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과 김윤석, 박해일과 고수, 박희순 등이 주연을 맡아 추석 극장가를 휩쓴 영화 <남한산성>에 대해, 이영진 교수님이 평해 주셨습니다. 이 영화는 김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편집자 주

한 줄 평: 아내와 딸을 내주는 평화 이야기

별점: ★★★★(5개 만점)

영화 '남한산성'(2017)은 소국이 겪어야만 하는 대국(大國)과 맺는 화친(和親)의 정당성을 아주 잘 묘사해 낸 영화이지만, 원작 <남한산성>의 본질은 잘 옮겨내지 못한 영화다.

1. 문장의 발신(發身)

원작은 화친의 정당성이 아니라, 그 화친을 둘러싸고 오고가는 문장(文章)의 흥망성쇠를 묘사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즉 '남한산성'의 핵심 주제는 '문장'이다.

원작 초입에는 이런 표현이 담겨 있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임금의 몸이 치욕을 감당하는 날에,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들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문장으로 발신(發身)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두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남한산성

문장으로 발신했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종교적 개념을 빌리면 그것은 일종의 육화(肉化, Incarnation)를 이르는 말이다. 발신이란 '천한 처지에서 벗어나 앞길이 환하게 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들이 환하게 존재를 입는 것이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임금들은 문장가들을 곁에 두었던 것이다.

영화에서도 비교적 '문장'이라는 핵심어가 자주 들리지만, 원작과 지향점을 달리하기에 그 본질을 살리지 못했다.

이를테면 영의정이자 제찰사인 김류가 전투 중에 "(오늘이) 무당에게 점지받은 날이니 걱정 말라"고 말하는 대목이나, 말죽을 먹는 향군(鄕軍)들이 영의정인 자신을 비웃자 "입을 찢으라" 직접 명령을 내리는 장면들은 다 원작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인조반정 당시 능양군[인조] 옹립의 주역을 채신 없는 간신배로 각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게다가 얼어붙은 강을 잘 건널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해 준 사공의 목을 칼로 벤 김상헌이 우는 장면을 누락시킨 것은 작은 편집에 지나지 않지만, 실은 큰 흐름을 끊은 것이다. 김상헌의 문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맥락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종말을 원작뿐 아니라 실제 역사와도 다르게 자결로써 생을 마감시킨 것 역시 다 문장을 끊어놓는 이 영화의 편집이며, 자결하기 전 대장장이 서날쇠에게 먼저 절을 하는 것도 과잉된 각색이다.

2. 발신한 문장들

이러한 과잉 편집행위들은 아마도 현대적 화친의 정당성, 곧 '나쁜 평화가 좋은 전쟁보다 낫다' 라는 현대적 감각의 주화론을 지나치게 투사시키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장의 도단일 것이다. 사실 원작의 문장들은 주화(主和)이건 척화(斥和)이건 간에 공평한 배열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몇 자를 여기에 소개할까 한다.

남한산성

영의정 김류가 "적이 다시 대동강을 건넌다면 도원수와 평양과 황해의 감사, 병마사들의 목을 베고 그 처자식들도 군율로 연화함이 옳을 줄 아옵니다"라고 간하는 말에 대한 인조의 문장은 이러했다.

"그렇겠구나..., 그렇겠어. 그러하되 적병이 이미 도성을 에워싸서 왕명이 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서북 산성에 군율이 닿겠느냐."

"경은 늘 내 가까이 있으니 군율이 쉽게 닿겠구나."

남한산성

임금으로 하여금 언 강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바로 어제 안내했던 사공이 이제 내일은 청나라 군사를 건너게 도와주고는 곡식이라도 얻겠노라 하자, 그런 말을 듣는 김상헌의 내면에 흐르는 문장은 이렇게 소개된다.

"이것이 백성인가. 이것이 백성이었던가... 아침에 대청마루에서 남쪽 선영을 울던 울음보다도 더 깊은 울음이 김상헌의 몸속에서 끓어올랐다. 김상헌은 뜨거운 미숫가루를 넘겨서 울음을 눌렀다. 이것이 백성이로구나. 이것이 백성일 수 있구나. 김상헌은 허리에 찬 환도(環刀, 군복에 갖추는 칼) 쪽으로 가려는 팔을 달래고 말렸다."

성 안의 식량이 떨어져 말들이 굶어죽기 시작하자, 동상에 걸린 병사를 위해 나눠주었던 가마니들을 다시 거두어서 말먹이로 쓰자는 문장과, 그래선 안 된다는 문장 간의 교전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전하, 지금 말들이 굶어죽고 있으나 이제라도 먹이면 오십 마리 정도는 부릴 수 있습니다. 말은 군사의 핵심입니다. 말이 없으면 어찌 군왕의 위엄을 세울 수 있으며, 먼저 치는 싸움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 가마니를 거두소서. 가마니를 풀어서 죽을 쑤어 말을 먹여야 할 것입니다."

