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
stats
에디션 선택 통합홈 English 로스앤젤레스 뉴욕 워싱턴DC 애틀랜타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한국기독일보
Christianitydaily.com
2017.10.22 (일)
X
뉴스 기독교 경제 Tech 라이프 오피니언 크리스천 잡스 포토 비디오

노숙자와 사역자, 그리고 선물을 받은 자와 준 자

기독일보 la@christianitydaily.com

입력 Aug 04, 2017 08:59 AM PDT

Print 글자 크기 + -

기사 보내기 Facebook Twitter

[키에르케고어의 선물 (25)] 선물을 받는 자의 의무

 

▲이창우 목사.
(Photo : ) ▲이창우 목사.

 

 

지난 시간에 선물을 주고 "숨는 것"은 주는 자의 의무이고, "찾는 것"은 받은 자의 의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시간 선물을 받는 자가 어떤 노력으로 준 자를 찾아야 하는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Like Us on Facebook

이번에 나눌 이야기는 아마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주는 자나 받는 자 중에서 "싸가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전에 사역했던 교회에는 노숙자들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노숙자들에게 크진 않았지만 때로는 음식으로, 때로는 현금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도와주고도 노숙자들에게 욕을 얻어먹는 겁니다. 노숙자들은 도움을 받고도 화를 내면서 나갑니다.

"겨우 천 원이 뭐야!"

이 분들은 도움을 받고도 언제나 불평을 했습니다. 이 분들은 우리 교회에만 오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다른 도움을 주는 교회들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브라질에서 온 불법체류자 청년은 잘 데가 없다고 하니, 교회에서 재워준 적도 있습니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와서 돈을 달라고 하더군요. 그때는 제가 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말도 안 통하지만 영어로 더듬더듬 말했죠.

"야, 너 교회는 1달러를 주는 곳이 아니야!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곳이라고! 1달러에 네 영혼을 팔지 말라고! 1달러를 얻으려 하지 말고 영혼을 얻으라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런 노숙자, 이런 브라질 청년이 오늘날 많이 있다는 사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아도 당연한 것처럼 여깁니다.

이런 류의 대표적인 사람이 있다면, 바로 사역자입니다. '노숙자 같은 사역자'라고 말하면 굉장히 도발적인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사실 틀린 말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후원을 받으면서도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 부분에 있어서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저도 누군가의 후원으로 산 적이 있고요, 심지어는 온갖 반찬과 음식 등으로 제공받은 적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노숙자가 열 받을 만하지요. 왜냐하면 저 같은 사역자는 충분히 살 수 있을 만큼은 아니어도, 교회로부터 '단돈 천 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생활할 만한 사례를 받았으니까요. 노숙자처럼 교회로부터 제공받은 것 아닙니까!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화가 나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주는 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면서 얼마나 거드름 피우는 분들이 계십니까! 부잣집 대문에 누워 있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관계와 같지요. 빵부스러기를 주고도 부자는 거드름을 피웁니다. 거지 나사로는 빵 부스러기를 먹고 감사의 말을 남기고 싶었지요. 그러나 감사의 말이 부자의 발걸음을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감사의 말이 부자에게 들렸다 칩시다. 아마 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뭐, 이런 빵부스러기 갖고 감사야. 아무 것도 아닌 걸. 그냥 잘 먹고 아프지 말어, 응?"

뭘 의미합니까? 이것은 거지의 감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거지의 감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입증했지요. 오늘날, 이런 신세의 노숙자, 이런 신세의 사역자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거지 나사로는 빵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하니,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았죠. 마치 거지 나사로처럼 노숙자는, 사역자는 빵 부스러기로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삶으로 증명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개처럼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노숙자 같은 사역자"가 툭 던져진 선물을 받아야 할 때,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이 "빵 부스러기"같은 선물 없이는 살 수가 없지요. 얼마나 비참합니까! 게다가, 선물을 준 은인은 사라졌지요. 이것은 그가 숨기 위해 서둘러 간 것이 아닙니다. 예, 은인은 노숙자 같은 사역자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요, 그냥 자신의 일이 너무 바빠서 서둘러 사라진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이런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날 것입니다. 이것은 선물을 주고받을 때,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숨바꼭질'을 제대로 못한 결과입니다. 어떻게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먼저 거지 나사로 같은 당신에게 권면합니다. 온갖 좋고 완선한 선물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온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부자가 빵 부스러기를 던져 줄 때, 그래서 감사의 말을 하기도 전에 부자가 사라져 버렸을 때,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권력자는 낮은 자의 섬김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낮은 자는 권력자의 섬김을 받고 있는 겁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당신이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 당신은 부자를 당신을 돕고 있는 도구로 이용한 거니까요.

