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과 거절 사이에서

스탠리 J. 그렌츠 | 김대중 역 | 새물결플러스 | 312쪽 | 15,000원

성윤리학
헬무트 틸리케 | 김재철 역 | 새물결플러스 | 490쪽 | 20,000원

동성애, 현재 한국교회를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화제(話題)입니다. 한쪽에서는 동성애를 절대 터부시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용납해도 되는 일반적인 사안으로 생각합니다. 중간의 입장이 없을 만큼 극단의 주장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입니다. 오늘은 두 권의 책을 통해 기독교적 동성애의 입장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스탠리 J. 그렌츠(Stanley J. Grenz)의 <환영과 거절 사이에서>는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동성애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즉 역사적, 생물학적, 성경적 관점에서 두루두루 동성애를 살펴봅니다. 그에 비해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의 <성윤리학>은 동성의 문제에 한정하지 않고 '성'에 대한 전반적인 신학적 물음에 답할 것입니다. 저는 스탠리 J. 그렌츠의 책을 기본 텍스트로 삼고, 헬무트 틸리케의 책을 참조하는 형식을 통해 동성애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스탠리 J. 그렌츠는 비록 2005년 먼저 주님의 품에 안기기는 했지만 가장 현대적 관점에서 동성애를 다루고 있으며, 다양한 관점에서 포괄적으로 전망하기 때문에 동성애의 다양한 목소리를 현대적 입장에서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헬무트 틸리케는 1986년 주님께 부름받았기에 가장 최근의 동성애 문제는 다룰 수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헬무트 틸리케는 바르트 이후 가장 탁월한 독일의 신학자라는 평을 받을 뿐 아니라, 상당히 전통적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실존적이며 실용적인 측면을 겸비한 신학자입니다. 즉 그는 현장을 잃어버리지 않는 학자요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설교자로 살아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좀 더 실용적 측면에서 동성애 문제를 다룹니다.

 

▲동성애에 대한 책 두 권. ⓒ정현욱 목사 제공
(Photo : ) ▲동성애에 대한 책 두 권. ⓒ정현욱 목사 제공

1. 동성애란 무엇인가?

 

필자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0-40년 전까지만 해도 동성애는 타지의 언어였고, 낯선 외국의 단어들이었습니다. 지금 동성애라고 말할 수 있는 행위들을 당시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했습니다. 즉 여자친구들끼리 손을 잡고 다니거나, 남자친구들끼리 아무렇지 않게 단짝을 이루며 다녔습니다.

그러다 1990년 들어서면서 동성애가 한국 안으로 물밀 듯이 들어오면서, 이전의 동성의 우정(友情)은 터부시 됩니다. 요즘 거리를 거닐며 동성끼리 손을 잡고 다니면 거의 대부분 동성애로 오해받거나 실제 동성애자들입니다. 이젠 동성애자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손을 잡지 않고 피하는 경향이 심해졌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리에서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는 행위도 희소하지만 발견됩니다.

어쨌든 두 가지 모두 동성애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이 그리 반갑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동성애가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정의부터 내려 봅시다.

동성애(同性愛)의 정의

사전적 의미에서 동성애는 한자로 同性愛로 쓰며, 뜻은 '[명사] 동성 간의 사랑. 또는 동성에 대한 사랑'으로 서술합니다. 유의어로 '동성연애, 레즈비언, 호모, 게이'가 있습니다. 동성연애는 남녀 구분 없는 동성 간의 사랑을 지칭하고, 게이는 남자 간의 사랑, 레즈비언은 여성 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호모는 라틴어로 사람을 뜻하는 'homo'로서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지만, 주로 남성 동성애자를 뜻합니다. 영어로는 'homosexuality', 'homosexual love'를 사용합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같은 성(sex)을 가진 사람끼리 사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레즈비언(lesbian)란 단어는 여성 동성애자를 일컫는 말로, 고대 동성애가 성행했다는 에게해 레스보스(Lesbos) 섬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사실 동성애를 정의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정과 동성애를 명확하게 구분하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동성애가 단순한 호감인지 아니면 성적 욕구까지 결부되어 있는지를 구분하는 작업도 아직 명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성 간의 사랑(love)만으로 동성애로 정의하기는 너무나 협소합니다. 그렇다면 동성애는 무엇을 뜻할까요? 그렌츠는 이렇게 말합니다.

"동성애란 동성인 사람들로 인해 성적으로 흥분된 상태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겠다. 동성애자는 동성에게 에로틱함을 느끼는(homoerotic) 사람이다(25쪽)."

