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 교수
(Photo : ) ▲이영진 교수

지난 회에 '기독교 좌파는 어떻게 한국교회를 집어삼킬 수 있었나'에 관해 언급했다. 이번 회에는 예고한 대로 '기독교 좌파는 누구인가? 그들은 어떤 자들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아무래도 본 글이 이른바 기독교 좌파에 대한 반제(anti-thesis)를 띠다보니, '그렇다면 이 글은 우파적 글인가? 또한 이 글에 반하는 감성이 들면 좌파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테지만, 그런 반응만을 기독교 좌파로 특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이 글들 역시 오른편에 위치했어야 하는데, 좌·우는 다 상대적 개념 아니겠는가. (익히 알다시피 프랑스 혁명 당시 국민공회의 좌석 기준, 의장석 좌편에 자코뱅당이 앉았던 것에서 '좌파'라는 명칭이 유래하였다.)

마찬가지로 흔히 '종북', '친북', '친동성애', 이와 같은 요건들은 본질적 종교 좌파를 표지하기에는 추상적인 술어들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존하는 종교 좌파, 특히 기독교 좌파는 철학적 신학으로 추인해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역사적 기독교 좌파는 북쪽에서 왔다거나, 북쪽과 친하다거나, 아니면 왼편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 아니라, 상황에 철학을 입혀 신학적 명제를 오염시키는 과정에서 생겨난 파당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 좌파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 이번에는 19세기 종교 좌파의 형성 과정으로 들려드릴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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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삶을 살아가다가 어려움에 봉착하거나 고질적인 침륜에 빠지면, 대개 '나라는 존재는 왜 이럴까?',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하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때 인식된 '나'라는 존재를 저 영원한 본향 세계에서 온 존재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와 철학의 오랜 공통 가치관이었다. 특히 철학에서는 이를 관념이라고 정의했다.

문제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 관념 세계와 현실 세계를 좁힐 수 없다는 사실에 있었다. 철학과 사조의 유행이 바뀔 때마다 설명의 방식만 달랐지, 고대하고 고대하는 그 천상·관념의 세계는 결코 실재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가혹한 가르침을 깨고, 그 관념을 우리의 실재하는 삶의 시간으로 끌어내린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헤겔이었다.

헤겔은 저와 같은 관념 속의 유토피아나 삭막하기 그지없는 당대의 기계론적 과학의 이질성 속에서 질식할 것만 같은 인간들에게, 자연에 담긴 목적의 의미를 되찾아주고자 했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은 주인의 지위에 올라타 있는 우리 자신의 절대 정신과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노예로서의 (자)의식 때문인데, 이와 같은 모순은 우리 거시적 삶의 역사의 한 부분이며, 언젠가는 합(合)을 이룬다는 희망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헤겔은 이와 같은 역동적 구조를 남편과 아내의 결혼관계, 선생과 학생의 사제관계, 부모와 자녀,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 목회자와 평신도,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적용했다.

가령 하나님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창조주이지만, 또한 자유롭고 독립적인 타자를 자신의 것으로 내재하고 있을 때에만 하나님일 수 있다(주인이기 때문에). 반면 인간은 오로지 타락의 상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갇힌 존재다(노예[종]이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을 통해 하나님의 풍성함이 비로소 현실화된다는 모순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이 가혹한 모순 관계는 하나님과 분리된 유한 세계가 풍성하고 다양한 실현을 통해서 최종 단계에 가서는 화해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 역시 이 같은 무한의 절대자 하나님과 유한의 하나님의 아들의 화해 속의 합(合)으로 설명됐다.

그러면서 헤겔은 세속의 역사 자체도 군주 한 사람만 자유로운 단계에서(군주정) 소수의 사람들이 자유로워지는 단계로(공화정),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자유로워지는 단계로(민주정) 설명해 나갔다. 참고로 헤겔은 1770년생으로, 그가 19세이던 해에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 아마도 자기 시대를 완성된 합의 시대로 본 모양이다.

이 같은 낙관적인 합의 사상은 헤겔이 사망한 후에도 청년들에게 자극을 주어, 헤겔학파(Hegelianer)라 불리며 지속되었다. 헤겔이 이미 신학자이기도 했지만, 사후에 신학도들이 주도하는 모임이 됐다.

이때 이 모임에서 반기를 드는 분열이 일어났다. 하나님과 모든 인간의 화해 과정에 있어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결코 그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사건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 모든 인간들과는 다른 하나의 (개별) 사건일 뿐이라는 교묘한 견해가 일어난 것이다. 이 주장을 일으킨 사람은 슈트라우스(D. F. Strauss, 1808-1874)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 <비평적으로 검증한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 1835-1836)>라는 책에서, 복음서의 초자연적 기록은 2세기 저자들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대중적 기대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무심코 신화적인 형태로 창작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와 같은 변형된 이해를 추종하는 자들과 더불어 청년헤겔파(Junghegelianer)라고 분리지어 나갔고, 스스로 헤겔 좌파(Linkshegelianer)라는 명칭을 자처한 것이다.