(이성구가 말했다)
"말은 많이 먹는 짐승인지라 가마니를 썰어 먹여도 결국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군병의 추위가 더 절박한 일이오니...."

(김류가 이성구의 말을 가로챘다)
"병판은 어찌 그리 아둔하오. 군병은 사람이고 말은 짐승이니, 사람은 그 뜻의 힘으로 견딜 것이고 짐승은 견디지 못하는 것이오. 병판은 마병 없이 싸우자는 게요?"

(임금은 화로의 불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나, 군병의 언 몸을 덮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류가 말했다)
"전하, 신인들 어찌 가마니가 아니라 숯불 화로 한 개씩을 총안마다 나누어주고 싶지 않겠사옵니까. 성첩에 가마니를 나누어준들 곧 젖고 못 쓰게 될 것입니다. 속히 거두어 말을 먹이게 하소서."

남한산성

다음은 주화파 최명길이 화친을 독려하며 왕께 올리는 문장이다.

"전하,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옵니다. 군병들이 기한을 견디듯이 전하께서도 견디고 계시니 종사의 힘이 옵니다. 전하, 부디 더 큰 것들도 견디어주소서."

남한산성

계속해서, 화친 쪽으로 가닥이 굳은 후 최명길이 인조를 대신하여 칸에게 답서로 써 올리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자고로 화친의 문장을 작성한 자는 역적의 이름으로 길이길이 남기에, 다들 거짓으로 글을 써 내던 중에 최명길의 글이 간택된 것.)

"소방(조선)은 바다 쪽으로 치우친 궁벽한 산골로, 시문과 담론에 스스로 눈이 멀어 천명이 순환에 닿지 못했고 천하의 형세를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캄캄한 두메에서 오직 명을 아비로 섬겨 왔는데, 그 섬김의 지극함은 황제께서 망월봉에 오르시어 친히 보신 바와 같습니다.

소방의 몽매함은 그러하옵고, 이제 밝고 우뚝한 황극이 있는 곳을 벼락 맞듯이 깨달았으니, 새로운 섬김으로 따를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는 것이옵니다.

소방의 군신들이 들불처럼 휘몰아오는 황군의 위무를 차마 영접하지 못하고 우선 몸을 피해 산성으로 들어왔으나 어찌 감히 대국에 맞서려는 뜻이 있겠나이까. 쫓기는 작은 짐승이 굴속으로 스며든 일을 황제께서 기어이 군사를 움직여 꾸짖으신다면, 소방은 황제의 은덕에 닿지 못하여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옵니다.

또 성벽에서 닭싸움하듯 소소한 다툼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 또한 한 줄기 허술한 돌담을 지켜보려는 미망이었을 뿐 어찌 황제의 군사에 대적할 뜻이 있었겠나이까.

황제께서 친히 여러 강을 건너시어 이 궁벽한 산골로 내려오시니, 오셔서 소방의 죄를 물으시더라도 복되고 또 기뻐서 달려 나가 배알하려 하나 황제의 크신 노여움과 깊으신 근심이 또한 두려워서 소방은 차마 나아가지 못하고 돌담 안에서 머리를 조아릴 뿐이옵니다.

이제 스스로 새로워지고 기뻐서 따르려는 소방의 뜻이 돌담 안에서 시들지 않도록 살펴주시옵고, 모든 생령들의 살고자 하는 기운을 거두어서 기르시는 황제의 천하에 소방이 깃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3. 문장에 대한 판결(심판)

다음은 칸의 문장이다. 칸은 그 출신이 미개한 문명에서 비롯되었지만 원저 김훈의 문장 속에서 칸이 가진 문장은 마치 문장의 신(神)인 것만 같이 임한다.

"칸의 문장은 거침없고 꾸밈이 없었으며, 창으로 범을 찌르듯 달려들었다. 그 문장은 번뜩이는 눈매에서 나온 듯했다."

칸는 인조에게 보내는 조서를 작성한 문한관을 불러 '고사를 끌어 대거나 문채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들을 다 뭉개고 꾸짖으며' 이런 문장을 주문한다.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그런가 하면 조선 왕이 보내온 문서를 군장들 앞으로 내던지며 이렇게 판결한다.

"조선의 말이 사특하다. 이것이 대체 무슨 말이냐? 말하라. 너희들은 알겠느냐? 나는 모르겠다. 이것이 뭐라고 해대는 말이냐?"

