상치는 않았으나, 신앙의 양심에 따라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그대로 개혁을 추진했다.

 

▲16세기 초 유럽 최고의 인문주의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루터의 개혁 의도에 공감하면서도 개혁의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했다
(Photo : ) ▲16세기 초 유럽 최고의 인문주의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루터의 개혁 의도에 공감하면서도 개혁의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했다

 

 

에라스무스와 루터 두 사람은 결정적으로 1524-1525년 자유의지 논쟁을 통해 서로에 대한 대립적 입장을 드러냈다. 1524년 9월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을 출간했다. 이 저서에서 그는 사람이 이성의 힘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에 화답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유의지론>의 내용은 사람이 자율적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설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인문주의적 낙관론을 대변하는 동시에, 루터가 주장한 이신칭의론, 즉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sola gratia, sola fide)"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전개하려는 목적을 담고 있었다.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에 대한 답변이자 반론으로, 루터는 이듬해인 1525년 12월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을 발표했다. 루터는 사람이 자율적으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찾아갈 힘을 갖고 있다는 에라스무스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의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스스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노예의지론>의 골자였다. 루터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개시되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루터가 예정론의 입장을 강조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어거스틴 수도회 출신 성직자로서 신학적으로 어거스틴의 영향을 깊게 받고 있었다는 점이 첫째 원인이다. 다음으로 사람의 공로, 즉 겉치레뿐인 성례나 물질적 보속을 통한 죄사함이나 형벌의 경감을 전면 부인하려는 의도도 예정론을 지지하는 주된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로는 원죄의 효력 자체를 부정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그리고 군사적∙폭력적 개혁을 시도하던 일부 재침례파(Anabaptist) 집단의 행태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루터
▲독일 농민전쟁 발발을 막기 위해 나선 루터. 루터는 신앙의 갱신을 갈구했을 뿐, 폭력적인 혁명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루터는 사람이 자유의지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견해를 철저히 배제하는 신학적 입장을 고수했다. 이는 사람의 교훈으로 복음을 훼손한 가톨릭 교회의 행태에 대한 반작용이자, 새로이 싹트는 인문주의의 낙관론에 대한 경계심의 발로였다고 볼 수 있다.

 

영화 <루터>는 부분적으로 루터 본연의 예정론적 신앙을 표현한다. 특히 보름스의 종교재판에서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을 철회하라고 강요받을 때의 장면이 그렇다. 루터는 이단 판정과 사형 판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심하게 갈등하는데, 결국 고통스러운 기도의 시간을 통해, 그리고 스스로의 나약함에 대한 저주와 겸비의 심령을 통해, 신앙을 저버릴 위기를 극복한다. 이로써 그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을 완성한다.

그러나 이 장면을 넘어서면, 루터의 행보는 누구도 막아설 수 없는 불굴의 자유의지에 의해 견인된다. 이 시점부터 루터는 비폭력을 추구하되, 의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개혁자로서의 인생을 살아 간다.

◈개혁과 복음주의: 예정론과 아르미니우스주의

영화 <루터>는 미국 루터교 계열 보험사 Thrivent Financial for Lutherans의 투자로 제작된 작품이다. 총 제작비 200만 달러(한화 230억), 홍보비 100만 달러(한화 115억)로 총 350억 가량의 비용이 소요됐다. 이는 통상적인 헐리우드 영화 제작비와 비교해 볼 때 그리 큰 금액은 아니지만, 일개 기독교 계열 기업이 감당하기에는 상당히 부담되는 수준의 투자 금액이다.

Thrivent는 <루터>의 촬영을 위해 영국 출신의 할리우드 감독 에릭 틸(Eric Till)을 고용했다. 그는 기독교 전문 영화감독은 아니지만, 비교적 굵직한 감독 경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2000년 독일 나치 정권에 의해 사형당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에 대한 영화를 성공적으로 연출해 낸 경력을 갖고 있었다.

 

▲<본회퍼: 은혜의 요원(가운데)>과 <루터>의 감독 에릭 틸(왼쪽).
(Photo : ) ▲<본회퍼: 은혜의 요원(가운데)>과 <루터>의 감독 에릭 틸(왼쪽).

