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의 논문 '종교개혁의 신학적 원리와 성경의 권위'를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지상강좌]라는 제목으로 연재합니다. 

 

▲김재성 박사
(Photo : ) ▲김재성 박사

 

 

3. 로렌조 발라의 헬라어 성경연구

루터에게 영향을 준 많은 요인들 가운데서 인문주의 성경학자로 로마 가톨릭 신부인 로렌조 발라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루터가 최초로 독일어 성경번역을 시도한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결국 신구약 완역본을 출간해냈다. 그보다 한 세기 앞서서 살았던 로렌조 발라는 정확한 성경본문 이해를 촉구하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비판하여(살후 2:8) 루터에게 확신을 주었으나, 그의 공헌은 충분하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중세 시대의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불가타"(Vulgate)라고 알려진 라틴어 성경을 정경으로 읽어오고 있었는데, 주로 382년 제롬이 번역한 것을 근간해서 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불가타" 성경 속에 그가 번역한 부분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중세 시대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에서 사용하던 불가타 성경은 제롬의 라틴어 번역에다가 누군가 첨가한 것들이 뒤섞여져서 재편집된 것이다. 15세기에 유럽 각 대학에서 인문주의 학자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되자, "불가타"보다 더 나은 성경번역을 염원하는 이들이 등장하였다. 게다가 각기 자신의 모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일반인들도 성경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중세 스콜라주의를 비판하는 종교개혁자들의 담대한 신학적 주장들은 성경 원문의 연구에서 나온 것이다. 실로 중세 말기의 유럽 교회에는 최종 권위가 교황이 아니라 성경말씀으로 뒤바뀌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히 사실적인 것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중세시대 7백 년 동안이나 헬라어나 히브리어 원본을 자유롭게 읽고 해석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서구 유럽에 헬라어 학습이 크게 보급된 것은 1397년부터 1400년 사이에 비잔틴에서 온 크리솔로라스 (Manuel Chrysoloras, 1355-1415)가 피렌체 대학에서 이탈리아인들을 위해서 헬라어 문법책을 편찬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여졌다. "헬라어에 정통한 귀족, 비잔티움의 크리솔로라스가 헬라어 지식을 우리에게 가져왔다."

인문주의 학자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중요한 학자가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6-1457)인데, 15세기에 대학에서 고전어를 연구하는 인문학자들에게 신약 헬라어 성경을 연구할 수 있도록 문법 교재를 편집해 낼 정도로 어학실력이 탁월하였다.

특별히, 로렌조 발라는 라틴어 번역 성경과 각종 교부들의 라틴어 번역이 정당한가를 비판적으로 연구하였다.

 
발라는 1441년 라틴어 문법과 단어를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문법서를 출판했었고, 60판이 나올 정도로 유럽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교과서가 되었다.

제롬의 라틴어 번역본에 담긴 오역들을 헬라어 원본들과 상세히 대조하는 최초의 본문 연구서를 출판했다. 로렌조 발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사용하는 스콜라주의 철학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인간의 이성적 능력으로 축소시켜버리기 때문에 비판을 가했다. 
 
라틴어의 수사학, 헬라어 문법에 정통했던 로렌조 발라는 교부들이 작성한 초대교회 문서들의 진위를 파악하여 조작된 것임을 밝혀내는 기술을 터득하여, 교부들의 이름으로 성행하던 위작들을 제거하였다. 발라는 「콘스탄틴의 헌정서가 거짓됨」 (De falso credita et ementita Constantini Donatione declamatio, 1440)이라는 저술을 통해서 엄청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콘스탄틴 황제가 아시아로 수도를 옮기면서 서구 유럽 전체의 통치권과 여러 가지 특권들을 로마 교황에게 헌정하였다는 문서인데, 과연 그 당시에 이런 문서가 작성되었을까하는 의심이 제기되어 왔었다. 발라는 이 문서에 사용된 용어들은 콘스탄틴 황제 시대에는 사용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혀내어 확실하게 위작이라고 폭로하였다. 당시에 그가 이런 연구서를 펴낸 것은 교황 유진 4세(Eugene IV)가 남부 이탈리아의 왕, 알퐁소 5세(Alfonso V of Aragon, 1396-1458)와의 사이에 나폴리 공국의 통치권을 놓고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속 군주에게 유리한 발라의 연구가 나오자, 로마 교황청에서는 발라를 체포하려고 했다. 결국 알퐁소 왕의 궁전에서 숨어 지내면서 대적자들을 피해야만 했고, 법정에 나가서 이단성 여부를 판단 받아야만 했는데, 주변의 비판자들로 인해서 개인적으로는 힘들고 고난에 찬 삶을 살았다. 발라는 1447년 2월에 교황 유진 4세가 사망할 때까지, 알폰소의 보호 아래 겨우 목숨을 지탱할 수 있었다.

