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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 칼럼] 겸손한 자만이 먹고 배부르는 이신칭의

기독일보 la@christianitydaily.com

입력 Sep 06, 2017 03:41 P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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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 목사
(Photo : ) ▲이경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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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以信稱義)는 율법을 통해 자신의 부패와 무능을 깨닫고 깨어진 자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겸비한 교리입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몽학선생 율법으로부터 율법의 정죄를 받아, 절체절명의 심정으로 구원을 희구하는 자에게만(행 16:30) 눈에 띄는 교리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그리스도로부터 전가(imputatio)받은 의(義)인 이신칭의는, 반드시 자신의 전적 무능에 대한 인정이 먼저 요구됩니다. 이는 죄인이 의(義)에 이르는 일종의 영적 공식이며,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자기 의에 배불러 여유 있는 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교리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그 전형(典型)입니다. 이에 반해 자신들의 의의 부재를 통감한 창기, 세리, 죄인들에게는 이신칭의가 복음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도 칭의유보자들이 이신칭의를 거부하는 주된 이유는 어떤 거창한 신학 이론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의(義)에 배불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신칭의가 '인간의 전적 부패', '의의 전가교리'와 함께 가르쳐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신칭의는 오직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만이 먹고 배부를 수 있는 교리입니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시 22:26)."

영국의 청교도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의(義)의 부재에 대한 겸비함에 부어지는 하나님 사랑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실제적인 죄와 타고난 결함에 대한 의식은 나를 지극히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이 값없이 풍성하게 주어져 내 영혼에 빛과 힘이 임하며, 그로 인해 나는 경외스러운 마음에 할 말울 잃고 침묵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칭의론 논쟁(Justification by Faith Alone)> 저자 필립 입슨(Philip H. Eveson) 역시 이신칭의가 겸비한 죄인들에게 경이와 찬양을 일으키는 교리라고 했습니다.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이 행위는 결코 측량할 수 없는 신비한 하나님의 방법과 비밀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 이 일로 인해 놀라며 겸손해지고, 영원까지 경이와 사랑과 찬양으로 충만해 질 것이다." 의의 부재에 대한 자각에서 오는 겸비함은 은혜와 구원에의 첩경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과거 개혁자들이 가졌던 겸비함이 희귀하며, 그 이유 중 하나가 겸손에 대한 왜곡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대개 겸손 하면, 사람들 앞에서 언행심사를 겸양지덕 있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율법적 두려움으로 슬슬 기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겸손은 어거스틴(Augustinus, 354-430)의 말대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갖는 신앙 태도입니다. 곧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달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의에 전적으로 기대고, 그가 주시는 의를 감읍함으로 받는 구속적 겸손입니다.

이러한 구속적 겸손 개념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을-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겸손으로 구원받는다'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을 만합니다. 겸손의 장(章)이라 불리는 빌립보서 2장 5-8절에서 정의한 겸손도 흔히 상상하듯, 단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흉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들의 겸손과 죄인의 겸손은 같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겸손이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어 죽기까지 복종한 것이었다면, 죄인의 겸손은 그리스도가 겸손으로 이루신 의(義)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이 외의 다른 겸손은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아무리 겸양지덕으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 앞에서 슬슬 기어도,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교만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요 6:40)'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나 윤리에서는 찾을 수 없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겸손 개념입니다.

성경이 목이 곧고 완악한(교만한) 인간들이라고 책망한 자들이 바로 믿음으로 구원 얻는 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행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행 7:51)."

