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 10월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가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시 51:17)'라는 주제로 지난 13일 오전 서울 명일동 명성교회에서 개최됐다.

발표회에서는 김명혁 목사 사회로 박명수 교수(서울신대)가 '이성봉 목사님에게 부어주셨던 회개의 영을 부어주소서', 임석순 목사(한국중앙교회)가 '김치선 목사님에게 부어주셨던 회개의 영을 부어주소서'를 제목으로 각각 발표했다. 응답에는 안만길 목사(염광교회)가 나섰다.

◈매일의 삶이 회개운동, 이성봉 목사

박명수 교수는 "많은 사람들은 한국교회 신앙이 1907년 대부흥운동을 통해 구체화됐다고 말한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핵심은 진정한 회개였고, 이는 이후에도 계속됐다"며 "이성봉 목사(1900-1965)의 삶과 부흥운동은 우리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 목사 회개의 특징으로는 ①철저한 회개 교육 ②인간 본성의 타락을 믿음 ③구체적인 자범죄 지적 ④자백 강조 ⑤자백은 변상, 곧 회개의 열매로 이어짐 ⑥변상은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침 ⑦신유운동으로 이어짐 ⑧종말론적 차원에서 이해 등을 꼽았다.

이후 이성봉 목사의 자서전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를 중심으로 그를 소개한 박 교수는 "보통 자서전의 첫 줄은 가문 자랑으로 시작하지만, 그의 자서전은 가문의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이것이 그의 위대한 점"이라며 "그는 부모로부터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는, 회개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았다. 이러한 죄의 고백은 당시 한국교회의 보편적 모습이었고, 이 목사는 이를 계승한 것"이라고 전했다.

박 교수는 "이성봉 목사의 회개 운동은 단지 설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이 바로 회개운동이었다. 그가 회개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종말론적 삶 때문이었던 것 같다"며 "다시 말해 그는 항상 재림의 주를 의식하면서 살았고, 항상 주님의 손을 잡고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의 손을 잡고 재림을 기다리는 삶이 어떻게 함부로 이루어지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박명수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한복협 제공
박명수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한복협 제공

그는 "이성봉 목사는 실질적으로 명예와 물질에 초연한 삶을 살았다. 실질적으로 그는 한번도 교권의 중심에 서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삶에 만족했다"며 "사실 그는 교단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기회가 많았음에도, 그것을 부정했다. 해방 후 한 때 서울신학교가 그를 이사장으로 모셨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이런 직책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사임했다"고 했다.

박명수 교수는 "이성봉 목사의 회개운동은 1907년 대부흥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대부흥운동의 특징은, 회개와 자백과 변상이었다. 이것은 한국교회를 갱신했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목사의 회개운동은 이것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라며 "또한 그의 회개운동은 성결교회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성결교회는 자범죄의 용서와 원죄의 정결을 강조한다. 전자가 '중생', 후자가 '성결'이고, 이는 '신유, 재림'과 연결된다. 이 목사의 회개운동은 사중복음적으로 전개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이 목사의 회개운동은 최자실 목사를 통해 순복음 신앙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최자실 목사의 금식·회개 운동은 오산리기도원을 통해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며 "한국교회는 축복의 복음과 함께 회개의 복음을 외쳐야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키는 운동"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의 예레미야, 김치선 목사

임석순 목사는 "회개란 간단히 말해 '돌아서는 것'이다. 세상을 왕과 주인삼아 세상만을 바라보며 놓지 못하던 삶에서, 이제는 하나님이 왕이시고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자리로 돌아서는 것"이라며 "예수님께서는 모든 백성을 돌아서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다. 우리는 이미 회개한 자로서 이 세상에 보냄 받았다. 회개한 자들은 자랑스러운 복음을 소유한 자들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보냄 받았으니 예수님처럼 죽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임 목사는 "한국의 한 시대에 회개의영으로 충만했던 김치선 목사(1899-1968)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의 발자취를 회고하며 그들의 신앙의 유산을 확인하는 일들은 너무나 중요한데, 이는 결코 신앙의 영웅을 만드는 일이 돼선 안 된다"며 "그들은 우리와 다른 특별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결론을 내고 정작 지금 나를 향해 인도하시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외면,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떠넘기는 자기합리화의 작업이 돼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예레미야'라는 한 마디는 김치선 목사의 생애와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해 준다"며 "그는 나라와 민족을 복음의 관점에서 사랑했던 '애국자',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던 '기도의 사람'"이라고 분석했다.

