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겟 아웃>의 뇌 이식에 관한 묘사는 당연하게도 기독교의 생명윤리와 관련된 논제들을 담아내고 있다. <겟 아웃>이 머리/뇌 이식에 대하여 제기하고 있는 심리적, 윤리적, 의학적인 물음은 상당히 오랜 대중문화적 역사를 갖고 있다.

1818년 메리 셸리(Mary Shelley, 1797-1851)는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을 집필하였다. 영문학 역사상 최초의 Sci-fi(science fiction) 소설이 머리 이식과 인격의 융합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과학이 도전할 수 있는 가장 기괴하고도 신비한 분야는 기계나 우주가 아니라, 바로 사람의 생명(몸과 정신, 혹은 영혼)이라는 사상이 반영된 증거이기 때문이다.

1818년 <프랑켄슈타인>이 출간됐을 당시의 평단의 반응은 혹평 일색이었다. 작가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소설에 대한 평가는 더욱 악화되었다. 200년이 지난 오늘날은 어떤가?

한 교양 없는 여성의 불경한 공상 정도로 받아들여졌던 장기이식이라는 개념은 이미 의학적으로 현실화되어 있고, 이제 머리/뇌 이식을 통한 인격의 전이라는 관문을 넘으려 하고 있다. 대중문화는 단순히 머리/뇌 이식의 성공가능성에 결부된 으스스한 기분에만 주목하는 데서 벗어나, 이식의 성공 후 인간이해에 발생할 변화에 대하여 진지하게 묻고 있다.

머리/뇌 이식 후 인격의 전이는 단지 대중문화에서뿐 아니라 인간학적으로나 의료윤리(보다 정확히는 신경윤리)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도 민감한 사안이다. 기독교적 입장으로 보더라도 생명윤리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담론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높다. 생명 연장을 위한 인격의 전이라는 공동의 목적 하에 인간복제나 A.I.(인공지능) 기술과 융합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물음의 방향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머리/뇌 이식이라는 의학적 행위를 살인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둘째, 머리/뇌 이식은 기존 인격의 부활인가? 마지막으로, 머리/뇌 이식은 새로 융합된 인격의 창조인가?

◈살인: <아일랜드>(Island, 2005)와 <겟 아웃>(Get Out, 2017)

<아일랜드(2005)>와 <겟 아웃(2017)>은 머리/뇌 이식을 살인행위로 규정하는 작품이다. 기존의 인격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인격을 죽여야 한다는 관점으로 장기이식의 문제를 바라본다.

<아일랜드>는 직접적으로 머리/뇌 이식을 다루지는 않지만, 한 인격의 보존을 위해 다른 인격을 살해하는 방식의 장기이식에 얽힌 문제점들 전반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조직적 복제인간 배양이라는 민감한 사안을 논제로 삼고 있어 이목을 집중시킨다.

<아일랜드>의 결론은 복제인간도 사람과 동일한 영혼을 가진 인격이므로 장기이식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인간복제 자체의 비윤리성을 폭로하는 듯하다.

그러나 영화 속 서사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복제인간인 주인공을 선량한 피해자인 동시에 신인류(복제된 인류)를 해방하는 영웅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단지 인간복제 자체에 반대한다기보다는 인간복제의 실현 이후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사람과 동등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메시지 전달에 더 주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겟 아웃 뇌의식
▲장기이식을 위한 조직적 복제인간 배양을 소재로 다룬 영화 <아일랜드>.

이미 논의한 것처럼 <겟 아웃>은 머리/뇌 이식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영화의 서사를 전개하고 있다. <겟 아웃>에 표현된 뇌 이식은 두 인격 중 하나의 완전한 소멸을 상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뇌가 파여져 나간 몸 주인(흑인)의 자기의식은 감금되어 몸의 통제권을 잃는다. 즉 인격이 파괴된 상태나 마찬가지가 된다. 백인의 인격만이 주인의 자리에 오르고, 흑인의 인격은 노예가 된다.

