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세바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불의하게 자신의 부인으로 취한 여인이었다(삼하11-12장).  그러나 위에서 언급된 아비가일과 아히노암은 다윗이 왕 되기 전 고난 중 변함없이 함께 한 여인들이다.  이 점에서 이 여인들과 비교한다면 밧세바가 어떤 여인인지  짐작된다.


그러나 나중 밧세바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외적 미모가 죄의 유혹을 일으켰고 그 결과 불행과 비극을 당했지만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정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자신의 무가치함과 하나님의 은총의 위대성을 철저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게 밧세바는 헌신적인 신앙인으로 날마다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연히 아비가일이나 아히노암이 밧세바보다 성경에 더 많이 기록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밧세바의 기록은 자랑스럽지 않은 일로부터 시작하여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까지 기록된다.  사무엘하 11장부터 열왕기상 2장까지 밧세바의 삶은 성경에 계속 기록된다.  이와 비교한다면 그렇게 훌륭하고 지혜로운 여인인 아비가일은 사무엘상 25장 한 장에만 그리고 아히노암은 아비가일의 기록 중 겨우 한 줄(삼상25:43절)만 언급되었다.


상급을 공평하게 줄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이들을 대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속사는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어떻게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일했는가를 기록한다.  주인공 이외 다른 인물들을 조연(助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연들도 하나님의 구속사에 공헌을 한다.  조연들은 이 공헌에 쓰임을 받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감사해야 한다.


조연들은 맡은 사역이 있고 그에 따른 직분이 있다.  사역이나 직분에 따라 은사도 다 달리 주어진다.  이 때문에 은사의 크기를 서로 비교하며 좋고 나쁘다는 이분법으로 조연들을 평가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그 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느 누가 더 자신의 역할에 충성했는가가 더 중요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평가하는 기준일 것이다.  어떤 충성을 하였느냐에 따라 상급이 결정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밧세바가 종국적으로 자신의 외적 미모 덕분에 다윗의 부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두 여인들과는 완전히 다르고 영적 차원에서 본다면 한참 저차원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밧세바는 솔로몬이라는 위대한 왕을 낳는 영광을 얻었다.  인간적 관점에서 보아 정말 하나님은 불공평한 것처럼 보인다.


밧세바 때문에 그의 남편이며 다윗에게 충성한 신하이며 용맹스런 장군이었던 우리아가 전쟁터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물론 다윗이 꾸민 음모의 결과였다.  다윗은 참으로 비열하고 몰인정하며 가증스런 왕으로 하나님 앞에 드러났다.  그가 비록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였지만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가 모형이라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윗 같은 성군이라도 일단 죄를 범한다면 연이어 죄를 짓게 된다.  죄는 죄를 또 낳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했다.


인간적 관점에서 비록 억울하게 죽었지만 우리아는 하나님 앞에 끝까지 충성스러운 종의 삶을 살았다(삼하11장).  이 점에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상을 얻었을 것이다.  그의 삶과 죽음은 성군 다윗이 속으로부터 부패한 인간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죄인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고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면 성군 다윗도 아무 것도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결국 밧세바와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이 사실은 그녀에게서 솔로몬이 출생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증명된다.  불의한 관계로부터 출발된 다윗과 밧세바의 인연은 처음부터 하나님 앞에 불의하고 가증스러워 죄와 죄악 자체였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이런 불완전한 다윗과 영원한 왕국 언약을 이미 맺었다는 것이다(삼하7장).


이 언약 체결 덕분에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영광과 명예와 존귀를 얻은 다윗(삼7:18-19절)은 그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아의 부인인 밧세바와 불의한 성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취소불능했다.  다윗에게 약속한 대로 하나님 나라 다윗 왕국을 계속 이어나갈 후손을 하나님은 주어야 했다(삼하7:12-16절).

 

출처: 그레고리 펙 주연의 영화 '다윗과 밧세바
(Photo : ) 출처: 그레고리 펙 주연의 영화 '다윗과 밧세바


하나님은 그 후손을 밧세바를 통해 다윗에게 주었다.  밧세바가 낳은 아들을 잃은 다윗은 밧세바를 위로할 겸 동침했다.  이로 인해 솔로몬이 출생했다.  불의한 여인에게 솔로몬을 낳을 영광을 하나님이 준 셈이다.  나단의 책망과 다윗의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로 밧세바가 낳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불행한 사건들을 통해 다윗과 밧세바는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 각오와 결단를 내렸다.  하나님도 용서한 죄를 영원히 잊어야 했다.  이의 증거로 하나님은 이들에게서 솔로몬을 낳게 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라는 존재는 이미 용서한 죄를 하나님도 영원히 잊으며,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어떤 불의로도 막을 수 없고, 죄를 지을수록 속죄의 은총도 그에 비례하여 더 풍성해지며,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을 극복하며 자신의 일을 반드시 실현시키고 그리고 앞으로 올 메시아도 인간 가운데 죄인처럼 출생할 것을 자세히 증언해 준다.


인간의 이성(理性)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신의 공의로움을 스스로 어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구속사를 그렇게 진행시킴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가르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영원한 근원이기 때문이다(엡1:4절).


그렇다면 밧세바는 구제불능의 죄인이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밧세바는 다윗과의 관계에서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용서함을 받고 다윗의 부인으로 남았다.  그의 삶의 종점에서 아들 솔로몬에게 마지막 잘못과 실수를 했지만(왕상2:13-25절) 밧세바는 다윗의 부인이며 솔로몬의 모친으로서 영광을 계속 누렸다.


구원 받고 난 이후 성도들도 마지막까지 성결된 삶을 하나님 앞에 살지 못한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잘못과 실수를 범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잘못과 실수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는 아니란 사실이다(요일5:17절).  사망에 이르는 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구세주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거듭난 성도는 이런 죄를 짓지 못한다(요일5:18절).  그러므로 이런 잘못 할 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하며 하나님에게 속죄를 구한다면 하나님의 은총 안에 계속 머물 수 있다(요일1:8-9절).  설사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어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위해 우리들을 고쳐 사용하시거나 또는 우리들의 잘못이 자신의 구속사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도록 별도로 일하신다.  불완전한 인간에게 자신의 구속사를 전적으로 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은총 덕분에 성도는 하나님 앞에 계속 설 수 있다.  이렇게 밧세바는 아비가일이나 아히노암과는 다른 진실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출처: http://blog.daum.net/parkland/141510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