이 계열에서 또 한 흐름이 생겨났다. 역사란 절대자가 '타자' 안에서 자신을 구현해 가는 과정이라고 했던(위 5항 참조) 헤겔의 우주관을 거부하고, 종교는 더 이상 이러한 철학적 진리에 대한 감성적 형식의 재현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본성의 여러 속성들을 하나의 초월적인 상상적 존재(신)에게 투여한 결과의 조직이라고 천명하기에 이른다.

이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형상대로 하나님을 창조했다"는 유명한 말을 했던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다.

끝으로 이 모임에는 또 한 명의 열성적인 청년이 있었다. 그는 앞선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파에 반기를 들었는데, 국가의 기원은 '위로부터'가 아니라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발전되는 것이라고 했다. 말은 맞는 말인데, 그러면서 그는 여기서 발생하는 소외자들의 소외란 헤겔이 말한 절대정신이 이 땅의 자연세계와 운동하는 변증법적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엾은 인간들이 자신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 생산물로부터 분리(소외)됨으로써 야기되는 것이라고 거꾸로 설명해서 충동했다.

루이비통 가방을 만들기는 하지만, 그 루이비통 가방을 메고 다닐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명제를 철학과 사유에 그치지 않고, 거대한 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그는 다름 아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천명했던 칼 마르크스였다.

이와 같은 제 과정에서 살폈다시피, 현대적 의미의 좌파란 사실상 그 자체가 기독교 좌파에서 비롯된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과거에 우리 '정신' 자신이라고 믿고 있던 그 모든 부분을 거꾸로 뒤집고, 수정하고, 급기야 제거하려는 그 모든 종교활동을 '종교 좌파' 혹은 '기독교 좌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율법과 복음이라는 전통적 술어를 복음과 상황이라는 변형된 술어 속에서 모색한다든지, 대홍수에는 결코 새로운 물이 없는데도 물결이 새롭다고 선전한다든지.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사제 관계, 부모 자녀 관계,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 심지어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까지 뒤흔들어 놓는 것이다.

그 외의 친북이니 친동성애니 따위들은, 이 좌경향의 종교활동에 따라 끓어오르는 부유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좌파에 대한 정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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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독교 좌파는 공교롭게도 이단과의 유사성이 있어 그 특징을 몇 가지 정리하고자 한다.

1. 기존의 교회 전통이 잘못되었다고 역설한다.

2. 그리하여 스스로 기존 전통교회로부터의 비난에 직면한다. 바로 이것을 성장동력으로 활용한다.

3. 그러고 나면 두 가지 극단의 결과를 맞는데, 하나는 전통으로부터 더욱 고립당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내적 결속이 더욱 두터워지면서 양적 배가가 일어나되, 배가의 가속도가 일어나는 현상이다.

4. 이는 이단의 성장 원리와도 같다. 신천지 같은 명시적 이단 외에도 지난해 예장 통합 사면 취소 사태를 불러온 부류들도 다 이런 동력을 구사한다.

5. 우리가 생각했을 때, '아니 저들이 주장하는 저것이 대체 뭐라고... 저리도 뜻을 굽히지 않지? 그냥 포기하고 차라리 전통적 가치를 따르면 광명을 찾을텐데?' 싶지만, 그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바로 그것이 자신을 지탱해주는 정체성이자 동력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무장해제를 해 버리고 나면, 자기들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이기도 하다.

6. 기독교 좌파는 이러한 전거와 도식에 의거해 대략 다음과 같은 한국교회의 상식에 도전했고, 그리고 어느 정도 파괴하는데 성공을 거둔 실정이다.

1) 목사직은 그릇된 제도다(바울도 평신도였다는 식).
2) 십일조는 그릇된 제도다(그러느니 좌파 정당 후원하라).
3) 주일성수도 근거 없는 제도다(안식일은 구약이라는 식).
4) 새벽기도는 한국 샤머니즘에서 유래한 미신이다.
5) 교회 '안 나가'는 것은 타당한 현상이며, 차라리 '가나안' 성도 되자!

지극히 상식적이었던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실천 원리들을 전통 교회들의 핸디캡으로 꼽히는 세습, 금전, 섹스 스캔들과 함께 묶은 뒤에, 교회와 함께 해체시키려는 시도다. 한 마디로 젊은이들의 뇌리에 인셉션(Inception)을 시킨 셈이다.

7. 한국교회의 진정한 갱신은 기독교 좌파식 갱신이 아니라, 도리어 저와 같은 '인셉션'의 핀들을 하나씩 뽑아내는 것이 관건이라 할 것이다.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이다. 그는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매우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해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신학자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