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브라함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으며,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100년을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아브라함
(Photo : )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표상이며 조상입니다.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부르심을 받을 때는 이미 하란에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올라온 것은 몇 살 때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노아가 세상을 떠날 때 아브라함은 60세였습니다. 그때 하란으로 올라왔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가 아니라 하란입니다. 

지금도 하란 우르파에 가면 아브라함이 태어났던 동굴이 있습니다.  그곳에 아브라함 기념교회가 있고, 욥이 살았던 곳과 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태어나서 바벨탑 사건 이후 언어가 혼잡해졌을 즈음에 아버지 데라를 따라서 갈대아 우르에 가서 살았습니다.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서 파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업이 잘 안되어 고향으로 낙향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동 경로

(Photo : ) 아브라함의 이동 경로

고향 하란에 와서 10년 정도 살고 있을 때 아브라함이 75세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을 떠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아닙니다.  데라는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후에 205세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버지 데라가 장사하려고 많이 만들어 놓은 우상을 모두 때려 부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랫 동안 전해 내려오는 노아 홍수의 이야기도 전해 들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노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우상을 만들어 팔던 아버지 데라의 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까요?  유대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과 달을 보면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았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 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계신 것은 확실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만나주셨다는 이야기가 유대 역사에 나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죄는 아주 큰 죄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단번에 응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단번에 응답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세리 마태도 역시 예수께서 부르실 때 단번에 응답하고 나온 인물들입니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사명을 당시에는 몰랐지만 상당히 세월이 흐른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는데 당장 이삿짐부터 챙겨 가지고 대문을 나서라고 하면 당장 그렇게 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갈 길을 모르고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일생은 훗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쓴 것이 아니고, 아들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야곱에서 요셉으로, 요셉에서 그 후손들에게 쭉 이어져 오다가 나중에 모세가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피상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를 잘 모릅니다. 또한 그가 책을 쓴 것도 아니기에 우리가 아는 것은 아주 적습니다.  예수님도 책을 쓰지 않았고,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도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진짜 위대한 인물들은 책을 쓰지 않았고 훗날에 누군가 그의 삶을 책으로 쓰도록 살았습니다.  
  
노아 홍수 사건 이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습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이유는 니므롯의 선동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미지가 더욱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되시며,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전능하심과 신실하신 분이심을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참된 복을 받으려면 아브라함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 영화, 명예, 권세를 다 누렸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을 모르면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복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오신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독교인들고,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대로 열국의 아버지가 되었고,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살에 얻은 독생자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정도의 순종의 사람이었습니.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는 서로 독생자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사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창세 이후로 친구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
(Photo : )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자신의 소유로 인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일절 양보했던 자였습니다. 조카 롯과 함께 가까이 살다 보니두 집안의 목자들이 서로 싸우는 일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선택권을 조카에게 먼저 양보하였습니다. 양보 정신입니다. 그릇이 큰 사람은 양보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물질 관계와 인간 관계를 어느 것을 더 중요시 하는가 하나님께서 달아보였던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세 가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첫째로 물질 관계, 둘째로 인간 관계, 세째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 세가지 관계 중 어느 관계를 제일 소중히 여기는지 시험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고, 인간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면, 물질은 따라오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물질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고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으니까 물질이 도망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든지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디 가든지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을 쌓았다는 말은 예배를 성실히 드렸다는 말입니다. 예배에 실패하고 인생이 실패한 자가 바로 가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 다음 아브라함은 대단한 담력의 사람이었습니다.  담력이 없었더라면 타향 팔레스타인 땅에 감히 발을 붙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인권이 보장되지도 않았던 시대, 치안이 보장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만일 어떤 일이 벌어지면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을 겁쟁이로 보면 안 됩니다. 기독교는 겁쟁이는 따라 갈 수 없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라 간다는 것은 용기와 담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살렘 왕이며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십일조의 조상은 야곱이 아니라 아브라함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따라 드린 것이 아니라, 율법이 생기기 500년 전에 이미 아브라함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 접대를 잘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아예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들어오던 자입니다. 아내 사라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손님이 오면 살진 송아지를 잡아 대접을 했습니다. 어떤 남편이 그렇게 손님을 데리고 집에 온다면 이혼을 하고도 열 번은 더 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반가워하고 손님을 잘 대접을 하는 것은 복을 받는 길입니다. 그러다 보면 천사도 대접하고 하나님도 대접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중보기도를 처음 시작한 인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문제를 가지고 매달린 자가 아니라 남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했던 자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 명까지 하다가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다가 차마 조카 롯을 살려 달라는 말을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 심정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엎으시는 중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조카 롯을 구해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실한 삶은 옆에서 그의 삶을 지켜 보던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랄의 아비멜렉은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와 상호조약을 맺자고 했는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불신자들이 볼 수 있을까요?  불신자들이 기독교인들을 비방하는 것은 우리가 전혀 충성되고 신실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과 깨끗한 삶을 살면 불신자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전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인재를 키우고 사람을 키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기른다는 것은 참으로 거룩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서 길리우고 연습시킨 자가 318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가 다메섹의 엘리에셀입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이 얼마나 믿음이 신실하였는지 그의 삶을 보면 때로는 아브라함 보다 믿음이 더 좋은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 목회자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알아보려면, 그 교회 사찰 집사에게 물어보면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른 318명은 아브라함과 생사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이 얼마나 믿음이 충성스러웠는지 이삭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상속자가 되었을 정도로 충성스러웠던 자였습니다. 

[출처: READ THE BI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