1435년부터 1448년까지 발라가 남부 이탈리아의 왕, 알퐁소 5세의 영지 안에 머물면서 진행한 라틴어 번역 성경과 헬라어 원어 성경에 대한 비교 연구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발라의 신약성경 헬라어 원어 연구는 결과적으로 로마 가톨릭 전체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1443년에 헬라어 원어 성경연구를 마치고 초판본의 원고를 완성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곧바로 출판하는 경우에 이단으로 몰려서 화형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새 교황 니콜라스 5세가 취임하자 로마 교황청은 발라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교황의 부름을 받아 서기관이 되었고, 성경 원문을 대조하는 보완작업을 1453년까지 지속하였다. 최초 헬라어 원어성경 연구서 「신약성경의 대조」(Collatio Novi Testamenti)가 완성되자 첫 번째 교정본을 새 교황 니콜라스 5세에게 헌정하였다.

발라를 교황청 서기관으로 발탁해 줄만큼 학문적 탁월성을 인정하여 주었고 매우 호의적이기 때문이다. 발라는 1453년부터 1457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이 책의 보완작업을 계속했다. 

이탈리아 인문주의 학자로 15세기에 가장 유명했던 문헌 연구자는 마네티(Giannozzo Manetti, 1396-1459)였는데, 교황 니콜라스 5세의 부탁으로 헬라어 원어에서 라틴어 번역본을 다시 수정하였다. 
  
그러나 라틴어 번역을 완성을 하기 전에 교황 니콜라스 5세가 사망하게 되자, 마네티는 원고를 출판을 하지 않았다. 단지 '불가타' 보다 더 나은 새로운 구약 라틴어 번역 성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아마도 마네티는 당대 논쟁의 핵심이었던 로렌조 발라가 헬라어로부터 번역한 라틴어 신약성경과 해석서를 충분히 검토하였을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마네티의 대담한 개혁적인 주장을 받아들이는 인문주의 학자들이 많았다.

휴머니즘 시대의 가장 뛰어난 언어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발라는 스콜라주의 신학에 반기를 들었던 신부로서 철학지식을 겸비한 신학자였다. 로마 가톨릭 종단마다 교황 및 상부 지도자들에게 순종의 서약을 하는 것과 금욕주의에 대해서 발라가 강력하게 비판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대적자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또한 발라는 "사도신경"을 열두 사도들이 직접 작성된 문서가 아니라는 점도 역사적인 고증을 통해서 밝혀냈다. 그러나 후대 종교개혁자들은 그의 저서들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마틴 루터는 로렌조 발라의 글을 읽고서, 매우 존경하게 되었다. 1534년에 올리버 크롬웰은 발라의 책을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케 하였다.

1504년 여름, 에라스무스는 벨지움 루뱅 근처, 파르크 (Parc) 수도원 고문서 보관소에서 로렌조 발라의 헬라어 본문 성경에 대한 주석서를 발견하였다.

발라가 사망한 후, 이 책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발라의 저서들을 통해서 헬라어 원어성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에라스무스가 1505년에 「라틴어 신약성경 해석 주석」 (In Latinam Novi Testamenti Interpretationem Annotationes)를 재출간하였다.

에라스무스가 발라의 신약성경 원문연구서를 다시 출판한 뒤, 원문 성경의 해석에 대한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성경을 문법적으로 접근하는 새로운 방법론들이 제기되는 결정적인 기초가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는 발라의 헬라어 원어성경 연구와 해석에서 영감을 받았고, 또한 발라의 좁은 문법적 해석을 넘어서서 새로운 학문성을 발휘하였다.

베인톤 박사는 발라의 성경해석을 비교한 후에, 단지 문법적인 해석에만 집착하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고 평가하였다.

발라는 라틴어 성경(Vulgate)과 제롬의 번역을 모두 다 제시하면서, 제롬을 공격하기 보다는 오히려 존중하였고, 그래서 사실은 보호하려는 의미에서 라틴어 번역본을 충실하게 수정하려는 뜻을 갖고 있었음을 피력하였다.

루터는 1513년 이후로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강해하던 초창기 교수시절부터 로렌조 발라를 매우 높이 칭송하면서 인용했고, 1518년 4월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도 언급하였다. 또한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을 논박할 때에도 가장 권위있는 근거로 발라의 저서를 인용했었다.

루터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사상가들에 대해 높이 평가를 하면서 자주 인용하였고, 자신과 같이 이들도 완고한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자들이라고 간주하였다.

로렌조 발라가 루터의 성경연구에 매우 중요한 교훈과 영향을 주었지만,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루터의 개혁사상의 상당부분이 로렌조 발라에게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발라는 신플라톤주의에 대해서도 거부하였다. 중세말기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립한 "화채설"을 신봉했었는데, 발라는 전통적인 화채설을 거부하였다.

발라가 중세시대의 스콜라주의 사상을 모두 다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삶에 대한 서약, 독신주의에 대한 서약, 세례를 받을 때에 무조건 침묵으로 순종하겠다는 서약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루터와는 달리, 발라는 여전히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에 해당하는 공로주의를 믿었다. 성경적인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발라는 이탈리아 로마 교황청에서 맞서기도 했고, 스콜라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안목을 가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의 한계 때문에 종교개혁에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매우 중요한 공헌을 남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