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가는 글로 사랑받고 있는 손성찬 목사(람원교회)가 '사역자 사례비'와 관련한 글을 11일 자신의 SNS에 남겼다.

'지금까지 몸담은 교회와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임을 전제한 손 목사는 "돈 얘기하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선하고 고상한 가치를 지향하는 인생이라도 배고픔 앞에 주저하며, 헐벗음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여전히 자신이 사람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니까"라며 "돈만 얘기하는게 나쁘지, 돈 얘기하는게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교회 사역자가 돈 얘기하면 삯군을 떠올리며 부정적으로 보는 기류가 있다. 교인들도, 사역자 자신들마저 그렇게 생각하곤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이 시간에도 사명이라는 대의 아래 경제적 어려움에 몸부림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며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든다. '삯이나 제대로 주면서 삯군 운운하소' 혹은 '자기 삯이나 제대로 받으면서 삯군 타령하소'"라고 했다.

손성찬 목사는 "물론 복음서를 읽다 보면 소유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기 십상이나, 예수께서 소유 문제로 호통치셨던 것은 잘못된 신앙전통을 강조하고 심지어 경제적 헤게모니까지 쥔 채 군림하던 종교 기득권층이었지 하루 벌어 하루먹고 살던 갈릴리의 양민들이 아니었다"며 "가룟 유다가 제자단의 전대(錢帶)를 맡았다는, 즉 회계를 보았다는 기록(요 13:29)을 보아도, 파송기간이 아닌 때에는 일상적인 돈의 입출입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손 목사는 "그렇다면 교회 사역자들은 도대체 얼마를 받으면 될까"라며 "구체적 금액을 추산해달라는 질문은 아니다. 이 위대한 복선을 놓치셨으면 섭섭하다. 이 문제는 사실 우리네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교회로 들어온 것이라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우리네 경제구조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고용 불안정성', 특히 비정규직 문제이고, 또한 노동의 가치, 즉 최저시급 문제도 걸려 있다. 또한 갑을관계의 비정상적 계약과, 계약 불이행 아니겠느냐"며 "단지 금액이나, 문구 문제가 아닌, 사람의 존엄과 인생이 관련된 문제"라고 했다.

손 목사는 "교회 현장도 결국 사회의 경제구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독히 성(聖)과 속(俗)으로 나뉜 문화 속에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지독히 일상적인 문제이나 세속적 냄새가 가득하다고 느껴 일부러 얘기하지 않고, 얘기하지 못한다. 쩐(錢)이나 성(性) 문제가 그러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그런데 이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을 쉬쉬 하다 보면 당연히 더 큰 문제가 터진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야 하고, 반드시 다루어야 한다"며 "그런데 그러지 못하다보니, 은혜라는 명목 아래 얼마나 많은 착취가 있는지 모른다. 일명 '은혜인턴'"이라고 지적했다.

또 "으레 돈 얘기 안 묻고 사역을 시작하다 보니, 참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구라와 사기'가 넘쳐난다"며 "그리고 최소한의 퇴직 권고 기간도 없이 수틀린다고 바로 책상 빼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어쩌면 사회보다 더 구리다"고 했다.

손성찬 목사는 "제발 불러놓고 뒷통수 치지 말자. 할매들 표현대로 죄 받는다. 사실 그런 경제적 안정성을 위해 '국가'가 있는 것처럼 '교단'이 있는건데, 책임져 주지 않는다"며 "오히려 지역별. 규모별. 교단별, 무엇보다 자리별로 양극화가 가장 심한 직종이 바로 교회 사역자들이고, 반대로 개인기로 어떻게든 부흥시키면 금전적 보상을 당연시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손 목사는 "누군가는 이중직과 자비량 얘기를 꺼내는데, 긍정적이나 이 모델을 절대화 할 수는 없어 보인다. 우선 성경이 절대화하지 않는다"며 "물론 이러한 논의 이전에 '조직' 개념의 교회 형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지만, 아직 전환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인의 희생만 강요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 모두 독일이나 북유럽, 즉 완전 고용과 차별철폐, 동시에 고용의 유연화가 함께 자리잡은 곳에서 살고 싶겠지만, 여기는 엄연한 2017년의 한국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윤리로 몰고 가지 말고 구조의 문제를 늘 병행해서 고민해야 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며 "중요한 것은 함께 고민해야 하는 문제라는 점이고, 교회사역의 패러다임 전환, 그리고 개개인 사역자들의 소명 회복, 나아가 공동체 내의 서로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모두 병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논의는 얼마든지 더 재미지게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지금도 기본 생계유지조차 어려워 힘들어하는 이와 그 가정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부패한 이들과는 담대히 맞서되, 그 경우를 일반화하여 모두를 폄하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것도 죄 받는다. 얼마남지 않은 가오도 무너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목사가 성도의 경제형편이 어떤지 모른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주변 청년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외면하지 말자"며 "수고한다 말만 하지 말고, 가능하면 용돈이라도 좀 찔러 주자. 결론은 우리 인간미 좀 회복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다음은 글 전문.