임 목사는 "김치선 목사는 장로교회 제1세대 신학자로서 한국의 교회와 신학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 유학하며 우리나라 최초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며 "1944년에 귀국해 1948년 안양대학교의 전신인 대한신학교를 설립했고, 1961년에는 대신 교단 총회장에 선출됐다. 전쟁을 피해 피난을 가면서도 그는 목회를 쉬지 않았고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임석순 목사가 발표하고 있다. ⓒ한복협 제공
임석순 목사가 발표하고 있다. ⓒ한복협 제공

임석순 목사는 "그는 아울러 기도와 전도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재건과 쇄신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해방 후 그는 전도운동 및 구령(救靈)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재건을 추진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 복음화가 가장 시급한 과제로 인식했기 때문"이라며 "그 자신이 신학박사였음에도, 신학의 학문성보다 신학이 추구하는 목표가 복음전도에 있다는 확신으로 가르쳤다. 이 복음의 열정은 자연스럽게 자유주의 혹은 진보주의 신학으로부터 한국교회를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임 목사는 "김치선 목사는 '이 민족이 살 길은 오직 기도와 회개와 전도뿐'이라 여기고 구체적으로 300만 구령 운동을 조직화했는데, 해방 당시 기독교 인구가 30만명 정도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복음화에 쏟은 그의 열정을 알 수 있다"며 "그는 신학도들에게 '2만 8,000여 우물을 파는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오늘 여러분이나 내가 할 일은 이 우물을 파는 사업'이라고 했다. 신학도들이 다른 것을 그만두고 일생 우물만 파는 자들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300만 구령 운동과 2만 8,000 동네에 우물을 파라는 그의 열정은 이 땅과 민족을 위해 흘렸던 뜨거운 눈물의 근본이 단순히 조국의 부강이나 물질적 풍요가 아닌,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는 열망 속에 회개의 영으로 충만하게 부어 주신 은혜였다"며 "우리는 이런 회개의 영을 우리에게도 부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믿음의 백성들은 내가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고, 이 민족과 온 세상을 향하여 구령 사역으로 이어가는 회개의 영이 다시 부어지기를 기도한다"고 제언했다.

안만길 목사는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로,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부르크 예배당에 붙였던 95개 조항 중 제1항은 바로 회개를 촉구하는 글이었다. '우리 주님이자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신 때로부터 신자들은 일생을 걸쳐 회개해야 한다'"고 종합했다.

안 목사는 "나는 목회자로서 평양대부흥을 가져온 것 같은 놀라운 은혜의 역사와 더불어, 회개의 현장을 보고 싶다. 설교는 많이 하면서도 철저한 회개의 생활을 하고 있는가 자신을 보게 됐다"며 "회개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일생을 통한 것이다. 주일학교에서도 회개운동을 일으켜야 함을 깨달았다. 그것이 어린이들을 변화시키는 길이다. 조국 복음화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과 꿈을 갖고, 다시 한 번 눈물로 강단 앞에 엎드려 회개하는 길만이 내가 살고 우리 교회가 사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이 외에 '길선주 목사님에게 부어 주셨던 회개의 영을 부어 주소서'라는 제목으로 박용규 교수(총신대)가 발표했다. 앞선 예배에서는 김삼환 목사(명성교회 원로)가 설교, 김중석 목사와 김성영 교수(백석대)가 특별기도를 했다. 광고는 이옥기 목사(UBF), 축도는 림인식 목사(노량진교회)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