문제는 동성애자들이 이러한 정의에 대해 '너무나 협소한 정의'라며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게이인 가톨릭 사제는 동성애를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유대'하고,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로 보아야 하며,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우리의 독특한 방식을 설명해주고 밝혀준다(27쪽)"고 말합니다.

심지어 여성 동성애자들인 레즈비언의 경우는 대단히 정치적인데, 그들은 가부장적 사회구조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동성애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더 많은 논의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동성애'라는 단어가 가지는 함의(含意)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동성애라는 단어만으로 혐오하고, 터부시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사회적 도전에 직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동성애의 문제를 좀 더 건설적이고 명확한 이론적 토대와 논의를 거칠 필요가 있다는 점은 동성애를 정의하는 부분에서 벌써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성애를 정의함에 있어 동성애 자체를 단계별로 구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 그것을 논외로 하겠습니다. 동성애 문제는 현 시대에 매우 중요하고, 단번에 끝날 논제(論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동성애의 전반적 문제와 성경이 말하는 동성애를 중심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환영과 거절 사이에서 Stanley J. Grenz
▲스탠리 그렌츠와 그의 책 <환영과 거절 사이에서>.

2. 동성애의 현대적 고찰

 

그렌츠는 1장에서 '현대의 관점에서 본 동성애'를 다룹니다. 현대인들은 동성애를 어떻게 볼까요? 저자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질환 모델', 두 번째는 의학과 생물학의 관점에서 동성애를 살핍니다. 마지막으로 정의에서 다뤘던 '성적 지향'의 문제를 간략하게 다룹니다. 깊이 있는 논의를 하기보다 간략한 살펴보기 정도에서 그치기 때문에 무엇 하나 명확하게 동의하기는 힘들지만,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서론의 역할은 충분해 보입니다. 그럼 그렌츠가 말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직접 들어 봅시다.

-심리학적 관점의 질환 모델

현대 심리학의 아버지인 프로이트는 '동성애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조사하는 영역의 기초'(43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양성애를 지닌 아이가 자라면서 여러 단계를 거쳐 새로운 사랑의 대상과 관계한다고 봅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이성을 사랑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중간 단계에서 '어느 하나에 고착하거나 퇴행할 수도 있다(43쪽)'는 가설을 세웁니다. 퇴행의 일부로서 동성애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프로이트의 가설을 토대로 질환 모델을 만들어내고, '동성애의 본질과 원인'(44쪽)을 탐구하기에 이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성애를 인격 발달의 최종 목적으로 보았고, 동성애는 정상적인 발달 과정이 깨진 '병든 상태(45쪽)'로 보았습니다. 어빙 비버라는 학자는 가족의 관계가 타격을 입을 경우 동성애가 발생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빙 비버의 학설에 더하여 모벌리는 이렇게 결론내립니다.

"남자든 여자든 동성애자들은 동성 부모와의 관계에서 경험했던 어떤 결핍으로 고통을 겪는다. 따라서 이러한 결핍을 동성끼리의 관계 또는 동성애 관계를 통해 채우려는 충동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동성애에 대한 갈망은 곧 동성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발달 지체를 충족하려는 시도다(46쪽)."

역기능 가족이나 불안전한 관계로 동성애가 일어난다고 본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매스터스와 버즈니아 존슨의 경우는 '학습된 행위'나 '학습된 선호'가 동성애를 일으킨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피하는 한 방법으로서 동성애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트립이란 학자는 '사회가 남자다움을 바라보는 시각과 그것에 가치를 매기는 방식(50쪽)'이 동성애를 일으킨다고 보았습니다. 몇 가지 이론이 더 있지만 간략하게 매듭지으면, 심리학적 요인은 정상적인 가정과 사회생활을 영위할 때 이성애자가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심리적 퇴행 현상이 일어나 마음의 질병이 일어나는데, 그 중 일부가 동성애로 발전하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헬무트 틸리케도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부모들이 인격적인 관계를 나누지 못하고 동물과 같은 관계만을 나눈다면 부모는 주도적인 성교육을 시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124쪽). 이것은 앎이 정보의 형태가 아닌 삶의 맥락 속에서 바르게 전달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럼 다음은 생물학적 관점은 어떻게 동성애를 볼까요?

