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은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다. 많은 탈북민들이 대한민국에 온 이유에 대해 "자유를 찾아서 왔다"고 답한다. 자유? 자유란 무엇일까? 모 언론 광고 방송에서 자유란 타인으로부터 구속 받지 않는 것이 아닌, 여행이 자유라고 광고한다. 아마도 자유를 빼앗겨 보지 못한 사람들의 농담이 아닐까 생각한다.

탈북민의 한 사람으로써 구속된 몸의 자유보다 사상의 자유가 더욱 간절했던 지난날이 지금도 가슴에 맺힌다.

나는 1968년 북한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철저한 김일성주의 사상을 주입받으며 살아왔다. 나를 낳은 부모님도 나에게 늘 자신들은 낳았을 뿐이지, 나의 생명을 끝까지 책임지고 지켜줄 분은 위대한 장군님이고 조선노동당이라고 세뇌시켰다.

때때로 집에 밥상에 온 식구들이 둘러 앉았을 때도, 부모들은 아버지 장군님의 은혜로 오늘 밥을 먹을 수 있음이 고맙다고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를 향해 숭배하게 하면서, 말로 아닌 행동으로 우리를 교육시켰다.

그러나 이런 부모님들의 결과는 참혹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으로 우리 집은 '백두산 줄기'로 불리며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북한 교육국 수장으로 계셨던 할아버지가 교과서에 수록된 김일성 가정의 역사를 마치 조선의 역사처럼 가르친 것은 거짓 교육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 죄로 숙청되고, 충성분자들을 길러내는 당 조직비서로써 자식들에게도 충성을 강요했던 아버지마저 연좌죄로 사상범이라는 비극적 삶으로 생을 마치고 말았다. 이런 가족사 앞에 나 자신은 늘 사상의 자유가 그리웠다.

탈북민들은 부모 형제를 버리고 온,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자들로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도 있다. 어릴 적엔 차라리 어렸기에 사상에 맹신할 수 있었지만, 청년이 되고부터는 북한 사회의 현실 앞에 사상의 노예로서 삶을 산다는 것이 수치였고 괴로움이었다.

북한은 지금도 사람들을 계급으로 분리시켜 놓고 사회주의 혁명을 선동한다. 청년의 때에 제일 괴로웠던 것은 자연재해로 인해 북한의 김일성 구호선전물들이 훼손이라도 될라치면, 계급투쟁의 대상인 불순사상 가족들을 각성시키고 군중을 각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보위부로 불려가 조사와 검증을 받았던 것이다. 그 지난날들이 지금도 몸서리치게 마음을 아프게 한다.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음에도 "지난 밤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장군님 노선에 불만을 품고 한 짓 아닌가?" 등 참기 어려웠던 사상검증은 때로 자살 충동으로 까지 이어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혹 일부는 참기 어려운 모독과 괴로움으로 거짓자백을 하여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도 했다.

이런 사상 투쟁의 삶이 결국 우리를 탈북이라는 결단을 하게 한 것이다.

99학번으로 감신(감리교신학대학교) 동산에서 공부할 때, 우연히 당시 한총련 조직에서 학생운동하던 한 동기생과 식사를 하던 중 나누었던 대화는 아직도 내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당시 감신에는 한총련에 가담되어 한총련 투쟁노선을 암암리에 학생들에게 계몽시켰던 동기들이 여러 명 있었다. 이들은 "많이 가진 자가 없고 누구나 다같이 골고루 잘 사는 지상낙원에서 왜 왔는가? 혹시 죄를 범하고 온 것 아닌가?"고 나를 괴롭혔다.

민주주의에서 사상의 자유를 누리며 살면서도 공산주의 거짓 이론에 속아 북한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비참한 이 친구들의 말이 한없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당시 그에겐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 아마도 체험해 보지 못한 무지함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때 그에게 했던 말이다. "북한이 그리도 좋으면 왜 여기 대한민국에서 사는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처럼 목숨 걸고 갈 필요도 없이,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가서 북으로 들어가 살면 되지 않느냐?" 이 말에 그는 "내 고향이 한국인데 내가 왜 가겠냐"고 싫은 내색을 보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자유? 나는 오늘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 말씀을 곱씹어 본다. 진정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누리는 자유를 우리에게 보장함을 깨닫게 된다.

특히 이 땅의 젊은이들이 자유의 소중함을 그리스도의 진리를 통해 깨닫게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