18세기 유럽 계몽주의(Enlightenment) 사상을 가졌던 사람들은 구원이라는 말을 싫어했습니다. 인간의 결핍은 인정하지만 구원이 필요할 만큼은 아니라는 것이고, 구원이라는 용어는 인간을 너무 비참하고 절망적인 존재로 비하시켜 자존감을 해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들은 "계몽(啓蒙)"이라는 자신들의 별명 그대로, 인간에게는 약간의 '비췸(enlightenment)'만 필요하다는 낙관론적인 인간 이해를 가졌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는 것도, 갈팡질팡하는 인간 군상들에게 약간의 방향 제시와 위로를 주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간혹 구원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문학인들의 '구원으로서의 문학' 개념 같은 것으로, 삶의 질 고급화(high-quality)를 담보해 주는 문화적 구원개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지옥 심판에서의 구원 같은 것은 광신적 교리로 치부하고, 십자가나 보혈, 이신칭의 같은 원색적인 용어도 백안시(白眼視)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계몽주의자들의 견해와는 달리 인간에 대해 파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인간은 전적 부패한 죄인일 뿐더러 스스로의 힘으로는 파멸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전적 무능한 존재로 규정하며, 그리스도의 의(義)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못 박습니다. 이신칭의는 바로 그런 전적 부패 무능한 인간들에게 시여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시 145:14)". 여기서 '넘어지는 자'란 '자기 의로 설 수 없는 자'를, '비굴한 자'는 '자기 의로 설 수 없어 하나님의 구원을 희구하는 자'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넘어지고 비굴한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영혼을 소생시킵니다(사 57:15). 하나님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지만, 자기 의의 부재를 애통해 하며 의를 갈망하는 겸손한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스스로 서지 못하여 그를 의지하는 자를 연민하시고, 값을 지불할 수 없는 빈손 가진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이미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는 현대 종교인들에게, 신앙생활의 목적이 삶의 질을 고양시키고 자신들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가난하고 비천한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있는 자에게 더 주시는 더함(to add)의 하나님이십니다(마 25:29). 그들이 좋아하는 슬로건도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 개념은 배부른 유한족들이 쓴 '내가복음'의 신개념이지 성경적 하나님 개념은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자,' 곧 넘어지고 비굴한 자를 일으키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자기가 뭔가를 할 수 있고, 댓가를 지불하려는 자는 구원하시지 않고 빈손만을 내미는 자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높이 쳐주는 인간형도,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요 15:5), 자기 신뢰를 철회하고 성령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빌 3:3)' 탈(脫)독립적이고 탈자립적인 인간입니다.

이런 신앙 관념은 과거 유물론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인간의 잠재능력을 말살하고 역사 발전을 막는 아편이라는 비난을 받게 했을 뿐더러,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자긍심으로 충만한 현대인들에게도 역시 수용 불가한 개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대다수 기독교인들에게까지도 용납받지 못합니다. 자기 의(義)에 배부른 현대인들에게 '인간의 전적 타락', '불가항력적 은혜', '이신칭의'같은 교리는 잠꼬대로 들릴 뿐입니다.

이어 겸비함으로 받는 이신칭의의가 의의 확신을 갖다 주는 원천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는 이신칭의자의 의(義)가 가변적인 자기 내면의 산물이 아닌, 그리스도로부터 전가 받은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중세 이신행칭의(以信行稱義)의 로마 천주교도들보다 이신칭의의 종교개혁자들이 의의 확신이 더 두터웠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혹자는 확신은 겸손과는 상반되고 교만과 상통한다고 추정합니다. 그래서 과도한 의(義)의 확신을 가진 자들을 만나면 "필시 저사람 안에는 확신을 일으킬만한 뭔가가 있으니 저리 교만에 가까운 확신을 보이는 거야!" 라는 상상을 합니다.

 

 

 

물론 의의 확신이 자기 내면의 산물이라면 그 추정이 타당하겠지만, 전가 받은 의(義)에서 나왔다면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혹 일시적으로 자기 의로 확신을 가졌을지라도 신기루처럼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의의 확신을 유지시켜 줄 충분하고도 지속적인 의가 그에게서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견고하고 지속적인 의의 확신은 역설적이게도 자기 안에 그럴만한 근거가 없는, 그리스도로부터 전가 받은 의를 가진 자에게서만 발견됩니다.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자신이 가진 흔들릴 수 없는 의의 확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전가받은 이신칭의에서 나온 것임을 고백합니다. "사단은 나릍 고소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주 예수님이 나의 의가 되시는데 네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무엇이라 비난하느냐?'고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내 옷이 아니라 그분의 옷올 입고 서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고 빚을 준 일도 없지만,그 분께서 나에게 은혜의 상급을 주시리라는 것과 또 내 안에서나 나에 의해 그분께서 이루신 일이 마치 내 힘으로 내가 이룬 일인 양 보상해 주시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오, 이 큰 은혜를 주신 거룩하신 예수님께 대해 얼마나 큰 열심과 사랑을 품어야 하겠습니까."

이신칭의자가 의의 확신을 갖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전가받은 의가 율법의 마침인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라 실패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의 의를 가졌다는 것은, 나의 유약함이나 어떤 장애물에 의해서도 손상받지 않는 완전한 의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의의 언약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실패 없이 견고히 전수 될 수 있었음은, 의의 언약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성취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 4:16)."

복되도다, 의의 확신으로 충만한 겸비한 이신칭의자들이여!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연구위원,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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