-의학, 생물학적 관점

생물학적 관점은 동성애자들의 몸 자체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동성애는 유전적인가? 아니면 기형적 변형으로 일어난 문제인가?' 등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동성애자들의 유전자, 출생 전후 호르몬 수치, 뇌 구조 분석 등을 시행합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호르몬 영향으로 봅니다. 가령 어린 시절과 중년 이후는 호르몬이 중성화되는 시기로 남자는 여성적, 여성은 남성적으로 각각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호르몬 분비량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동성애도 그러한 영향이 아닌가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자 동성애자는 출생 전 발달 기간에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 감소한 결과 여성화되고, 여성은 반대로 테스토스테론이 과도하게 분비된 것으로 봅니다(53쪽). 뇌 구조를 연구한 학자들은 동성애자들이 정상인에 비해 남성은 여성형에, 여성은 남성형에 가깝다는 연구발표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생물학적 연구는 '요소 사이의 인간관계를 증명하기란 무척 힘든 일(54쪽)'이며, 그것이 결정적인 동성애의 이유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렌츠는 '동성애가 유전과 환경 모두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56쪽)'는 과학자들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성적지향과 동성애의 치료는 가능한가?

보수적 성향의 학자나 기독교인들은 동성애를 죄나 질병의 문제로 보고 정상으로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자였던 어빙 비버는 '우리의 판단으로는 변화를 갈망하는 동성애자는 모두 이성애자로 바뀔 수 있다(57쪽).'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동성애자는 정상이 아닌 질병 내지 죄의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기능 가정에서 일어난 동성애의 경우는 바른 남녀 역할과 가족의 관계를 훈련하면 가능하고, 생물학적 요인은 수술이나 약물을 통해 치료가 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모벌리와 폴 마이어는 '아동기에 충족되지 못했던 결핍에 주목(60쪽)'하고, 멘토들을 통해 아버지의 공백을 채워주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존스와 워크먼의 경우는 '그 성적 지향을 바꾸는 일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61쪽).'고 경고합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동성애를 굳이 치료해야 할 질병이나 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동성애가 질병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동성애는 한 사람이 이성을 사랑하듯 동성도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다양한 애정 표현의 한 방식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그들은 스스로 질환자도 아니며, 특이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녹차를 즐겨 마시고, 누군가는 커피를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폅니다. 돈 클락이라는 학자는 '이성애가 아닌 동성애가 인간의 표준(65쪽)'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렌츠는 여기서 결국 이러한 시도들, 즉 심리학적·역사적·생물학적 연구들은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것이 심리학적 퇴행인지, 아니면 병리학적 질병인지 바르게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는 일반적인 사회적 관점에서 연구하고 정의하는 방법을 내려놓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동성애를 살펴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2장부터 마지막 6장까지는 성경과 교회의 관점에서 동성애 문제를 살펴봅니다. 2-5장은 성경과 신학적 관점에서 동성애를 살피고, 마지막 6장은 실천적 측면에서 교회가 동성애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이야기합니다.

3. 성경 관점으로 본 동성애

2장에서 그렌츠는 성경이 어떻게 동성애를 말하는지 주해 관련 문제를 논의합니다. 가장 먼저 주목한 단어는 '야다'이며, 이것은 남자가 여자를 '알다'는 의미로 성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아담과 하와, 즉 이성 간에 사용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소돔 이야기(창 19:5. 8)에 두 번 언급됩니다. 그 외에도 구약에 약 10 번 정도가 사용됩니다.

이것은 '야다'라는 단어가 전적으로 성적인 단어임을 말해 줍니다. 그렌츠는 베일리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야다라는 단어가 '소돔 사람들이 나그네와 동성 성교를 꾀하고 있었음을 너무나도 분명히 보여주는 것 같다(75쪽).'고 못박습니다.

또 하나, 레위기 18장 22절에서 모세는 남성과 남성 간의 성교를 금지하며,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이 가증한 모든 일을 행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레 18:29).'고 경고합니다. 땅이 그들을 토하고 거부한다는 역겨움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동성애가 정결 단계를 거쳐 다시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복귀할 수 있는 정도의 죄가 아니었으며, '동성애에 관련 형벌이 엄격했다는 사실(87쪽)'을 말해줍니다.

신약에서는 동성애는 어떻게 말할까요? 실제로 신약에서는 동성애에 관련된 본문이 바울서신 외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방인 중에 일어났던 동성애를 비판한 부분인 로마서 1장 26-27절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동성애에 관하여 단호하게 범죄 행위로 규정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 행위로 정의합니다. 이는 구약에서 가나인인들을 땅이 토했던 우상숭배적 행위와 연장선상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바울의 견해가 다르지 않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4장에서는 교회사에 나타난 동성애 문제를 다룹니다. 시대적 상황이 변하기는 했지만, 교회는 여전히 동성애를 부정하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변화가 있다면 초대교회는 동성애를 여러 죄 중에서 한 가지로 보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동성애를 심각한 범죄 행위로 간주되었다는 점입니다.

