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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는 까뮈의 이방인, 그리고 살리는 하나님의 자녀들

기독일보

입력 Jul 09, 2017 06:16 P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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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북뉴스 칼럼] 죽음이란 무엇인가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알베르트 까뮈의 대표적 소설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방인>입니다.

그 소설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부모님이 죽어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단지 장례식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먹고, 자고, 섹스하고, 휴양을 즐기는 본능적이고 감각적 자극에 대해서만 반응할 뿐, 그 본능적 충동들을 스스로 통제해야 한다는 인간의 당위성에 대한 의식과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결국 그는 태양볕이 너무 뜨겁다는 이유만으로 충동적으로 아랍인을 살인했지만, 정작 살인의 죄책감보다는 자신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자로서 스스로 자신이 무도덕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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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뮈는 이방인을 통해 이 시대의 현실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문학인, 정치사상가, 모럴리스트로서 까뮈는 당시의 사회와 정치와 제도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서인지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은지 3년 만에 교통사고로 죽었지만, 그가 추구하던 정의에 대한 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까뮈의 생물학적 육신은 죽였을지는 몰라도, 까뮈의 정신은 죽일 수 없었습니다.

살인 의미의 규정

16세기에 '군인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간단치 않은 이 질문에 대해 루터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즉 많은 성경해석자들은 살인이라는 정의를 '승인받지 못한 즉흥적인 살인, 무지한 살인'을 살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여호수아 6장 10절을 주석하면서 "정당한 전쟁은 악을 시정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말로, 전쟁을 통한 살인에 부분적으로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의 신학대전에서 "종종 전쟁이 평화를 조성하는 좋은 길일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칼뱅 또한 "불의한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처형이요 심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현대 이전의 신학자들 대부분은 정당한 전쟁(살인)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로 들어서면서 신학계는 전쟁에 대해 많은 반대를 주장하게 됩니다. 독일 신학자 하인츠 차른트는 "합법적인 전쟁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합법적인 무력'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경우에서든 그런 일에 참여하는 자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오늘날 낙태, 안락사, 사형제도 등의 부분에서 중요한 윤리적 이슈들이 담겨 있는 내용들입니다. 나아가 현재 우리 한국 실정에서 볼 때, 북한에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에게 원조를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김정은 정권의 붕괴를 위해 계속 압박을 가할 것인지, 북한의 핵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햇볕 정책을 할 것인지, 아니면 군사비를 더 늘여 경제와 무력 압박을 통해 고립정책을 취할 것인지 등의 문제 등과도 연결된 부분입니다.

또 다른 신학자 크뤼제만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살인'이라는 단어 '레쉬'의 사용 용례와 의미 연구를 통해, 신명기 22장 26절에 나오는 처녀를 강간하는 것에 대해 살인에 해당하는 '레쉬'를 사용하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살인이 단순히 육체적 목숨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처녀를 강간한 행위는 바로 그녀에게 주어진 삶의 가능성을 빼앗아 버리는 의미의 살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업들이 생산의 효율성을 위해 정리해고를 하거나 기계로 사람을 대체하는 일, 원가절감이라는 명목으로 하청업체에게 압박을 가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보너스 잔치를 벌이는 행위이며, 반대로 부당한 노조의 횡포로 정상적인 기업 활동을 막는 이러한 갑들의 행위들 문제로까지 이어집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직접적으론 살인과 무관하지만, 간접적으론 살인을 일삼는 행위에 해당합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현대의 죽음 개념은 '뇌사'나 '심장'사 등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는 단순히 죽음이 생물학적 개념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고대 플라톤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임종을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향과 육체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으로 그의 대화록 <파이돈>에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는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스토아 철학자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행정가이자 역사가였던 타키투스(55-117)는 <연대기>에서 스토아 철학의 대표자 세네카(주전4-65)의 죽음을 기록했습니다. 거기에는 '즉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는 네로의 친서를 받은 세네카는 고통스러워하거나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태연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죽음을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향으로 담담히 받아들였고, 그의 아내가 같이 죽게 해 달라고 했을 때 말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인식은 좀 더 시간이 흘러 플로티누스에게 와서 종교적인 색채를 띄게 됩니다. 플로티누스에 대해서는 이미 1계명과 2계명을 살피면서 그의 창조관인 유출설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일자로부터 정신이 유출되고, 정신으로부터 영혼이 유출되고, 영혼으로부터 물질들이 유출됐다고 플로티누스는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물질에 해당하는 인간의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스토아철학자들과 영지주의자들에게 죽음은 죄의 원흉인 육체로부터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을 바탕으로 플로티누스의 계대를 이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일자와 합일을 위해 죽기 전 도덕적 훈련, 금욕에 의한 순화, 신의 은총에 의한 황홀경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 또한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영혼과 육체를 구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도 로마서 8장 5-13절에서 영혼과 육체를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플라톤주의자들처럼 물질이나 육체를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하다고 말씀합니다(딤전 4:4).

그럼에도 성경은 죽음을 두 가지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물학적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죽음으로서 혼의 죽음입니다(성경은 영혼과 육체로 보는 이원론과 영, 혼, 육으로 보는 삼원론 모두를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할 것이 아니라 각각의 필요에 따라 적합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는 죽음을 생물학적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기 있는 상품은 다름 아닌 건강에 관련된 것과 안티 에이징 즉, 미용에 관계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생물학적 죽음 외에 또 다른 죽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혼의 죽음입니다. 영은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혼과 육체는 죽습니다. 육체의 죽음에 대해서는 매우 신경을 쓰고 있지만, 정작 우리가 신경을 써야할 성경이 말씀하는 혼의 죽음은 매우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혼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혼의 죽음은 바로 '정신(의식)'의 죽음입니다. 정신의 죽음이란 바로 앞서 말씀 드린 바대로 까뮈의 이방인처럼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자신의 욕구와 충동과 본능을 정신(말씀)으로 제어하고 통제하며, 다스려야함에도 불구하고 까뮈가 묘사한 뫼르소와 같이 본능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정신은 죽어버리고 충동과 본능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다니는 이방인, 즉 그리스도교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죄인 된 삶을 의미합니다.

새 영

성경이 말씀하는 새 생명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새 생명으로서 본능과 충동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진리인 하나님의 의로서 새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새 정신이 또한 새 영(말씀)인 것입니다. 새 영은 다름 아닌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본능적 짐승에서 인간다운 인간이 되도록 하는 참 지혜(진리)와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생물학적으로 죽이는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육체적 본능과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뛰어난 두뇌의 짐승으로 오직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해 다른 생명들을 잡아먹는 것(다니엘, 스가랴, 계시록 등에서 짐승으로 묘사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으로 우리 안에 있는 짐승을 통제하고 제어하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까뮈와 같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 정신을 일깨우고 무장하여, 우리 안에 있는 본능이라는 짐승과 우리 사회 가운데 있는 악이라는 짐승들에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 되고, 이 사회는 정글과 같은 약육강식의 사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에덴의 사회로서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나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25)"는 말씀을 믿고 추구함으로 우리는 이 참된 천국(하나님의 나라)을 땅 끝까지 이루어가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타인의 생명(시간과 노력)을 취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는 짐승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시간과 노력)을 희생하여 새 생명을 잉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강도헌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운영자, 제자삼는교회 담임, 프쉬케치유상담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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