 

 

일반 영화감독의 길을 걸어온 이인 만큼, 틸 감독은 노골적인 신학적 메시지 전달보다 역사적 고증과 연출의 개연성 확보에 힘을 들였다. 특히 기존의 루터 관련 영화들처럼 혁명가적 개혁가로서의 모습을 강조하는 동시에, 고뇌 속에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나약하면서도 간절한 신앙인의 모습도 함께 보여주려 했다.

그 결과, 영화 <루터>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예정론적 수동성에 함몰돼 있지도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고하지 않고 겸비의 심령을 잃지 않는 복음주의적 신앙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영화 속 루터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 예비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소명을 확증받은 후로는 수동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적극적인 개혁의 행보를 보인다. 이로써 루터의 사역은 거시적 역사에 이끌리는 수동성과 신앙을 위해 분투하는 능동성의 긴장 속에 역동적인 모습으로 진행된다.

작센(Sachsen) 공 프리드리히 3세의 노련한 정치력은 보름스 회의 당시 23살에 불과했던 젊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Karl V)를 압도했는데, 이는 루터의 개혁 활동을 지켜내는 든든한 장벽으로 작용했다. 루터의 주장에 대한 가톨릭교회 내부의 견해 차이는 루터에 대한 적극적 처벌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1524-1525년 독일 농민전쟁(der Deutsche Bauernkrieg)은 교회 개혁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각 지역 위정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루터를 둘러싼 거대한 역사의 흐름은 루터 개인으로서는 통제 불가능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초월적 섭리에 붙잡혀 루터가 개혁의 임무를 완수하도록 그를 견인해 간다. 이런 정황 속에서 루터는 목숨을 건 신앙고백과 평생에 걸친 신학적∙목회적 헌신으로 하나님의 소명에 화답했다.

루터 본인은 스스로의 자유의지가 담당하는 역할에 회의감을 품고 있었지만, 그의 실제 삶은 순전한 신앙을 향한 불굴의 의지로 가득차 있었다. 영화는 바로 이 점을 부각시킨다.

 

영화 루터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해 준 프리드리히 3세. 루터를 둘러싼 거시적 역사는 그가 개혁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영화 <루터>가 그려내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와 사람의 자유의지의 조화는 오늘날 복음주의 신앙이 내포하고 있는 긴장과 조화를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복음주의 역사가 로저 올슨(Roger E. Olson)이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듯, 오늘날 복음주의 구원론은 한편으로는 루터-칼빈 전통의 예정론이, 한편으로는 아르미니우스주의 자유의지론이 갈등과 화합을 반복하는 가운데 병존하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결국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업적과 함께 복음주의 신앙의 현실이 투영되면서, 루터의 신앙을 이해하는 방식도 새롭게 변모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덕분에 영화 <루터>는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 요청되는 신앙 갱신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만약 모든 구원의 역사가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 하나만으로 성취된다면, 오늘날 구원받은, 혹은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이들이 모인 교회의 실태는 왜 갈수록 구원과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는가? 어쩌면 신앙의 갱신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진행되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 가운데서 각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과 화답이 함께할 때만 실현되는 것은 아닐까?

영화 <루터>에는 바로 이런 물음이 담겨 있다. 결국 21세기의 기독교인이 이해하는 루터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신앙의 요구가 반영된 해석학적 관점의 루터임이 확인된다.

<루터>를 감상할 때, 영웅적 개혁가로서 루터의 모습에 감탄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가 구원의 길을 걷기 위해, 그리고 개혁을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과 선택을 분명하게 포착하기를 바란다. 이 질문은 지금 당장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역사가 우리에게 물어 오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끝>

 

▲1953년작 <마틴 루터>. 영화 속 루터의 이미지는 신앙의 갱신을 위한 각각의 시대적 요청을 반영한다. 이로써 루터 관련 영화들은 우리에게 해석학적 루터를 선보인다.
(Photo : ) ▲1953년작 <마틴 루터>. 영화 속 루터의 이미지는 신앙의 갱신을 위한 각각의 시대적 요청을 반영한다. 이로써 루터 관련 영화들은 우리에게 해석학적 루터를 선보인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