도드라진 변화는 종교개혁 이후 동성애에 대한 교회는 심각할 정도로 거부했고, 국가 법률로 제정하기에 이릅니다. 그렌츠는 4장에서 동성애와 성경의 권위의 문제를 다루면서, 중요한 한 가지 결론에 이릅니다. 그것은 정의의 관점에서 동성애는 정죄 받아야 마땅하지만, 사랑의 관점에서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한 사람으로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정의로운 사랑'은 분명히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지만, 이 윤리는 궁극적으로 목적론적이다. 결국 윤리적인 삶은 인간 존재를 하나님의 의도와 일치하는 삶을 의미한다(165-166쪽)."

그렌츠는 5장 '동성애과 기독교 성윤리'에서 목적론적 인간에 대한 신학적 관점을 개진합니다. 목적론 관점은 결국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스러움(169쪽)'의 다른 표현입니다. 모든 만물은 만드신 목적을 갖습니다. 즉 목적 없는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목적은 결국 남녀의 창조 목적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남과 여로 창조되었으며, 이것은 창조의 목적인 자녀 출산과 더불어 성적인 결합에 있어서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완전을 향한 이 열망, 즉 선천적인 양상으로 여겨지는 타인과의 결합 욕구를 통해 표출되는 이 열망은 인간 존재의 대인 관계라는 측면을 위해 중요한 기초를 형성한다(172쪽)."

 

▲헬무트 틸리케와 그의 책 <성윤리학>.
(Photo : ) ▲헬무트 틸리케와 그의 책 <성윤리학>.

 

 

헬무트 틸리케 역시 결혼의 문제를 '질서의 신학(165쪽)'으로 돌리며, '창조 질서와 구원 질서는 결혼이라는 상징에 집중되어 만난다(175쪽).'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예수와 바리새인과의 이혼 논쟁(막 19:3, 막 10:2 등)에서 확연하게 보여주듯, 결혼은 창조 질서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며, 그릇된 성행위임이 분명해집니다.

 

그렌츠는 여기서 더 나아가 동성 간 성교를 '결핍 행위'로 간주합니다. 이성 간 성행위는 서로의 결핍을 채우는 완성의 행위입니다. 하지만 동성 간의 성행위는 결핍이 결핍을 채우지 못하는 '실재를 가장하거나 상상력을 동원하여 흉내내는 행위일 뿐(183쪽)'이라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여기서 우정과 남녀 간의 사랑을 언급하며, 우정을 포용적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면, 남녀 간의 '성행위의 의도는 포용성이 아니라 배타성을 기념하는 데 있다(187쪽).'고 바르게 지적합니다.

4. 교회는 동성애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제 마지막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동성애가 성경적으로 잘못되었다면, 교회는 어떻게 동성애를 바라보고 동성애자들을 대해야 하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저자는 마지막 6장에서 이 문제를 목회적 관점에서 제시합니다. 결론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먼저 동성애는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에 거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은 교회가 한 영혼을 대하듯 소중히 대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게이와 레즈비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보며, 우리 역시 그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 당연하다(236쪽)."

헬무트 틸리케조차 '동성애자를 도덕적으로 또는 신학적으로 폄훼할 만한 최소한의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464쪽).'고 결론짓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똑같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으며,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렌츠는 맺는 말에서 '환영하지만 긍정하지 않는 공동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먼저 교회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대하고 '환대'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간음한 여자를 환대했지만 죄는 긍정하지 않은 것처럼(요 8:11), 동성애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진리의 터전입니다. 모든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육하고, 중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목회의 대상입니다. 동성애자 역시 죄인이며, 그들도 성경의 원리에 입각한 삶을 살아가도록 지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근거 없는 혐오나 터부시하는 행위는 사단의 시기에 사로잡혀 영혼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헬무트 틸리케는 교회를 향해 '동성애자가 자신의 동성애적 충동을 승화시킬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일에 진력해야 한다(469쪽)'고 충고합니다.

동성애 문제는 아직 풀어가야 할 숙제가 많은 주제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동성애자들을 바라보고, 성경적 관점에서 그들을 돌본다면 실존적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정현욱 목사(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