얼마면 돼 사례비
▲손성찬 목사의 글에 함께 게시된 사진. '얼마면 돼?'

얼마를 받으면 될까요?
# 최근의 '사역자 사례' 논의를 바라보며... 좀 깁니다. 
# 지금까지 몸 담은 교회와 전혀 관계 없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교회 사역자로서 살다보면 가끔 부러운 인생들이 눈에 띕니다. 설교 잘하는 친구? 사역 잘하는 친구? 아니요. 돈 많은 친구입니다. 마음에 여유가 있더군요. 유학 자리에도 선뜻 나서기도 하고, 지속성도 있습니다. 즉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 부럽습니다. 결국 인생 성공뿐 아니라, 목회 성공을 위한 최고의 조건 역시, '아버지 잘 만나야 한다'로 통하지요. 아니, 요즘 트렌드는 좀 바뀐 것 같더군요. 전문직 여성들과 결혼하여 새사람 되어 나타난 친구들 보면 참 많은 생각이 듭니다. (장모님! 저는 결혼 정말 잘했습니다ㅎㅎ)

비아냥 거림은 아닙니다. 의도적 세팅이 아니라면, 그 여유로 얻은 결과물을 더 잘 나누면 됩니다. 그리고 돈 얘기하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선하고 고상한 가치를 지향하는 인생이라도, 배고픔 앞에 주저하며, 헐벗음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여전히 자신이 사람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니까요. 조선시대 얼마나 많은 선비들이 정작 가족들은 굶어죽게 만들면서, 자신의 지조와 고상함을 만방에 떨쳤는지요. 돈만 얘기하는게 나쁘지, 돈 얘기하는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 사역자가 돈 얘기하면 삯군을 떠올리며 부정적으로 보는 기류가 있습니다. 교인들도, 사역자 자신들마저 그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도 사명이라는 대의 아래 경제적 어려움에 몸부림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창조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애는 또 겁나게 낳네요ㅎㅎ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듭니다. '삯이나 제대로 주면서 삯군 운운하소', 혹은 '자기 삯이나 제대로 받으면서 삯군 타령하소'.

포로귀환기를 그리는 에스라서. 학사 에스라는 페르시아 땅의 유대유민들 중에 귀환자들을 모으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감동'으로 많은 이들이 모입니다. 그런데 재미난 장면이 등장합니다. '내가 무리를...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에스라 8:15)'. 정말 많이들 모였는데, 하나님의 감동이 초탄실패한 인생들이 있으니, 웃기게도 '레위인'입니다. 복귀 후 핵심사역인 성전운영을 이루려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레위인은 반드시 있어야 했는데, 정작 이들만 '하나님의 감동'을 전혀 안받습니다. 하나님 가오가 이리 무너집니다.

물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 속에 재차 권유하여, 38명의 레위인을 얻을 수 있었지만 씁쓸하지요. 왜 하나님의 감동조차 안 먹히고, 이런 헛발질이 생깁니까? 가 봤자 개고생할 것이 뻔하니까요. 과거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율법대로 레위인이 성전운영에 매진할 수 있도록 경제적 책임을 짊어져야할 나머지 족속들의 입을 싹 닫았던 역사가 자기 조상들을 어찌 피폐하게 했는지 다 압니다.

그렇다면 각자도생해야 하는데, 페르시아의 삶이 최소한 거기보다는 낫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 문제는 늘 반복되나 봅니다. 신뢰가 깨진게 우선이지요.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를 너무 쉬이 신앙의 이름으로 강제할 것이 아닙니다. 고상한 중세 수도원 영성을 책임졌던 것은 정당한 노동영성도 있었지만, 그 이면에 수도원 유지를 받쳐주던 큰 손 후원자들의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복음서를 읽다보면 소유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소유 문제로 호통치셨던 것은 잘못된 신앙전통을 강조하며, 심지어 경제적 헤게모니까지 쥔 채로 군림하던 종교 기득권층이었지, 하루벌어 하루먹고 살던 갈릴리의 양민들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가룟 유다가 제자단의 전대(錢帶)를 맡았다는, 즉 회계를 보았다는 기록(요한복음 13:29)을 보아도, 파송기간이 아닌 때에는 일상적인 돈의 입출입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사역자들은 도대체 얼마를 받으면 될까요?