노숙자 같은 당신께 권면합니다. 받은 자의 의무를 위해 최선을 다하십시오. 곧, 은인을 찾아 떠나십시오. 은인을 찾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찾으시고, 은인께 감사하십시오. 이것을 게을리한다면, 감사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것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로암의 소경을 찬양합니다(요한복음 9장 참조). 왜냐하면 그가 평생 소경으로 살다가 앞을 보았을 때, 은인을 찾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세상의 심판이 두려워 은인을 세 번이나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했지만, 이 소경은 세상의 심판으로 인해 은인을 거부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소경의 부모도 세상의 심판이 두려워 은인을 찾는 일에 동참하지 못했지요(요 9:22).

우리는 이 소경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권력자의 손에서 도구로 봉사하면서도, 사람의 영광을 받기보다 차라리 멸시를 받으면서 은인의 옆에 남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준 자가 우리와 같은 죄인이고, 그분이 사라지지 않고 현장에 남아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소경은 자신의 눈을 뜨게 한 은인에게 감사했을 것이고, 둘 사이는 뗄 수 없는 우정으로 묶였을 것입니다. 아마 바리새인들에게 경멸을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는 가까워졌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찾는 데 하나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처음 아름답게 시작했던 것을 망친 것은 아닌지요?

요한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소경의 경배를 받습니다(요 9:38). 그렇다면, 주님은 그분의 선한 행위로 인해 경배를 받는 것일까요? 그의 믿음으로 인해 경배를 받은 것일까요?

주님은 선한 행위로 경배를 받은 것이 아니고, 믿음 안에서의 경배를 받는 겁니다. 인간은 조금이라도 선행을 베풀고 나면 우쭐해집니다. 선한 행위를 하고 나면 언제나 감사와 존경을 받고 싶어 하죠. 그리고 감사와 존경으로 돌려받는 것은 보상이 아니라고 착각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어떤 선한 행위로도 보상을 받지 않았습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소경이 눈을 뜨게 할 때,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지요. 그는 명령대로 실행하여 앞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은인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선행을 거저 베풀고도 자신을 숨기는 방법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소경은 은인을 찾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 앞을 보게 된 자가 누가 은인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는 처음 눈을 떴지요!

어떻습니까? 주님은 조금이라도 선행을 베푼다면 우쭐대면서 거드름을 피우던 우리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이 소경은 아무리 도움을 받아도 당연한 듯 생각하며 감사하기보다 화를 냈던 노숙자 같은 우리 신세보다 낫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사역자가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른 것은 아닌지요? 언제까지 거지 나사로처럼, 언제까지 노숙자 같은 사역자로 남아 있을 것인지요? 아니, 언제까지 사역자가 아니라고 거부할 것인지요? 주님과 소경과의 관계가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이 아름다운 나눔에 동참하지 않겠습니까?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

 

 

© 2016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의견 나누기

에덴스 유일 예배당 소유한 에덴스한인교회, 건물 뺏길 위험

연말을 훈훈하게 할 사랑의 천사포 캠페인 시작

감격이 없는 삶?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

원로목사들 모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

"하나님 나라, 경건과 선교의 정체성에서 시작"

아틀란타벧엘교회 창립 2주년 기념예배

[이주섭 목사의 특별기고]TheBibleLand 에돔자손의 신 코스; Qos, god from Edom

내달 3일, 밀알선교센터 구입 위한 가수 박완규 초청 '밀알의 밤' 열린다

담임목사 나라와 교회 방문한 백인 성도들...'신앙적 열정과 따뜻한 환대 잊을 수 없어'

선교지에서 40일만에 남편 잃었지만, 그럼에도 가야 하는 이 길

기독일보

621 S. Virgil Ave. Suite 260, LA, CA 90005 / Tel. 213) 739-0403, Fax. 213) 402-5136, E-mail:chdailyla@gmail.com
회사소개 | Copyright © Chdaily.com. All rights reserved.
기독일보의 모든 콘텐츠(기사) 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 등을 금합니다.

Real Time Analytics
Web Analy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