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嫌惡)의 사전적 의미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교회용어사전을 보면 혐오(detestation)는 '역겹고 구역질 날 정도로 미워하다'는 뜻으로, 주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우상에 대해 '가증하다'는 뉘앙스로 성경 속에서 사용됐다.

퀴어축제 조직위원회 측과 동성애자들은 퀴어축제의 서울광장 사용과 동성애 합법화 또는 동성결혼 합법화를 반대하는 시민들에게 '전가의 보도(傳家의 寶刀)'처럼 '혐오'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 여기에 부화뇌동해 함께 비난하는 일부 기독교인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야말로 '혐오' 행동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먼저 동성애를 찬성하고 옹호할 권리가 있듯, 동성애에 반대할 권리도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헌법은 국민들에게 언론의 자유, 그리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반대한다 해서 '혐오세력'으로 몰아붙이는 것 자체가 이미 이러한 헌법상 자유를 침해한 것이고, 이들을 혐오하는 행위이다.

현재 동성애자들이 법률상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군 내에서 법률로 동성애가 금지돼 있지만, 근무 시간 영내에서는 당연히 이성애 행위도 금지돼 있다. 동성애자들이 취업 등에서 좀 더 조건이 붙을 수는 있다. 보건·식품 등 관련 업종의 경우 에이즈(AIDS)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쉽게 옮기는 병은 아니지만, 동성애자들에게 에이즈 발병률이 높은 것은 의학·통계학상 팩트(fact)이다.

퀴어축제의 서울광장 사용을 반대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동성애자들과 친동성애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통행하는 공공장소인 서울광장 한복판에서 반라(半裸) 차림으로 활보하거나 음란 행동을 일삼고, 각종 '19금' 성(性) 관련 도구들이 부스에서 전시·판매되며, 공공장소에서 금지된 술·담배 등을 이용하는 행태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퀴어축제 조직위 측과 동성애자들은 이러한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에 대해 '이날 하루라도 사회로부터 억압된 자신들이 해방감을 느끼기 위함'이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도리어 묻고 싶다. 퀴어축제 개최일을 제외한 1년 364일 동안, 은밀한 곳에서 행하는 자신들의 동성애 행위나 생각들을 대체 누가 가로막고 있는지 말이다. 더구나 공공장소에서의 애정(?)행각은, 이성애자들에게도 당연히 허락돼 있지 않다.

한 마디로 퀴어축제의 서울광장 사용 반대운동은, '공공질서를 지키자'는 호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구나 퀴어축제 일부 행위들은 이미 지난해 행사에서 공연음란죄로 지목받았고, 서울광장을 관리하는 서울시 관련 조례에 따르면 이러한 행위들을 이유로 광장 사용을 정지할 수 있다. 3년째 이를 허가한 주무관청인 서울시도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반대는 혐오가 아니다. 동성애에 반대하지만, '혐오'라는 단어 때문에 위축되고 침묵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람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정죄의 마음이 아닌 사랑의 마음으로 동성애에 반대하고, 동성애자들의 손을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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