남한산성

(노비 출신의 조선인 통역관 정명수가 이렇게 부연했다)
"저들이 삶을 구걸하면서도,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으니..."

(칸이 되받았다)
"거기까지는 나도 알겠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냐?"

"폐하께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주십사는 뜻으로 아옵니다."

(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노한 목소리로 고함쳤다.)
"그 말이냐? 그 말이 이리도 요사스러우냐?"

"저들의 말이 본래 그러한지라..."

저들의 말이 본래 그러한지라..., 이것은 참으로 이 '남한산성'이 말하려고 하는 '문장'의 진정한 표제가 아닐 수 없다. 조선인의 말과 문장은 주화인 동시에 척화요, 칼인 동시에 방패요, 재능인 동시에 장애/결함인 까닭이다.

칸의 첫 조서에서는 사실 이 사특한 문장과 말을 이렇게 칭송한 바 있다.

"... 너의 아들(세자)이 준수하고 총명하며, 대신들의 문장이 곱고 범절이 반듯해서 옥같이 맑다 하니 가까이 두려 한다. 내 어여삐 쓰다듬고 가르쳐서 너희의 충심이 무르익어 아름다운 날에 마땅히 좋은 옷을 입혀서 돌려보내겠다...."

영화상에서 칼로 자결한 김상헌은 실제로는 목을 매달아 죽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가족에게 발견되어 살게 되었다고 사가는 전한다(그 자결의 진위를 의심스러워하면서). 그렇게 살아남은 김상헌이 원작에서 송파강을 건너며 이런 문장에 잠긴다.

"길들은 아득해서 조령관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물 위에 어른거리는 길들을 바라보면서 성 안에서 목을 매달았을 때 죽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남은 날들이 아까웠다."

죽지 않기를 잘했다는 그의 문장은, "살아서 죽어 있느니 죽어서 살아 있느니만 못하다"했던 그의 평소 문장답지 않은 상념이었으나, 그것은 그 개인의 간사함이라기보다는 삶 자체가 지닌 간사함에서 배어나오는 관성이 아니겠는가.

주화파 최명길의 문장이 우리 모두의 문장이듯, 척화파 김상헌의 문장 역시 우리 모두가 구사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남한산성

4. 문장의 미래

이렇게 발신한(incarnated) 문장들의 결과와 미래는 소설과 영화 이상으로 참담했다.

-우선 대군/세자와 궁빈들 외에도 약 50만을 청이 끌고갔다.
-그리고 명나라와 단교할 것.
-청이 명을 정벌할 시 보병, 기병, 수군을 보낼 것.
-군중 포로로 잡아간 사람이 압록강을 건너 도망해 되돌아올 시 체포해 돌려보낼 것.
-무너진 성벽의 신축, 수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황금 1백냥, 백은 1천냥, 수우각궁면 2백 부, 표피 1백장...(너무 많아 생략).

저렇게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올 수 있는 방도가 하나 있었다. 바로 속전(ransom)이었다.

처음에는 1인당 10냥 정도 하던 것이 가격이 계속 뛰었다. 양반의 경우는 값을 더 올려주고라도 속히 데려오려 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에 함께 갇혔던 이성구의 경우는 무려 1,500금을 주고서 아들을 데려왔다. 그리하여 일반인에게는 속전의 방도마저 요원하여졌다.

또 하나의 문제는 돌아온 여성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남성들이 전쟁에 져서 포로로 보냈던 여성들이 돌아왔을 때, 다시 결합해 살 것인가? 내칠 것인가? 이미 오랑캐에게 더럽혀진 몸. 사대부 양반 가운데 재결합하는 경우는 없었다 전한다. 이것이 환향녀/환향년의 유래가 되었다. (당대에 이 속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기록은 없다.)

5. 말먼지

김훈의 원작에는 말(言)먼지라는 챕터가 있다. 말 그대로 용천하는 발신 문장들에 대한 개탄일 것이다. 상기 발췌한 문장들 외에도 수많은 주옥 같은 문장들이 말먼지와 같이 원작과 영화에 잠겨 있다.

남한산성
남한산성

그리고 이것을 영화로 관람한 정치인들의 주옥 같은 문장도 속속 올라오고 있다.

이 리뷰도 그 말먼지 중 하나일 것이지만서도.

에필로그

원작으로 접했던 남한산성을 영화로 다시 보면서 느꼈던 나의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다.

"어찌하여 우리 정부는 중국에 저 막대한 피해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청구하지 않는 것일까? 일본에 청구하는 것처럼 하지 않고. 왜일까?"

이영진 교수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이다. 그는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매우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해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신학자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자본적 교회(대장간)>,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