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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기타모리 가조 | 이원재 역 | 새물결플러스 | 376쪽 | 17,000원

하나님이 아프시다. 이 책의 결론은 '하나님의 아픔'이다. 그것은 시작이고, 과정이며, 결론이다.

하나님이 아프다는 말은 위험한 말이다. 신은 아프지 않기 때문이다. 신이 아프다면 그는 이미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은 절대 아플 수 없다. 그러나 참으로 신은 아프다. 우리는 이제 아픈 하나님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이라는 도발적인 책의 제목은, 1946년 일본 저명한 신학자 중 한 명인 기타모리 가조가 고작 서른이란 나이에 써낸 역작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무정(無情)의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으로 인해 아픔을 느끼며, 용서와 사랑으로 공의와 구원을 완성한다고 말한다. 그의 사상은 패전 후 죽음과 슬픔과 고뇌와 삶의 회의를 느낀 일본인들에게 절대적 지지를 얻었을 뿐 아니라, 일본 신학의 수준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들었다.

우리는 이 책을 살펴보면서 그가 주장하는 아파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시며, 왜 아파하시며, 그 아픔의 결과는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또한 그가 주장하는 주요한 논지의 흐름과 한계 등도 살펴보려고 한다.

이 책은 동일한 제목을 1987년 양서각에서 박석규의 번역에 의해 동일한 제목으로 출판된 적이 있다. 필자는 먼저 목차를 따라 저자의 주장을 간략하게 요약·정리한 다음, 그의 주장에 비평적 서술을 하고자 한다.

서론

일반적 신론에서 하나님은 아파할 수 없다. 아니 아파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기타모리 가조는 예레미야 31장 20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에 주목한다. 그는 부록으로 실은 예레미야 31장 20절과 이사야 63장 15절의 주해를 통해, 아프신 하나님을 찾아낸다. 특히 예레미야 31장 20절을 '내 창자가 들끓으니'를 '내 창자가 아프다'고 번역,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연민의 마음을 강조한다.

이런 '하나님의 아픔'은 저자의 주장하는 '아프신 하나님'의 핵심이며, 세상 속에서 내재하고 초월하시는 하나님,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끌고 온다.

필자는 저자의 주장을 좀 더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 1, 2, 9, 11장을 주의깊게 읽을 것을 권한다. 특히 저자의 해설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한국 독자들이라면 역자 해제를 꼭 읽어 봐야 한다. 하나님의 슬픔의 신학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자, 이 책의 한계가 역자 해제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은 난해다. 일본만의 정서나 일본의 역사적 배경과 문학에 대한 깊이가 없다면, 저자의 주장들은 모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본론

아픔과 하나님은 1장의 주제이며, 이 책의 전체적인 흐름을 주도하며 기저(基底)에 자리한다. 먼저 가장 핵심적인 문장부터 언급해 보자.

"아픔에 있어서의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아픔으로 우리 인간의 아픔을 해결하여 주는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상처로 우리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는 주님이시다(33쪽)."

서론이자 결론인 이 문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풀어야 할 중요한 숙제를 발견한다. 먼저, '하나님의 아픔'이 무엇인가를 밝혀야 한다. 또한 하나님 자신의 아픔으로 '인간의 아픔을 해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세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상처로 우리 인간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뜻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픔과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가 인간의 문제, 즉 아픔과 상처를 해결하고 치유한다는 공식이 만들어진다. '구원은 우리의 부서진 현실을 하나님이 끝까지 감싸 안으신다는 소식(33쪽)'이라는 정의에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픔'은 무엇인가? 저자는 에두르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의 아픔은 바로 하나님의 아픔에 기초한 사랑(34쪽)'이라고 밝힌다. 하나님의 아픔에 기초한 사랑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을 사랑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35쪽)'에서 나오는 아픔이다. 즉 공의로 죄인을 죽여야 하는 동시에 사랑으로 죄인을 구원하려는 마음의 격동에서 오는 아픔이다.

하나님의 내재한 마음의 발현이 곧 그리스도이며, 십자가이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을 죽음에 내주(심으로)... 그 자신이 부서져 상처 입고 아프신 것이다(36쪽).' 기타모리 가조는 첫 장에서 자신의 모든 주장을 요약한다. 앞으로 이어질 내용들은 1장의 풀이 내지 해설이라 할 수 있다.

아픔의 신학을 정의하는 기조는 곧바로 '아픔이 없는 하나님을 가르치는 신학에 대하여 절복(37쪽)'시키야 한다며, 서구 신학과 철학을 비판한다. 바르트, 리츨, 슐라이어마허, 헤르만, 하르나크(하르낙) 등의 신학을 언급하며, 비록 적지 않는 부분에서 공감할 수 있지만 '벗이여, 이 곡조는 아니오(40쪽)!'라고 말한다.

그는 2장 '하나님의 아픔과 역사적 예수'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아픔으로부터 역사적 예수로(62쪽)'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는 수단이 아닌 '하나님의 아픔이란 개념 그 자체 속에 이미 역사적 예수의 필연성'(63쪽)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진노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사랑(68쪽)'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시 하나님의 아픔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픔에 기초한 사랑(69쪽)'이 된다.

