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반(反) 동성애 코드 본문들을 페이크(가짜) 뉴스로 몰아가는 강연 시리즈(한백신학교실/ 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에 대한 기사가 추가로 나와서 받아보았다(해당 강의 링크: http://owal.tistory.com/m/451). 이번에는 바울의 로마서에 나오는 동성애 금지 구절들에 대한 뒤집기 시도였다.

해당 본문에 대한 왜곡이 앞선 회차들보다 심각한 수준이다. 학문적 담론은 자유로운 것이라지만, 이렇게 정제되지 않은 주관적 담론을 시의적 목적을 갖고 일반 매체를 통해 일반인에게 무차별 유포해도 되나 싶어, 부득이 해당 본문에 대한 정론을 다시금 내지 아니할 수 없다.

이 강연과 기사에서 특정된 주요 본문은 다음과 같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7)".

위 본문에서 동성애를 반대하고 금지하는 코드를 벗겨내기 위해 이 담론은 다음과 같이 전개한다.

1) 로마서 1장 26-27절 두 구절(상기 본문)에만 집착할 게 아니라, 1장 전체 구성을 봐야 한다. 특히 본문 상에서의 '사람들(ανηρ)'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일반명사(a man)로 썼을 수도 있고, 특정인(the man)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전자라면 (이 본문이) 당시 동성애자들을 비판하는 본문이라고 볼 수 있지만, 후자라면 그 특정인이 누군지를 알아야 한다.

2) 바울의 서신에는 친서와 위서가 있다(전체 13편 중에서 친서는 7편, 위서는 6편).

3) 이들 바울서신서 상의 바울은 '반동적 바울상'과 '보수적 바울상'으로 나눌 수 있는데, 위서들은 친서 속의 바울을 왜곡시켜 해석했다. 보수로 후퇴시킨 것이다.

4) 역사적 바울의 시대에는 단일한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파'와 '그리스도파'가 있었다. 로마서의 배경이 된 로마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파였으며, 이들은 반 예루살렘파였다.  

5) 로마서 13장에는 성실 납세에 대한 바울의 권면이 나오는데("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7절), 이들 그리스도파가 납세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성실히 납세하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이들 그리스도파는 '강한 자'였던 까닭이다. 어떤 강한 자였느냐?

6) 로마서 14장에는 음식에 대하여 강한 자와 약한 자에 관한 대비가 나오는데, 이들 그리스도파는 '먹는 것'에서 자유로운 강한 자들이었다. (먹을 것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부유 계층?)

7) 이를 종합하면 로마에 사는 그리스도파는 당대 권력에 대항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당시의 황제는 네로였다. 그리스도파가 황제 네로에 대항하고 있었던 것을 바울은 '대항하지 말라'고 경고한 셈이다.

8) 그렇다면 왜 바울은 네로에게 대항하지 말라고 한 것일까?

9) 흔히 네로는 소년애를 하는 동성애자요, 희대의 폭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니다. 후대에 왜곡된 것이다. 소 플리니우스는 네로를 가리켜 '딴따라 황제'라 조롱했지만, 네로는 당시 기득권 세력이던 원로원과 대립했고, 친서민적 정치를 편 황제였다. 그는 원로원 의원 300명 중 42명을 속주 출신 신흥 귀족으로 교체했다.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제전과 검투를 늘렸으며, 대중에 무상 식량을 공급하는 등 '황제 중심의 대중주의'를 퍼뜨린 사람이다.

10)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파 사람들에게 '주적'은 황제 네로가 아니라 소농과 소시민을 착취하는 '귀족 계층'이라고 했던 것이다.

11) 결국 앞서 로마서 1장의 '사람들'(ανηρ)은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귀족 계층으로 해석해야 한다. 로마의 그리스도파 사람들에게 '네로가 아니라 귀족 계층이 적이다'라고 주지하면서, 이들의 관행이었던 소년애를 비판한 것이었다. 그것은 '부끄러운 짓'이며, 귀족층의 권력 남용이고 폭력이었던 것이다.

이상 이 담론에 의하면,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를 금지하는 로마서 본문은 동성애자를 특정짓고 있는 본문이 아니라는 논지다.

경악을 금할 길이 없다. 이것은 길게 반박할 것이 없는 내용이다. 바울의 로마서는 성서의 그 어떤 본문보다도 반(反) 동성애 입장이 명백한 본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와 같이 길고도 깊게 왜곡되어 있다. 