<겟 아웃>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섬뜩함의 정체는 바로 이 대목에서 드러난다. 흑인을 노예로 삼던 역사적 사회질서를 이제는 정신과 몸에까지 적용시키는 근본적인 예속의 실현가능성이 관객을 몸서리치게 만든다. <아일랜드>와 <겟 아웃>은 모두 몸을 가진 인격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헤겔(G. W. F. Hegel, 1770-1831)이 제시한 방식의 주인-노예 변증법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헤겔은 인류의 역사를 주인과 노예의 가치전도라는 입장에서 바라본다. 그는 주인을 한없이 고결하게 여기는 통속적 인식을 벗어나 노예의 삶이 주인의 삶보다 고결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노예는 노동을 통해서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의 자연을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주인은 단지 노예를 억압함으로써 그 산물을 향유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노예가 주인보다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인정(認定) 투쟁에서 패배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확신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전에는 단지 주관적 확신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기의 확신이 객관적인 것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사람의 의식 사이에는 생명을 건 치열한 투쟁이 개시되고, 이 투쟁에서 자기 생명의 보존을 위해 타인에게 예속되기를 선택하는 자들이 노예로 전락한다는 것이 헤겔이 해명한 주인-노예 변증법의 요점이다.

주인-노예 변증법은 머리/뇌 이식의 문제에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 몸은 인격의 존속을 좌우하는 거대한 가치를 확보하고 있다. 인정 투쟁에서 패배한 노예는 자기의식의 소멸을 감수한 채 주인에게 몸을 헌납한다.

이로써 노예의 몸은 주인의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로 편입되고, 노예의 자기의식은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노예의 인격은 소실되고 만다. 다시 말해서 죽어버리고 만다. 이 경우 머리/뇌 이식은 살인행위로 규정된다. 주인의 인격 존속을 위해 노예를 살해한 격이 되는 것이다.

◈부활: <로보캅(Robocop, 1987)>과 <채피(Chappie, 2015)>

머리/뇌 이식과 관련된 가장 대중적인 규정은 인격의 부활이다. 머리/뇌의 적출은 곧 원래 인격의 완전한 파괴이며 죽음이고, 이를 새로운 몸에 부착해서 되살리는 것은 곧 그 속에 보존된 인격의 부활을 의미한다.

올해 12월 카나베로 박사에 의해 중국에서 시행될 머리이식 수술은 바로 이런 견해에 입각해 있다. 희귀병으로 인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러시아 남성 발레리는 이 수술을 통해 기존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그런데 이런 시도에는 몸을 제공하는 자의 인격 파괴가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따라서 대중문화는 이를 우회하기 위한 방법을 제안하였다. 바로 기계로 이루어진 몸이다.

기계몸을 통한 인격의 부활이라는 주제는 대중문화에서는 이미 클리셰 취급을 당할 정도로 많이 다뤄졌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로 <로보캅>이 있다. 범죄조직과의 총격전에서 사망한 경찰의 머리에서 원래의 기억을 소거한 뒤 이를 로봇의 몸에 부착해서 슈퍼캅을 만든다는 <로보캅>의 서사는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진부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로봇의 몸을 한 경찰의 머리가 점차 사람일 때의 기억을 되찾으며 정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고, 이로써 대중에게 머리/뇌 이식을 일종의 '부활'로 인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채피> 역시 기계로 된 몸을 통한 인격의 부활을 다룬다. <채피>에서 표현된 기계 몸을 통한 인격의 부활은 즉각적이다. 마치 두 대의 컴퓨터를 동기화해서 한 쪽을 업데이트 하듯 사람의 자기의식을 옮겨놓는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도 살아있을 때의 의식을 USB에 저장해 두면 기계 몸에 업데이트해서 되살릴 수 있다. 말 그대로 로봇으로의 완벽한 부활이다.

영화 겟 아웃 뇌의식
▲<로보캅>과 <채피>. 머리/뇌의 이식을 '부활'로 인식시키는 대표적 작품이다.

<로보캅>과 <채피>에 표현된 머리/뇌 이식은 인격이 심리학적 연속성(psychological continuity)에 근거해 존속한다는 견해를 극적 방식으로 대변한다. 인격이란 기본적으로 기억과 성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둘만 보존된다면 어떤 몸이 되든 간에 기존의 인격은 존속한다는 사상이 심리학적 연속성을 중시하는 측의 주장이다.

이런 견해는 머리/뇌 이식을 위한 보다 완전한 몸의 제작을 정당화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기계든 생체든 상관없이 기존의 인격을 전이시킬 수 있는 새로운 몸을 제작하는 일이 생명연장을 향한 열망을 충족시키는 궁극적 대안의 하나로 제시된다. 몸은 단지 부속에 불과하고, 오직 지적 의식과 성품만이 한 인격의 본질로 규정된다. 새로운 몸은 원래 인류의 몸보다 강력하고, 질병과 환경변화로부터 자유로울 것으로 예상된다.