2장까지의 내용을 통해 저자는 '하나님의 아픔'과 '예수의 상처'를 연결한다. 3장 '하나님의 본질로서의 아픔'에서는 하나님의 아픔이 곧 예수의 죽음임을 밝힌다. 그는 히브리서 2장 10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하나님에게 상응하는 것(85쪽)'으로 풀어낸다. '상응'은 '필연적'이며, 아들의 고난은 아버지의 아픔이 된다.

"복음의 하나님은 아들을 죽게 하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그리고 그 행위에서 아프신 하나님이다. 아버지가 그 사랑하는 아들, 그것도 독자를 죽게 한다(89쪽)."

 

어두운 구름 어두움 아픔
▲ⓒPixabay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님의 아픔'이며, '십자가의 언어로부터 해석(89쪽)'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아픔을 부끄러워하는 '영광의 신학'과 하나님이 아픔을 품고 있는 '십자가의 신학'은 길을 달리한다.

4장 '하나님의 아픔에 대한 섬김'에서는 '십자가 신학'의 길을 제시한다. '자기의 아픔으로써 하나님의 아픔을 섬기라(97쪽)'고 충고한다. 그렇다면 '자기의 아픔' 즉 우리의 아픔은 무엇인가? 저자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괴로움 속으로 보내어 그를 죽게 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아픔(103쪽)'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한다.

'어버이와 자녀 사이(103쪽)'를 인간의 가장 큰 아픔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의아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자녀가 아닌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마도 후에 일본의 문학을 인용하며 인간의 비참을 설명하기 위한 저자의 일본식 사유일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저자는 우리의 아픔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우리의 아픔이 성화되는 것'이며, 그 아픔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 '올바르고 의의 있는 것이 된다'(105쪽)고 말한다.

좀 더 풀어낸다면 인간의 아픔으로 하나님의 아픔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줌(버리고 죽임)으로 사람을 섬겼듯, 사람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자녀를 버림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약간 모호한 이 설명은 다음 장인 5장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5장은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를 다룬다. 예레미야 31장 20절을 통해 '하나님의 아픔'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저자는 '아픔은 본래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으나 사랑을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본다. 인간이 하나님의 아픔을 알고, 동참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아픔을 통해서(116쪽)'이다.

여기서 인간의 아픔은 하나님의 아픔의 상징이 되고, 그 아픔을 매개로 '하나님과 인간이 결합(119쪽)'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은 인간의 아픔을 하나님의 아픔(십자가)으로 치유하게 한다. 하나님의 아픔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이며, 동시에 사랑이다.

저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아픔에 기초한 사랑(124쪽)'으로 정의한다. 인간이 자신의 아픔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항상 우리 몸에 짊어지워져 있어야만 한다(고후 4:10)'는 바울의 충고를 따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결합'을 곧장 6장에서 '아픔의 신비주의'로 이끈다. 6장은 다음 문장으로 요약된다.

"우리의 아픔은 하나님의 아픔과 합일하기 위한 통로가 됨으로써 비로소 치유되고 구원되며, 또 의의 있는 것이 되기에 이른다. 우리의 상처는 주님의 상처에 의해 치유되는 것이다(벧전 2:24, 159쪽)."

7장 '하나님의 아픔과 윤리'에서는 이웃과의 관계를 다룬다. 그가 주창하는 '아픔의 윤리'는 하나님의 아픔을 공유함으로 이웃과 이어질 수 있다. 죄는 '사랑을 배반하는 것(179쪽)'에 다름 아니다.

아픔의 신학은 자신을 배신한 죄인들을 사랑한 것에 기초하듯, '아픔의 윤리' 역시 '상대가 우리의 사랑을 배반하여 원수가 될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상대를 계속하여 더욱더 사랑(185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픔의 윤리는 단회적이지 않고 '항상성'에 있다.

저자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명시(明示) 한다. 아픔의 윤리는 항상 실패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절하는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력해야 하고, 애달프고, 미완성으로 남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숙명적 패배(188쪽)'로 정의한다.

"이 윤리가 패배한 까닭에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하여 죄의 용서로서의 하나님의 아픔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아픔에 기초한 사랑이기 때문이다(188쪽)."

기타모리 신학의 모순과 한계

필자의 논지를 더 이상 따라갈 필요는 없는 듯 하다. 8장부터 10장까지는 독자들에게 맡긴다. 저자의 한계이자 모순이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11장이다.

여기부터는 역자의 해제를 따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출판 연도는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한 직후인 1946년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일본인들이 가지는 패전 후의 우울함과 피해의식을 감싸 안는 작업을 하게 된다. 저자의 의도이든 아니든 이 책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간다.