1. 우선 로마서 14장의 강한 자와 약한 자에서 약한 자란 유대교적 그리스도인(Jewish Christian, 유대교 정결례가 아직 작용하는)을 이르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2절)"고 했을 때, 약한 자들이 채소만 먹는 이유는 당시 육류는 대부분 이교도 신전 제의에 사용된 후 식용으로 유통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유대교적 정결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음식에 대해 자유롭지 못했다.

반면 유대교적 전통에 제한을 덜 받았던 이방 계통의 그리스도인들(Gentile Christian)은 상대적으로 강한 자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슨 '부르주아지'와 '플로레타리아트'의 차이가 아니라.

2. 이 강연에서는 정경에 들어와 있는 바울의 비(非) 친필 서신을 서슴없이 '위서'라고 표기하는데, 대단히 거슬린다. 우리는 그런 용어를 쓰지 않는다. 바울의 진정(authenticity) 서신 7편뿐 아니라, 그가 세운 교회들이 보전하고 있던 나머지 서신 모두를 '정경'이라 부른다. 이 강연이 굳이 정경화 과정을 상세하게 열거함으로써 바울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것은, 그만큼 바울의 본문들이 반(反) 동성애 코드로 강력하게 기능한다는 상대적 이유가 있다.

3. 바울이 주적(主敵)을 네로가 아닌 귀족 계층으로 지목했다는 대목은, 이 강연이 계속 그래왔지만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민중'을 초점으로 했을 때만 나올 수 있는 상상력이다. 네로를 복권시키려는 수정주의적 시도는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 저자)로 족하다. 살육이 벌어지는 검투사 놀이가 서민적 정책이라니.

4. 결론적으로 이 강연은 현대의 부자들을 투사시킨 듯한, 당대의 '귀족 계층'을 앞서 서설한 특정된 '사람들(ανηρ)'과 일치시킴으로써, 동성애자를 특정한 게 아니라 귀족계층의 권력 남용과 (성)폭력을 겨냥한 것이라고 맺고자 한 것 같은데, 결정적으로 로마서 1장에는 아네르(ʿο ἀνὴρ)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5. 로마서 1장에는 '사람들'이라는 말이 18장과 23장에서 나오지만, 둘 다 안드로포스(ἄνθρωπος)를 쓰고 있다. 안드로포스(사람)는 이 강연에서 앞서 이르기를, "전자라면 (이 본문이) 당시의 동성애자들을 비판하는 본문이라고 볼 수 있지만..."이라고 했을 때 바로 그 전자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모든)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즉, 모든 사람에게 동성애를 강력하게 금지하는 본문인 셈이다.

6. 안드로포스가 아네르(ἀνὴρ)로부터 온 말이기는 하지만, 안드로포스와 아네르는 쓰임새가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설령 이 강연이 기대했던 것처럼 '호 아네르(ʿο ἀνὴρ)'였다 하더라도, 그 단어만으로는 '귀족 계층'임을 특정 지을 수 없다. 아네르는 '남편'으로서 남자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바울은 로마서 7장 3절에서 이 단어를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ἀνὴρ)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과연, 한 남편이 죽지도 않았는데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고 말했던 '보수적인' 바울이, 동성애에 그렇게 너그러웠을까?

동성애 김진호
▲해당 강연 내용.

이와 같이 '보수적인' 바울의 상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 이 로마서는 다름 아닌, 이 강연에서 주로 '반동적 바울'이 그려지고 있다고 했던 바로 그 친저(authenticity) 중에서도 친저 서신이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영진 기호와 해석
▲이영진 교수. 

우리는 동성애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동성애자는 바른 세계관 안에서 순리의 체계로 나올 수 있도록 교회는 외면치 말고 도와야 하며, 잠재적인 동성애자들이 이 그릇된 세계관으로 진입하지 않도록 강권해야 할 책무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의 해악은 동성애 자체보다도 그 그릇된 길과 세계를 활짝 열어주려는 이와 같은 그릇된 성경 해석의 제창자들일지도 모른다.

실로 우리는 성경 자체와, 그것을 기록한 선진들 앞에 보다 겸손할 필요가 있다.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이다. 그는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매우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해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신학자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