머리/뇌 이식에 대한 정치사회적 동향은 궁극적으로 '부활'이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공산이 크다. 정치사회적 동향이란 결국 대중의 일차원적 욕망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앞서 제시한 '살인'이라는 의미를 회피하기에도 유리하고, 로봇과 생체에 관련된 공학적 발전을 활성화해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1818)>과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 1995)>

머리/뇌 이식을 서로 다른 인격 간 융합에 의한 새로운 창조의 행위로 보는 견해를 대변하는 작품으로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공각기동대>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인격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몸을 구성하는 질료로부터 유래되는 정신현상에 불과하다는 유물론적 인간이해가 반영되어 있다.

영화 및 드라마를 포함한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주요 소재로 채택되어 온 <프랑켄슈타인>은 원래 문필가들 사이의 사소한 놀이로부터 착안된 작품이다.

저자인 메리 셸리는 1816년 17세의 나이로 친구들과 함께 스위스 여행 중이었는데, 제네바에 살고 있었던 영국의 유명 시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의 별장을 방문한다. 셸리와 바이런 일행은 폭풍우가 치던 어느 날 밤 별장에서 지루함을 떨치기 위해 각자 무서운 괴담을 하나씩 지어내는 놀이를 시작했는데, 이 자리에서 셸리가 생각해낸 것이 고압전기를 통해 되살아나는 '융합'시체 크리쳐(creature)의 이야기였다.

영화 겟 아웃 뇌의식
▲영화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한 크리쳐(creature). 로버트 드니로(Robert De Niro)와 헬레나 본햄 카터(Helena Bonham Carter)가 연기를 맡았다.

이 이야기는 이듬해인 1818년 사람의 몸과 정신, 그리고 영혼과 관련된 심오한 주제들을 다루는 Sci-fi 소설로 재탄생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이렇게 빛을 본 작품이다. 문화 전반적으로 계몽주의와 기독교 간의 갈등이 심화돼 가던 시기였던 까닭에 <프랑켄슈타인>은 평단으로부터의 극심한 혹평에 시달렸으나, 오늘날에는 시대를 앞선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프랑켄슈타인>에 묘사된 크리쳐는 머리/뇌 이식 관점으로 보면 기존 인격들 간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인격 창조를 대변하는 캐릭터다. 공동묘지로부터 부분부분 떼어낸 시체의 조각들을 합쳐 사람의 형상을 만든 뒤, 특별한 방식의 해부학적 처리 및 전기적 처리를 통해 살려낸 것이 크리쳐다. 이 크리쳐는 어떤 시체로부터 왔다고 규정하기 어려운 새로운 인격을 갖고 있다.

<공각기동대> 또한 인격의 융합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이 특이한 점은 기계로 전이된 사람의 인격과 A.I.의 융합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인격의 전이와 융합이 새로운 인격을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프랑켄슈타인>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이식을 통한 인격의 융합을 불순한 과학의 산물이자, 비극의 출발점으로 표현하고 있다. 반면 <공각기동대>는 인격의 전이 및 융합을 보다 완전한 존재를 향한 진화의 길로 제시하고 있다.

영화 겟 아웃 뇌의식
▲애니 <공각기동대>의 한 장면. 전자두뇌 및 안드로이드로 구성된 신체에 인격이 전이되어 있다.

◈전망: 새로운 인격의 창조를 위한 머리/뇌 이식

머리/뇌 이식에 깊은 관심을 갖는 연구자들 중 일부는 이것이 융합을 통한 새로운 인격의 창조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머리/뇌 이식과 관련된 인간이해에 깊은 관심을 가진 미국의 생명윤리학자 데그라치아(David DeGrazia)는 실존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머리/뇌 이식 후의 인격을 새롭게 창조된 인격으로 규정한다.

데그라치아의 해명은 다음과 같다. 한 인간의 전체존재란 기본적으로 현존하는 각 개인의 염려(concern)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몸을 가진 인격은 머리 속에 기존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자신의 새로운 실존적 조건(새로운 몸)에 따라 이해하고 염려하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기존의 인격과는 다른 융합된 인격이 될 것이라는 것이 데그라치아의 주장이다.

중요한 사실은 새로운 인격의 창조가 두 인격을 보존하며 융합시키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 인격을 동시에 소멸시키는(살해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만일 새로운 인격의 창조가 두 인격의 소멸을 대가로 하는 것이라면, 종교적 관점으로 볼 때 머리/뇌 이식은 타의적이라면 살인, 자의적이라면 자살로 규정될 수 있다.

