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우 목사.
(Photo : ) ▲이창우 목사.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믿음의 확신 혹은 구원의 확신을 가르칩니다. 성도의 믿음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것 같으면, 다시 한 번 붙잡아 주기 위해 성경구절을 찾아 제시합니다. 교회 교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꽉 붙들고 계신지를 알려주려 합니다.

저 또한 대학생 시절에 구원의 확신편에 대해 성경공부를 지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교사들은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주었으며, 믿음이 흔들린다는 말을 믿음이 약하거나 혹은 없다고 이해했습니다.

키에르케고어는 이런 현상들에 대해 도리어 문제를 제기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흔들리는 것이 당연하고, 더 나아가 요동쳐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믿음의 확신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믿음은 '행위 앞에서' 요동쳐야 한다는 겁니다.

깊이 사랑하고 있는 남녀가 있다면 그들 각각의 마음은 어떤 상태일까요? 요동칩니다. 그 사랑을 숨기려 할지라도 숨길 수 없을 만큼 내적으로 요동칩니다. 사랑에 빠지고도 그 마음이 요동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지요. 이처럼 진정한 믿음을 가지게 된 자는 행위 앞에서 요동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초인종 의인'으로 알려진 안치범 씨를 기억하시나요? 불이 난 빌라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이를 알려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지만, 정작 자신은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유독 손에만 심한 화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세입자들의 철문을 두드리다 입은 상처랍니다. 사람들은 그를 의인이라고 불렀지요.

그분의 의로운 '행위' 덕분에 목숨을 건진 누군가가 있을 겁니다. 그는 초인종 의인에 대해 무엇을 기억할까요? 그는 죽고 없지만, 그의 행위는 간직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이 살았다고 믿는다면, 아마 그는 의인의 죽음 앞에, 그의 행위 앞에 두려워 떨 것입니다. 살았다는 '확신'에 기뻐하기보다, 의인의 죽음 앞에서 더욱 숙연해져, 그의 죽음에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더욱 열심히 살 것에 대해 동기부여를 받지 않겠습니까?

세월호 사건 때 목숨을 건진 어린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 될수록, 그는 살았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보다 자신을 구하고 대신 죽은 희생자에 대해 더욱 궁금해하지 않겠습니까? 희생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어린아이는 더욱 그 의인의 행위를 간직하고 기념하지 않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다시 얻은 그의 삶을 대충 살기보다, 역시 그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믿음은 행위 앞에서 요동쳐야 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요. 성서에서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아브라함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은 세상으로부터 받은 유혹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각자에게 주어진 현실이 있습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돌보느라 바쁩니다. 공무원은 공무원의 일을, 학자는 학자의 일을, 강도는 강도의 일을, 예술가는 예술가의 일을, 빈둥거리는 자 역시 빈둥거리는 일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지요. 그러나 이런 세상의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믿음의 시험이 아닙니다. 이런 일을 하다 당하는 고난은 유혹에 가깝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 사로잡혀 있을 뿐입니다.

믿음의 시험은 내면적입니다. 믿음의 시험을 당한 자, 그는 고독합니다. 그는 저 외딴 곳에 갇혀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영적 시험 중에 있는 고독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씨름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자신의 내면에 완전히 갇혀 있습니다. 영적 시험에 사로잡힌 자의 고통은 세상의 유혹 가운데 있는 사람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영적 시험에 한 시간 정도 노출된 것과 비교할 때, 세상의 유혹에 1년 동안 노출된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는 우리 안에 갇힌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며 이리 저리 서성이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를 가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정말로 놀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가둔 것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시험을 당하고 있는 자, 그는 믿음의 시험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즐긴다고 생각합니까? 확신하건대, 믿음의 길을 가는 어떤 사람도 이 길을 가면서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애원하는 아이처럼, 하나님께 이 시험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이 길을 가야 했지요.

아브라함이 그 길을 갈 때, 두려움이 폭풍 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는 깜짝 놀라 뒤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뒤를 돌아봅니다. 두려움이 폭동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그는 뒤로 돌아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영적으로 충분히 무장했고, 이상하게도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그를 공격합니다. 그를 미워하고, 그를 저주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일이 들통이라도 난다면, 사람들은 그를 향해 소리칠 것입니다. "미쳤군요! 아들을 죽이다니! 당신은 자신과 모두를 불행에 빠지게 하고 있다고요! 당장 멈추시오!"

사랑하는 독자, 믿음은 이렇게 요동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로 든 사랑하는 남녀나 초인종 의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예들은 어떤 예감, 느낌에 불과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스스로 죽이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그 '느낌'만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말로 자신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정말로! 아브라함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 무엇인지 '느낌'만 받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말로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모든 것은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랑이 뭐라고!

이 사랑이 여러분을 사랑해서 세상에 왔다고 믿는다면, 그래서 그분이 사랑 때문에 죽고 여러분이 대신 살았고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의 확신에 너무 쉽게 기뻐하기보다는 더욱 그분의 행위를 간직하지 않겠습니까? 평생 여러분도 그분처럼 살기 위해 동기부여를 받지 않겠습니까? 그분의 행위는 여러분이 살아가는 데 평생 메아리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구원의 감격에 마냥 기뻐하기만 한다면, 혹은 행위 앞에 요동치지 않는다면, 그분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당신이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구원의 확신만을 가지고 마냥 기뻐하기만 하는 그런 가벼운 사람입니까?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