구체적 금액을 추산해 달라는 질문은 아닙니다. 이 위대한 복선을 놓치셨으면 섭섭합니다. 이 문제는 사실 우리네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교회로 들어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네 경제구조에 있어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고용 불안정성'. 특히 비정규직 문제이지요. 또한 노동의 가치, 즉 최저시급문제도 걸려있습니다. 또한 갑을관계의 비정상적 계약과, 계약 불이행 아니겠습니까? 단지 금액이나, 문구 문제가 아닌, 사람의 존엄과 인생이 관련된 문제입니다.

요즘 청년들을 향해 '꿈이 없다, 예전같은 기개와 도전정신이 없다'라며 폄하하기도 하지요. 이런 분들은 풀밭으로 보내드려야 합니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한번 들어 보시라고요. 아니요. 예전보다 더 열심히 삽니다. 이기적으로 보이지만, 예전처럼 전체주의적이지 않을 뿐이고, 제가 아는 한 오히려 예전보다 윤리의식이나, 정의와 공의에 대한 욕구도 더 강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더 우울감만 늘지요. 정규직 전환 안될까봐, 짤리면 갈 곳 없다는 두려움에 침묵하는 것 뿐입니다. 게다가 그 안에서도 빈부차이가 크다보니 새가슴이 되고, 두려워하며, 우울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먹기 위해서만 사는 존재는 아니지 않습니까? 뭔가 딴 생각을 조금 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피 한방울 안 섞였는데 가족 같은 기업이라고 워딩은 하면서, 가족을 그렇게도 조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세태, 국민을 그렇게도 내버려 둘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세태 속에 누가 마음의 안정을 가지고 미래를 그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성공하려면 아버지를 잘 만나야 한다는 수저계급론이 횡행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청년들은 얼마를 받으면 될까요? 그리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최저시급은 얼마를 받으면 될까요?

다시 교회 현장으로 돌아와 봅니다. 결국 사회의 경제구조를 교회가 그대로 답습합니다. 그런데도 지독히 성(聖)과 속(俗)으로 나뉜 이 문화 속에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독히 일상적인 문제이나, 세속적인 냄새가 가득하다고 느껴, 일부러 얘기하지 않고, 얘기하지 못합니다. 쩐(錢)이나 성(性)문제가 그러하지요. 그런데 이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을 쉬쉬하다보면 당연히 더 큰 문제가 터집니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야하고, 반드시 다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다 보니, 은혜라는 명목아래 얼마나 많은 착취가 있는지 모릅니다. 일명 '은혜인턴'입니다. 또한 으레 돈 얘기 안 묻고 사역을 시작하다보니, 참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구라와 사기가 넘쳐납니다. 그리고 최소한의 퇴직권고 기간도 없이 수틀린다고 바로 책상빼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어쩌면 사회보다 더 구립니다. 제발 불러놓고 뒷통수 치지 마십시요. 할매들 표현대로 죄 받습니다. 사실 그런 경제적 안정성을 위해 '국가'가 있는 것처럼, '교단'이 있는건데 책임 안 져줍니다. 오히려 지역별. 규모별. 교단별, 무엇보다 자리별로 양극화가 가장 심한 직종이 바로 교회 사역자들이지요. 반대로 개인기로 어떻게든 부흥시키면 금전적 보상을 당연시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누군가는 이중직과 자비량 얘기를 꺼냅니다. 긍정적이나, 이 모델을 절대화 할 수는 없어보입니다. 우선 성경이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민족종교 모델을 현대교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것처럼, 복음의 전파기와 안정기에 구현되는 모델이 다릅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성향도 다릅니다. 물론 이러한 논의 이전에 '조직' 개념의 교회형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지만, 아직 전환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인의 희생만 강요하는 것도 일종의 폭력일 수 있지요.

우리 모두 독일이나 북유럽, 즉 완전고용과 차별철폐, 동시에 고용의 유연화가 함께 자리잡은 곳에서 살고싶지요. 그러나 여기는 엄연한 2017년의 한국입니다. 마찬가지로한 개인의 윤리로 몰고 가지 말고, 구조의 문제를 늘 병행해서 고민해야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고민해야만 하는 문제라는 점이지요. 그리고 교회사역의 패러다임 전환, 그리고 개개인의 사역자들의 소명의 회복, 나아가 공동체 내의 서로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모두 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논의는 얼마든지 더 재미지게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도 기본생계유지조차 어려워 힘들어하는 이와 그 가정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부패한 이들과는 담대히 맞서되, 그 경우를 일반화하여 모두를 폄하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그것도 죄받습니다. 얼마남지 않은 가오도 무너지거든요. 목사가 성도의 경제형편이 어떤지 모른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 주변 청년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외면하지 마십시요. 수고한다 말만하지 말고, 가능하면 용돈이라도 좀 찔러주세요. 결론은 우리 인간미 좀 회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