1987년 양서각에서 출간된 처음 출간됐을 때의 역자인 박석규 목사는 기타모리 가조에게 직접 배운 제자이다. 책이 출판된 시기는 패전 직후, 아픔과 죽음, 그리고 상실이 일본 열도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 책은 아픈 일본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당신들과 함께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논지를 따라가 보면, 아픔을 가진 일본인들은 아픈 하나님과 깊은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것은 보편화된 당시의 정서였다.

그는 11장 '하나님의 아픔과 복음사'라는 제목으로 억지스러운 주장을 한다. 그는 초대교회의 신학을 '그리스-로마적(259쪽)'으로 규정한다.

초대교회 가장 중요한 신조였던 니케아 신조와 아타나시오스 신조를 언급하며, '정작 그리스-로마적 교회의 신학은 이른바 내재적 삼위일체라는 형태로 결정화(260쪽)'되었다고 단언한다. 구속사적 의미를 가진 경륜적 삼위일체는 원시교회로부터 '계승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 교회의 고유한 발언이 아니다(260쪽).'라고 강조한다.

또한 종교개혁을 통해 이루어낸 '게르만 신학' 역시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하며 '그리스인의 마음은 하나님의 아픔을 보는 눈이 결여되어' 있고, 게르만 신학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픔이 관심을 끌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262쪽)'고 주장한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의 비극 문학'이다. 또한 '일본 비극은 다른 나라의 비극과 현저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266쪽)으며, 일본인만의 특유한 인간관계의 비극은 '쓰라림(つらさ)'이란 것이다.

"일본 비극의 근본인 '쓰라림'은 타자를 사랑해서 살리기 위해 자기를 괴롭히고 죽게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를 괴롭히고 죽게 하는 데서 실현된다(271쪽)."

일본 비극 속에서 나타난 쓰라림은 '하나님의 아픔에 가장 깊이 호응한다(271쪽)'고 말한다. 필자는 4장 '하나님의 아픔에 대한 섬김'을 설명하면서, 저자가 인간의 아픔을 '자녀를 버림'으로 해석한다. 필자의 이러한 주장은 11장에 나타난 일본의 비극에서 인간의 아픔과 하나님의 아픔의 '결합(5장)'을 저자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사를 고찰하며, 앞서서는 '거주의 경계'로서의 '공간적 계기에 입각해서 이루어'졌고, 다시 '시기의 한계'로서 시간적 계기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272쪽). 그리스-로마적 신학과 게르만적(루터) 신학의 완전하지 못한 이유는, 그 시대에 아픔과 죽음이 희소한 까닭이다. 저자는 당돌하게 이렇게 주장한다.

"하나님의 아픔의 복음은 영원한 진리인 까닭에 그것은 어떠한 시대에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 그리스적 신학이나 근대주의적 신학이 탄생했던 시대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픔을 파악하기 곤란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은 가장 우세한 의미에서 죽음의 시대이자 아픔의 시대이다. ... 여기에 복음사가 시기의 한계를 그 계기로 삼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아픔은 아픔의 시대에서야말로 파악될 것이다(273쪽)."

우린 여기서 저자의 억지스러움과 모순을 발견한다. 저자의 의식 속에는 일본식 신학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신학이며, 완성된 단계에 있다고 본다. 바로 이 부분에서 기타모리 가조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조선에 심은 '식민주의 사상'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불교의 용어와 사상을 그대로 가져옴으로써 서구 신학의 퇴보를 무의식중에 강요하며, 일본의 불교 정신이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에 더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저자의 기저에는 서구를 비판하고 동양, 특히 일본만을 찬양하는 전형적인 일본인의 천황 숭배 사상이 전제돼 있어 보인다.

단 한 번도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비판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피해자로서의 하나님의 아픔과 연대하려는 성향은 비겁해 보인다. '하나님이 아픔은 일본의 마음에 의해서야말로 선명하게 우러러보게 될 것(274쪽)'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오직 일본'이라는 자만(自慢)이 숨겨져 있다.

나가면서

기타모리 가조의 이 책은 탁월하다. 그의 책은 몰트만을 비롯해 적지 않은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동안 영원한 하나님은 곧 불변의 하나님의 하나님, 또는 무정의 하나님으로만 상정되었다. 그러나 기타모리 가조 덕분에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아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공의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며 고뇌하는 하나님의 아픔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결미에서 민족주의로 환원했고, 가해자이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하나님의 아픔과 일본의 패전을 '결합'시켰다. 그는 '아픔'과 '사랑'으로 새로운 복음을 제시했지만, 현저하게 신학을 축소시켰다.

서구 신학에 함몰되어 한국의 신학을 만들지도 못한 우리나라에 비해, 기타모리 가조는 서툰 방법으로 서구 신학을 일본 신학으로 변형시키려 했다. 우리나라는 빵을 굽기 시작하지도 않았다면, 기타모리는 너무 태워버린 격이다.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은 시대의 요청이다. 아픔을 간직한 이웃을 섬기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 이제 아픔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약간의 난해함을 주기는 했지만, 시대를 통찰하는 귀한 책이다.

저자의 일본식 전제와 결론을 제하고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임에 분명하다. 시대를 고민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정현욱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