대중문화의 동향을 보면 향후 머리/뇌 이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떻게 변화되어 갈지 가늠해볼 수 있다. 아직까지 대중문화는 머리/뇌 이식을 생명의 연장, 혹은 부활의 측면으로 이해하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아바타>(Avatar, 2009)와 <채피>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기존 인격의 융합 및 소멸을 통한 새로운 인격의 창조라는 측면이 점차 부각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공각기동대>와 함께 <아이언맨>(Iron Man)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아이언맨은 주인공 토니 스타크(Tony Stark)가 아이언맨 수트를 착용하면서 완성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머리/뇌 이식과는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심층적으로 보면 아이언맨 수트는 단순히 착용하는 도구 이상의 의미를 담아내는 것으로 표현된다. 실질적으로 아이언맨 수트는 억만장자 스타크의 인격을 슈퍼히어로의 기계몸에 이식한 것이나 다름없이 비춰진다.

게다가 아이언맨 수트와 연동된 A.I. 자비스(Jarvis)는 스타크의 정신과 연합해서 활약한다. <아이언맨> 시리즈는 사람의 인격이 기계몸으로의 전이와 A.I.와의 융합을 통해 새롭게 영웅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상적 배경을 전제로 삼고 있다.

영화 겟 아웃 뇌의식
▲아이언맨(Iron Man). 인격의 전이와 융합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캐릭터.

애초 머리/뇌 이식에 대한 대중적 해석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프랑켄슈타인>에서부터 이미 신체이식이라는 행위에 새로운 인격의 창조라는 개념이 부여된 바 있다. 즉 창조는 머리/뇌 이식에 결부된 근본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대중문화는 점진적으로 이를 부각시키고 있고, 대중은 거기에 맞춰 인식을 변화시켜나갈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대중에게 머리/뇌 이식을 통한 신적 섭리의 왜곡을 정당한 것으로 인식시킨다는 점에 있다. 머리/뇌 이식을 새로운 인격의 창조로 보는 견해에는 당연하게도 심유한 기독교적 사유가 결부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사람의 인격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창조된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머리/뇌 이식은 단순히 생명연장이나 의식의 부활에만 기여하는 행위가 아니라 신적 창조섭리에 대한 인간의 개입으로 확인된다.

이는 종교에 결부된 고질적 욕망이다. 신의 섭리를 비틀어 모방해서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인격창조라는 행위의 핵심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이 점을 유념하여 '현대의 프로메테우스(modern Prometheus)'라는 부제를 붙였다.

인격의 전이, 안드로이드, A.I., 인간복제와 같은 개념 모두는 궁극적으로 생명의 보존과 부활을 넘어 새로운 생명 및 인격의 창조를 향한 기술을 꿈꾸는 가운데 등장한 것이다.

로봇과 A.I.로 대표되는 제4차 산업혁명, 그리고 생물복제와 3D바이오프린팅 등으로 대표되는 바이오 혁명의 궁극적 지향점은 새로운 인류의 창조를 향하고 있다. 이런 문화적∙기술적 정황 속에서 과연 성서적 창조섭리에 근거한 인간 이해가 그 영향력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기독교인들이 예리한 비판의식으로 무장하지 않은 채 대중문화의 조류에 편승하기에 급급하다면, 머리/뇌 이식의 성공과 일반화가 초래하는 도전에 과연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 겟 아웃 뇌의식
▲제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대중문화적 조류에 대응해서, 기독교인들은 성서적 인간 이해를 온전하게 보전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대중문화적 조류에 대응해, 기독교인들은 성서적 인간 이해를 온전하게 보전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의미로든 자기 삶에 연관된 모든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재료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격식 없이 조합하여 하나의 멋진 작품을 만드는 일을 브리콜라주라고 한다. 이 기법은 오늘날 광고나 뮤직비디오, 조형예술, 팝아트(pop art) 등에 자주 동원되며 영화에서도 빈번하게 활용된다.

오늘날의 영화는 삶의 모든 관심사들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조합하여 그려내고 있다. 그 안에는 기독교인들이 환영할 만한 요소와 불편해할 만한 요소들이 정교하고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본 칼럼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영화들 속에 뒤섞여있는 아이디어들을 헤아려 보고, 이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 것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